"내가 대학을 그만둔 이유"


김예슬





사라진 물음과 이상한 물음


3월 10일 눈 내린 봄날 아침, 3년을 다닌 고려대학교 교정에 들어섰다.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내 심장의 떨림으로 꾹꾹 눌러쓴 대자보를 담벽에 붙이고, 찬바람 부는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 교정에 마지막

으로 선 한 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렇게 격렬한 반응은. 3월 첫 수업시간에 대자보를 함께 읽다 끝내 울어버렸다는 선생님과 중학생들, 

내 아이만은 명문대 가길 바랐다며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학부모님들, 그만둘 용기는 없지만 마음으로 보이콧을 하겠다고 

지지하는 학생들, 이 거대한 시스템에서 하루만이라도 빠져나오고 싶다고 토로하는 직장인들까지. 오랫동안 참아왔던 슬픔과 

분노가, 수백만개의 돌맹이의 외침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질문이 쏟아졌다. 왜 대학을 그만두는 거냐고, 진짜 이유가 뭐냐고, 이상했다.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왜?” 라고 

물은 사람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사라진 물음, “왜 대학에 가는가?” 그리고 이상한 물음, “왜 대학을 그만두는가?”.  나는 

3장의 대자보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이 ‘사라진 물음’과 ‘이상한 물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또한 나 스스로에게 던져온 

수많은 삶의 물음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조심스럽게 꺼내놓고자 한다. 이건 ‘대학생 김예슬’의 문제를 넘어 ‘인간 김예슬’의 

문제이고, ‘김예슬’의 문제를 넘어 수많은‘김예슬들’의 문제일 것이기에. 무한경쟁의 현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대학 문제, 

사회 양극화의 뇌관인 교육문제, 나아가 세계화 시대 우리 삶과 인간성의 문제일 것이기에.




자격증 장사 브로커, 대학


대학이라는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실체다. 대학은 기업의 ‘채용 일제고사’를 

대신해 등급을 매기고 분류하는 시스템에 복무하고 있다. 학생들끼리 ‘무한경쟁’을 시키고, 살아남은 자를 적당한 값에 

기업에 넘기면서 말이다. 졸업장과 자격증은 한 인간에게 사라지지않는 가격표를 남긴다. 구직 기회도, 우정도, 미래도, 

결혼마저도 대학졸업장과 자격증에 따라 ‘등급’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인간성의 우열과 인생이 규정되기에, 일생을 결정짓는 

특권을 따느냐 마느냐의 이 게임에 모두 올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모두가 대학 문을 향해 달려간다. 

더 높은 대학 졸업장, 더 많은 새로운 자격증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런데,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온 삶을 바쳐서 이뤄낸 ‘대학 가는 꿈’의 결과는 무엇인가? 

‘무직, 무지, 무능’ 3무가 아닌가! 


무직, 졸업 첫발부터 실업이다. 한국의 모든 부모와 아이들은 대학을 가장 유리한 투자처로보고 올인했지만, 지금 세대는 

투입 대비 수익이 안 나오는 역사상 최초의 ‘적자 세대’가 되었다. 대졸자 중 정규직 취업은 반토막도 안된다. 나머지는 

청년 실업자나 비정규직이나 알바 인생이다. 대학은 값비싼 실업자 양성소가 되었다. 


무지. 배울수록 무지를 학습한다. 내가 진정으로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 지.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웰빙 타령은 하면서도 내가 먹고 쓰는 게 어디에서 길러지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연해애할 줄도 모르고 자기를 

성찰할 줄도 모른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삶에 닥친 수 많은 실체적인 문제에 우리는 얼마나 당혹하고 무지한가? 


무능. 대학생이 되고서도 제 앞가림 하나 하지 못하고 무능해져버렸다. 그저 성적만 좋고 돈만 잘 벌고 영어만 좀 되면 간편한 

소비행위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학습한다. 머리만 과잉 발육되어 실제 삶과 사회현장에서는 무능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대학 없는 대학은 ‘진리’FF 학점에 팔아넘겼다. ‘자유’는 두려움에 팔아 넘겼다.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겼다. ‘스펙’에 매달리

자니 젊음이 서럽고, 다른 걸 하진 뒤쳐질까 불안하고, 그렇게 대학은 점점 길어지고 젊음은 점점 짧아진다. 이 3무의 빛나는 

졸업장과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 대부분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딴 후에도 

본전치기하는 사람은 상위의 극히 적은 사람뿐임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온 것은 아닌가.




인간을 잡아먹는 시장


졸업장과 자격증은 도대체 누가 왜 요구하는가? 사회는 마음껏 개성을 발휘하라고, 누구에게나 노력하면 길이 열려 있다고, 

기회는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 결과는 어떤가? 모든 안정되고 좋은 일자리는 대기업과 명문대학의 자격증시스템으로 

고착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사람을 돈 버는 도구로 보는 기업과 자본은, 한 인간을 단번에 평가할 수 있는 저비용 고효율의 

잣대를 필요로 한다. 그 잣대란 어떤 학벌과 자격증을 갖고 있느냐이다. 오직 그가 갖고 있는 자격증에 따라 재래시장에 진열

될 지, 슈퍼마켓에 진열될 지, 명품 매장에 진열될지, 인간 상품 진열대의 레벨이 달라지는 것이다.


시장으로부터 선택받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그들 기준에 맞는 사람인지 증명하고 세일즈해야 한다. 인간성과 꿈과 

자기다움이 살아있어서는 기업의 이윤창출에 쓸모있는 부품이 되지 않는다. 대기업들은 창의적이고, 도전정신이 있는 인재를 

요구한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길들여진 돌고래의 톡톡 튀는 재주를 가리킬 뿐이다. 도 높은 연봉을 흔들어 보이며 잘한다, 

최고다 칭찬하면 재주 부리다 진이 빠지는, 그러다 더 싱싱한 돌고래로 대체되는 ‘에버랜드’의 돌고래.


그들이 필요로 하는, 그들이 쓸모있다고 판단하는 그것이 정말 인간인가? 나는 그렇게 돈벌이 브랜드와 연봉으로만 불리어도 

되는 존재인가? 아는 슬픔도 분노도 없이, 아무런 물음도 없이 내 인간성과 영혼과 꿈을 잡아먹힐 수는 없었다. 아니 한번뿐인 

내 인생을, 청춘을, 그렇게 나를 팔기 위해 발버둥치며 죽어갈 수는 없었다.




배움을 독점한 국가


가장 끔직한 말의 타락 중의 하나가 ‘교육인적자원’이다. 대한민국이 대학과 학교의 존재이유로 내건 것이 ‘교육인적자원’

이다. ‘인적자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최고  목적인가? 그 아래에서 초. 중. 고등학교는 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을 

12년 동안 강제수용하고 획일적으로 가공시킨다. 학교는 기업의 부품이 되는 인간자원을 대학에 조달하는 최대 규모의 

독점 하청업체가 된 것이다.


자원이 아닌 나는, 국가가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두 가지 만행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배움에 대한 

권한을 학교가 독점해 버린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서로를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만인의 권리는 자격증을 가진 교사에게 

독점이 되었다. 모두에게 똑같은 교육을 주입시키고 대학입시라는 똑같은 잣대로 평가한다. 우리는 왜 누군가가 짜놓은 틀에 

강제로, 획일적으로 배워야 하는가? 왜 정해진 때에,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텍스트로 배워야 하는가? 왜 건강을 파괴하면서 

재미도 열정도 없이 성적 경쟁의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하는가?  그러한 ‘인적자원화’는, 한 인간이 얼마나 잔신의 인간성과 

고유한 개성을 짓누르고, 회사인간에 편입되는 과정을 모범적으로 밟아왔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손에 쥐어

지는 것은 한 장의 졸업장, 아니 다음 트랙 경쟁의 지원자격증뿐이다.


둘째,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무교육이 실상 소수에게만 특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부실한 먹이로 가둬 기른 말과 

잘 먹이고 특수 조련된 말을 하나의 트랙 출발선에 세워놓고 ‘기회의 평등’ 이라고, 경주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강제하는 게 

평등인가? ‘학교교육의 주술’을 받아들이면, 가난한 이들은 자신보다 더 충실히, 더 많은 돈을 들여, 더 높은 학교에서, 더 많이 

교육받은 이들이 더 많은 특권을 가질만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낙오자들은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학교가 없었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각가 의무로 강제하는 ‘학교’, 자본과 기업이 요구하는 인적자원의 ‘자격증 제도’가 살아 있는 한, ‘삶의 배움’과 ‘배움의 자유’가 가능할까? 하나뿐인 경주 트랙이 아닌 수많은 길이 난 야생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왜 꿈이어야 

하는가? 나는 정말 묻고 싶다.




내 삶의 결정권을 누가 가져갔나


지금 우리는 나답게 살기 위해 꼭 이런 것이 필요해서 배우고, 꼭 이만큼 필요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다. 일단 돈부터 벌고 

봐야 한다. 그래서 너나없이 무조건 대학은 가고 봐야 하고, 대학과 자격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제 

자격증 없이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해진 듯 하다. 시인과 작가가 되려면 문예창작과를 나와야 한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삶을 

바치고 싶으면 사회복지과를 나오고 자격증 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요리를 하고 싶어도 비싼 돈 들여 무작정 대학 가서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알바해서 이탈리아, 프랑스 유학을 가야 한다.


원래부터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식량과 같은 필수품은 자급자족했고, 직접 자기 노동

으로 충족할 수 없는 것을 구하기 위해 환금작물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생활 전반 화폐화, 시장화 되자 모든 활동에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돈과 시장에 대한 완벽한 의존의 시대, 삶의 자율에 대한 완벽한 상실의 시대가 된 것이다. ‘내 삶의 결정권이 

내게 없다’는 현실 앞에서의 두려움, 이것이 국가와 대학과 시장이 만들어낸 우리 시대 고통과 모순의 핵심이 아닐까. 

사회 양극화와 청년실업 문제도 여기에 뿌리를 둔 가지가 아닐까.


대학을 거부한 나의 요구는 88만원을 188만원으로 올려달라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의무교육과 자격증 유일 잣대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며, 이를 이끌어가는 대학과 국가와 시장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다. 나아가 이 억압의 삼각동맹이 

공고하게 만들고 있는 비즈니스 문명, 도시, 기계문명, 자본권력이 세계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도전이다. 우리 시대의 ‘진보적’ 

삶의 내용과 삶의 방식에 대한 이의 제기이기도 하다.




‘부모 산성’ 넘어서기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은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서이기에, 나는 거짓 희망의 말들을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세계 경쟁 

무대에서 1등으로 빛나라며 젊은이들의 가슴에 탐욕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G세대’ 담론, 대학 졸업을 못하고 중산층이 

못되면 억울하고 비참하리라는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88만원 세대’론 등의 물질주의 진보담론, 독서마저도 성공과 경쟁력과 

지식권력 강화의 수단이 된 인문학 희망 담론 등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책에 담았다. 나는 여기서 ‘사랑과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모님들의 기대와 애착에 대해 한말씀 드리고 싶다.


대학 거부를 앞두고 내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부모님을 생각할 때였다. 대학 거부 선언 이후 많은 중고생, 대학생들로

부터 비슷한 편지를 받았다. “부모님이 반대하면 어쩔 수 없어요”, “엄마는 이렇게 말해요 네가 아직 현실을 몰라서 그래, 

너 잘못되라고 그러겠니, 다 널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나 하나 지키기도 불안하고, 아이 낳기도 두려워진 시대, 하나만 낳아 남부럽지 않게 기르자는 부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애정과 기대를 한 아이에게 쏟아 붓는다. 안 먹고 안쓰고, 자신의 인생을 모두 유보해가며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고 쏟아 붓는다.

그 결과 우리들은 서른 살이 넘어서도 의존적이고 덩치만 큰 ‘어른 아이’가 되어 보모를 착취하며 언제까지나 보호막 속에서 

책임을 회피한다. 이 악순환은 대를 물려 계속된다.


세상 모든 좋은 부모님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제발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당신의 몸을 빌어 왔지만 그는 신성하고 

고유한 존재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 ‘사랑의 이름’으로 길들이며 자율성의 날개를 꺽어버리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서툴지만 자기 생각대로 살고 책임지겠다는 

자녀의 저항에 기꺼이 저주는 것 입니다.




꿈이 직업인 현실


대학, 국가, 시장으로부터 학습된 두려움은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모든 상상력과 용기를 잠식했다. 지금까지 쓴 내용은 

내가 대학 거부를 결심하기까지 겪은 두려움의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과 정보로 무장했다

는데,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지 확신이 없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는데, 나는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가 늘어났다는데, 나는 갈수록 꼼짝없이 얽매이고 자율성을 잃어간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의 욕망과 내면에까지 뿌리 내린 숨은 주고악의 실체를 찾아 직시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내 고통의 근원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순간이 있었다. 꿈을 물어보면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직업으로 

대답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 맥이 빠지고 슬픈 순간이었다. 어떻게 꿈이 직업일 수 있는가? 정말 어떻게 직업이 

꿈일 수 있는가! 이 우주에 유일한 존재이자 67억 인류 중 단 하나뿐인 존재들 저마다가 지닌 67억개의 꿈이 무서운 속도로 

멸종되고 있다. 성공과 행복의 한가지 잣대를 향한 무한경쟁의 질주 속에.


몇 개의 잘나가는 직업에서 꿈을 찾지 말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내 안에 얼마나 빛나는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한번 탐구해보지도 않고, 남의 시선에 상처받고 경쟁하면서 학습된 두려움에 자신을 팔아버리지 말자. 단 하나를 위해 

경쟁하는 꿈, 실용적인 꿈, 주어진 꿈은 금세 폐기처분되어 버린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인지, 어떻게 

살면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 지를 먼저 찾자. 그렇게 삶에서 시작하다 보면 내 인연의 때에 맞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알게 될 것이고, 그에 맞는 직업을 골라가면 된다. 꿈은 직업이 아니다. 직업은 꿈이 아니다! 나는 눈앞의 대학이나 직업보다 

더 큰 존재라고 당당하게 외치자. 그게 젊음의 특권이고 대학 시절의 의무일 테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다


대학 거부 선언을 하면서 용기 있게 대학 문을 나섰지만, 막막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의 선언은 조용히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져나온 대학은, 이 거대한 시스템은 끄떡 없이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생각할 틈도 

없이 거짓 희망의 북소리에 맞춰 앞만 보고 진군한다는 것이 훨씬 괴로운 것임을. 지금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길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파야 낫는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분명 다른 희망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든다.


나는 모두가 대학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학은 결코 지식의 독점체가 아니라고, 나를 규정짓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자격증일 수 없다고, 안과 밖의 거대한 나의 적을 향해 저항하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요구한다. 대학은 여러 배움의 자유를, 우리 스스로 포기해버린 ‘배움의 민주주의’를 되찾아야한다고. 삶이 더 이상 자격증을 

통해 지배되지 않는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선택과 미래는 훨씬 다양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기에, 젊음은 저항하고 삶은 저항이기에, 나는 내 자리에서 근원적인 저항을 치열하게 

살아낼 것이다. 옳은 일을 옳은 방법으로, 꾸준히 밀고 가는 것만큼 무서운 힘은 없다는 것을 믿는다. 작지만 균열은 시작

되었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