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Self-Improvement

[자료] 최근 자기계발서의 변화

namaste123 2010. 7. 15. 03:30



저장stock에서 순리flow로, 조에서 울

최근 자기계발서의 변화

 


글쓴이/ 한​기​호


 

2007년까지 대단했던 일본의 신서 붐이 2008년에는 주춤했다. 『바보의 벽』이나 『국가의 품격』 같은 문제작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도 2008년에 화제를 끈 신서가 있었으니 재일한국인 2세인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이었다. 이 책은 이미 밀리언셀러에 올랐다. 『고민하는 힘』은 제목 그대로 지금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자는 책이다. 각장의 테마는 자아와 돈, 정보와 청춘, 노동과 순애, 죽음과 늙음 등 우리가 늘 가까이 하는 평범한 주제다.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인용한 뒤 다시 그것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사상과 비교하며 풀어간다.



자기계발서, 우울증 치유제


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인가?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닌 고독의 괴로움, 변화를 견뎌야 하는 괴로움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슬로건을 내건, 즉 서양의 모방을 시작한 메이지明治라는 시대에 이르게 된다. 그 시대 일본에는 과학, 합리적 사고, 개인주의와 같은 것이 일시에 몰려들면서 ‘근대의 막’이 열린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무렵부터 세계화가 시작된 것”이라는 시각을 보여준다.

 

메이지 시대로 바뀌기 바로 전 해인 1867년에 태어난 나쓰메 소세키와 그보다 3년 전인 1864년에 태어난 막스 베버는 동서양에서 근대가 열리던 그 즈음 왕성하게 활동한 사람들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의 대부분은 ‘근대’라는 시대와 함께 시작된 것이니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걸쳐 있던 탈아입구의 시기에 인간의 앞날을 내다본 두 사람의 안목이 20세기 말과 21세기 말에 걸친 지금에도 여러 의미에서 관통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19세기 말 장기 불황과 내란 상태로 어지러웠던 유럽의 여러 나라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눈길을 돌렸다. 일본도 비슷한 이유로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부) 등지로 몰려갔다. 이른바 ‘제국주의’가 발흥한 것이다. 이는 국경을 넘어 ‘글로벌 머니’가 세계를 종횡무진 ‘배회’하고 있음에도 그 ‘폭주’를 막을 수 없는 지금의 모습과 닮았다.

 

제2차 대전 후 일본과 독일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비참한 실패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간을 소모품처럼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이 있다’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국가가 있다’는 방향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그렇게 몇십 년 동안 노력해 왔는데 현재의 상황은 수상쩍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세상을 둘러보면 니트(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ning)족이나 프리터(free+Arbeiter)족, 비정규직이 넘쳐나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일정한 연령층의 사람들을 충실하게 훈련시켜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시스템은 점점 기능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버려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아마도 그런 상황과 관계가 있겠지요. 우울증에 빠지거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백 년 전의 일본에서도 ‘신경쇠약’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음의 병이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신경쇠약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데, 현재의 상황에서도 그와 유사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회현상에서도 백 년 전의 것과 비슷한 것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사종교적인, 이른바 ‘영적(spiritual)’인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세기말적’이라고 표현되는 병적이고 위험한 문화가 유행했는데, 현재 인터넷이나 가상공간을 보면 이와 비슷한 것이 횡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당시와 비슷합니다."

 



저자는 이런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근대의 입구에서 발생한 문제가 전쟁이라는 중간 지점에서 몸을 돌려 다시 돌아오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근대의 입구에서 발생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고 백 년 동안 계속 성장해 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가 백 년 전에 쓴 것을 다시 읽어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고민하는 힘』을 읽으면서 앞으로 자기계발서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말대로 자유화, 정보화, 세계화 등이 진전되면서 ‘개인’이 겪는 아픔의 정도가 더욱 가혹해졌다. 개인은 그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계발을 하려 했다. 자기계발서는 일종의 우울증 치유제였던 것이다.

 

21세기 초입부터 한 번 살펴보자. 대중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진명출판)를 읽으며 남보다 빨리 치즈를 찾기 위해 미로를 탈출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치즈를 찾지는 못했다. 『마시멜로 이야기』(호아 킴 포사다 외, 한국경제신문)를 읽으며 아무도 가지 않는 길, 외길을 가려고 했지만 과연 그 길은 찾았는가? 지금은 이정표마저 잃고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시크릿』(론다 번, 살림BIZ)이 은밀하게 알려주는, 수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조차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개인의 아픔을 치유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 많던 성공우화들도 이제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들 대형 베스트셀러 외에도 대중은 돈을 벌고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서를 엄청나게 읽었다. 자기의 장점만 키우면 성공할 수 있다는 무수한 속삭임을 진정으로 믿고 따랐다.  많이 모으고 많이 만들고 남보다 우위에 서면 정말로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경제능력이 상위 1%에 속한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쟁취하자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져 갔다. 극단적으로는 1등만 살아남고 2등마저도 목에 풀칠하기 바쁜 세상이 되었다.

 


정보의 전인격적인 통합


이제 대중은 지지자, 간판, 돈 등을 끌어모으는 저장stock을 포기하고 세상의 순리flow에 순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부에서부터 바라보며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정보를 분절화해 전문화, 세분화하던 것을 전인격적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다름없다. 개중個衆(개인+대중)의 이런 성향은 책시장의 트렌드를 바꿔놓았다. 최근 출판시장에서 나타나는 주요 흐름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타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타자와의 관계에 눈을 돌렸다. 강상중의 고민이 대표적이다. 『고민하는 힘』이 화제의 신서가 되면서 밀리언셀러 등극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또 1983년에 처음 출간된 『사고정리학』(도야마 시게히코, 뜨인돌)의 판매부수가 2006년 8월 이후 급속하게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창조형 두뇌를 갖고 스스로 날 수 있는 ‘비행기 인간’이 되려면 망각을 통해 필요 없는 정보를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계속해서 잊지 않으면 창조력도 통찰력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책이다.

 

둘째, 작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을 일상에서 찾기 시작했다.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한겨레출판)는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법한 아주 사소한 일에서 자신의 비전을 찾고 있다. 법정의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 노희경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헤르메스미디어), 고도원의 『당신이 희망입니다』(오픈하우스) 등은 모두 아주 가벼운 경험에서 소중한 지혜를 이끌어낸다.

 

최근에 출간되는 책들에 등장하는 가족은 더 이상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4개월 만에 50만 부가 판매된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창비)에서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소설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상처를 주는 사람은 절친한 이웃이나 가족처럼 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가 불러온 불황, 실업, 폐업, 부도, 파산, 자살 등은 대중의 가슴을 짓누른다. 가슴으로만 울고 있기에는 너무 지친 개중은 힘겨운 자들의 내면풍경을 담은 책들을 찾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거나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된 출판시장의 ‘자기치유self-healing’ 열풍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셋째, 사람이 갖춰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이 가진 역량을 과도하게 띄워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외쳐대던 미국산 자기계발서에 대한 관심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그보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한계가 많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에서 그 역할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은 늘어나고 있다.

 

최근 출판기획자들이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지혜를 찾아 자기계발서로 펴내려는 것은 그런 흐름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사, 천하의 경영자』(차오싱, 바다)와 『난세에 답하다』(김영수, 알마),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김영수, 추수밭) 등을 읽으면서 곧 이런 책들이 큰 흐름을 이룰 것이라고 판단했다.이런 책은 구태여 저자가 지식인일 필요는 없다. 지식인들은 지식을 분절화하는 일에는 ‘선수’였는지 몰라도 통합하는 능력은 대부분 젬병이었다. 그래서 어느 현장에서든 고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가령 연예인만 놓고 보자. 연예인들의 삶이 완전히 노출되고 있다. 그들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방송프로그램들이 인기다. 이럴 때 그들의 맨얼굴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을 펴낸다면 독자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빅뱅의 『세상에 너를 소리쳐!』(쌤앤파커스)가 지식인들의 눈에는 조롱거리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험성적에 시달리고, 불안한 미래로 인해 대학 교문을 나서기가 두려운 젊은이들에게는 이만한 ‘교과서’가 따로 없다. 한 달 만에 30만 부가 팔린 것을 단지 팬덤 현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가르침이다. 과학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것은 이제 별로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개인은 너무 불안하다. 세상이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무슨 희망이라도 있어야 기다리기라도 할 텐데 그런 것은 권력을 쥔 상위 1%에나 해당될 뿐 수많은 개인은 목숨 부지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우울증 문제도 심각하다. 자살은 비단 유명 연예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 주변에도 멀쩡한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일이 과거에 비해 크게 늘었다. 그래서 나는 지개야 스님의 『묵언마을의 차 한 잔』(텐에이엠)이란 책을 기획한 바 있다. 이 책에는 한때 자살을 꿈꿨던 24명의 인생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들은 지개야 스님이 내어준 차 한잔과 한마디 충고를 듣고 마음을 돌렸지만, 사실상 지금 무수한 사람들이 자살을 꿈꾸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전생, 내세, 채널링, 임사체험, 오컬트 등에 대한 관심도 부쩍 증가했다. 『고민하는 힘』에 따르면 19세기 말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19세기 말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남부독일에서는 명상, 채널링, 임사체험, 죽은 자와의 대화 등 다양한 신비체험이 유행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도 신경쇠약이라는 마음의 병이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문상을 하기 위해 그렇게 긴 줄을 선 것은 근원적인 존재에 의지하고자 하는 타력본원他力本願의 욕구가 작동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이유로 나는 종교 지도자의 책들이 곧 크게 뜰 것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두란노)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릭 워렌, 디모데) 등이 우리 출판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이제 더 강력한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의 책이 등장해 대중의 관심을 끌 확률이 높다. 나는 최근 출간된 문선명의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김영사)를 주목하고 싶다. 세상이 험악할수록 기존의 권위 있는 종교보다는 비록 마이너리티일지라도 새로움과 긍정적인 대안을 내놓으면 빠르게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문선명의 책에는 그런 요소가 적지 않았다.

 


조의 시대와 울의 시대


<주간 아사히> 2008년 9월 5일자에는 『울의 힘』의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와 강상중의 대담이 실려 있다. 이 대담에서 두 사람은 20세기가 ‘조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울의 시대’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조가 stock이라면 울은 flow라 할 수 있다. 물론 울은 밖으로 드러나는 뜨거운 감정인 ‘우憂’와 내면에서 솟구치는 냉철한 사고인 ‘수’를 합한 것이지만 타자를 향한 우보다 자아 찾기라는 수가 더욱 강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워 페어(전쟁)가 웰 페어(복지)와 연결되어 있었던 조의 시대는 끝나고 전쟁은 점점 음산하고 비참한 내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강상중의 말에 “의학에서도 큰 병원의 첨단 치료라는 조의 의학이 아니고 대체의학 등과 같은 울의 의학에 쓰는 돈이 늘고 있다. 앞으로는 모든 분야가 울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나의 직감”이라고 이쓰키가 화답한다. 그들의 지적처럼 9.11 이후 겉으로 보이는 대량생산과 대량판매 같은 시끌벅적한 ‘조’보다 ‘에코’처럼 적이 보이지 않는 ‘울’의 전쟁이 늘어났다.

 

100년 전 소세키는 “젊은이는 국가, 정치, 혁명 따위의 말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이미 끝나고 작은 이야기 안에 인간성의 근간에 관련된 것을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천하국가를 이야기하거나 격렬한 남녀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힘든 현실을 적당한 거리감을 갖고 여유 있게 살펴보는 소설을 주로 썼다. 자기계발서 저자가 아닌 우리 작가들이 유심히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기획회의> 지난 호에서 ‘중간소설’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지금 경제적인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결혼도 못하고 애인도 없는 ‘성적性的 프롤레타리아’마저 속출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순리의 흐름은 더욱 거세질 것 같다. 꼭 100년 전에 벌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어찌 역사는 이리 반복되는가? <기획회의> 244호 (200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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