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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眞秘錄: 제1장 止感說 (2)

namaste123 2010. 3. 17. 05:00







제1장 지감설(止感說)





제1절 정좌(靜坐)

맑고 밝고 깨끗한 방을 가리어 모든 먼지를 깨끗이 떨어 버리고 목욕재계한 뒤 북쪽 벽을 향하여 앉을 자리를 정하여 잡아라. 먼저 작은 상 하나를 앉을 자리 앞에 놓고 그 위에 흰 종이를 펴고 그 위에 천수[天水:밤중 자정에 나오는 물] 한 그릇을 받들어 놓되 날마다 한번씩 인시(寅時)에 갈도록 하고 그 앞에 향로(香爐)와 향합(香盒)과 초를 갖추어 놓아라. 

먼저 술과 담배와 고기와 생선과 파와 마늘과 고추와 생강 등 모든 냄새가 독하고 자극성 있는 음식을 끊고 성신일관(誠信一貫)하려는 마음의 맹세를 한 후에 날마다 새벽에 촛불을 켜고 자단향을 피운 뒤에〈각사〉{신령재상(神靈在上) 천시천청(天視天聽) 생아활아(生我活我) 만만세강충(萬萬世降衷)}를 세 번 외우고 한배검께 정성껏 마음속으로 원도치성(願禱致誠)한 다음에 무릎을 가로 꿇어 앉되 왼발이 오른쪽 종아리 위에 놓이도록 두 다리를 마주 걸치게 하고 두 손은 두 다리가 걸쳐진 종아리 위에 얹되 왼손의 엄지손가락이 오른손바닥에 들도록 싸서 마주잡아 가볍게 얹고 허리를 펴서 머리로부터 등과 허리에 굽음이 없도록 곧게 하여 앉아라. 

정좌하는 시간은 처음에는 15분, 3일이 지나면 30분으로, 15일부터는 1시간으로 하고 공부가 차츰 숙달(熟達)이 되면 더 늘이되 두 시간을 넘게 하지 말고 정좌하는 횟수는 처음에는 아침과 저녁의 두 번으로 시작하되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6회를 넘지 않도록 할지니 과도하면 오래 계속할 수도 없거니와 욕심이 지나치면 도리어 성공을 늦추는 결과를 초래하니 첫째로 욕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간 마음을 가질 것이 중요하다. 

방의 사방 벽에는 일·선·광·성(一·善·光·成)의 넉자를 각각 정하게 써서 방위를 맞추어 바르게 붙이고 앉은 자리 밑에는 백마화진(百魔化盡) 넉자를 써서 깔고 앉으며 남쪽 벽 곧 앉은 뒷벽에는 진리도(眞理圖)를 걸고 북쪽 벽 위에는 천진(天眞) 곧 한배검의 영진(影眞)을 봉안하되 천진을 얻지 못할 때에는 신위(神位: 三神一體上帝大皇祖神位)를 봉안하고 오직 한배검께서 나려와 계시다는 마음으로 삼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고개 숙여 정성을 다하되 매일 묘시(卯時:오전 6시경)와 오시(午時:오후 12시경)와 유시(酉時:오후 6시경)에 세 번씩 매일 향불을 피우고 네 번 절하여 참알례(參謁禮)를 올리라. 

음식은 반드시 하루 두 번씩 때맞추어 채소담식(菜蔬淡食)을 주로 하고 수면(睡眠)은 차츰 그 시간을 줄여 가서 불면의 지경에 도달하게 하되 7일 이내에는 참고 견디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나 7일이 지나면 절로 잠을 자지 아니하는 묘법이 있을 것이며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등불을 끄지 말아라. 




제2절 수령(修靈) 

수령이라 함은 성품을 닦음이니 느낌을 그침에 있어 가장 요긴한 핵심이 되니 무사무려(無思無慮)를 원칙으로 하되 눈을 감아 보지 말고(閉目不視) 귀는 들여 듣지 말고(收耳不聽) 모든 사특한 생각을 끊어 없애고 모든 사물을 잊도록 하여 인정(人情)과 물욕(物慾)에 관련되는 기쁘고 두렵고 슬프고 성내고 욕심 내고 싫어하는 등의 감정(喜懼哀怒貪厭)을 마음에 두지 말고 온 정신을 현궁(玄宮:두 눈 사이)에 기울여서 마음속으로 보면 심지(心地)가 점점 맑아지고 욕심불[慾火]이 차츰 줄고 마침내는 사라져 없어지게 되는데 이때에 육체적으로는 경련증(痙攣症)과 근골통(筋骨痛)과 갈증(渴症)과 담증(痰症) 등의 증세가 일어나니 정신적으로는 사념(邪念)과 가슴이 답답함과 오한(惡寒)과 번열(煩熱)과 지나간 일의 생각과 허영에 뜬 생각들이 겹치어 일어나니 이를 신마(身魔)와 의마(意魔)라고 하는데 마음을 가다듬어 굳게 참고 억제하여 이 고비를 극복하면 순간찰나에 모든 마귀가 소멸되고 심경(心境)이 명랑(明朗)하여 7일 또는 14일, 21일이 지나면 영대(靈臺), 곧 마음의 먼지가 차츰 사라지는 신비함을 얻게 되어 한 점의 티끌도 남지 아니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지경에 다다르면 자연히 심령(心靈)이 열리어져서 무계(無界)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영(靈)이라고 하는 실체는 무엇을 가리킴인가? 곧 신의 작용을 말함이니 맑고 밝아서 유리와 같으며 안과 밖이 없이 투명(透明)하여 신속(迅速)함이 전광(電光)과 같아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왕래하는 고동이라 신이 부여(賦與)된 물체에는 모두 구비하였으나 기운품수[氣品]의 맑고 흐림[淸濁]과 몸바탕[體質]의 두텁고 얇음[厚薄]에 따라서 본래의 우열(優劣)이 있으므로 수양을 잘하면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여 밝고 두텁게 되며 인정과 물욕이 가리면 흐리고 얇아져서 본래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니 모든 학문(學問)의 근본이 이 영성(靈性)을 닦고 닦지 아니함에 비롯함이다. 




제3절 현상(顯相) 

심령(心靈)이 열리면 모든 물체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혹은 검고 혹은 붉으며 혹은 희고 혹은 누른 광선도 보이고 혹은 밝고 혹은 어두우며 혹은 산이 되고 혹은 물이 되어 세계가 잠깐 나타났다가 잠깐 없어지며 천태만상의 이상한 형상이 내왕하면서 마음의 눈[心眼]을 현혹(眩惑)하게 한다. 이 지경을 허령(虛靈)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모든 형상이 나타남을 기이(奇異)하게 생각하여 만약에 심신(心神)이 이에 집착(執着)이 되면 느낌을 그치는[止感] 대도(大道)에는 이르지 못하고 혹은 맞고 혹은 맞지 못하여 잘 해야 소성(小成)을 맛볼 뿐이다. 

이와 같이 형상의 나타남[顯相]을 예사로이 보고 성품을 통함[性通]을 목적으로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쉬지 말고 공부를 이어 가면 모든 형상이 사라지며 정신은 굳게 다져지고 심령(心靈)이 명랑하여 비치지 아니하는 물건이 없는 지경에 도달한다. 

지난 옛날로 거슬러 살펴보면 옛 사람들이 조그마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원하되 어떤 이는 차력술(借力術)을 어떤 이는 의술(醫術)을 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아는 점술(占術)을 혹은 변화(變化)의 술법(術法) 등을 찾아 공부를 수행(修行)하여 혹은 구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한 이도 있고 혹은 악덕비행(惡德非行)의 탈선으로 한얼의 주벌(誅罰)을 받은 이도 있고 또는 성력(誠力)의 부족으로 중도에서 폐한 사람도 많았으니 모름지기 앞으로 이에 뜻을 둔 사람들은 근신(謹愼)과 지성(至誠)과 인내(忍耐)로서 확고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닦아 나갈지니라. 

이 때에 더욱 삼가고 주의할 것은 사물(事物)의 마장(魔障)이 이르기 쉬운 것이니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의 근기(根基)의 경중(輕重)과 강약(强弱)을 시험하여 참된 공부의 길을 닦아 나갈 문을 열어줌이니라. 때로는 부모와 처자식이 죽었다는 기별이 이르기도 하고 천선현녀(天仙玄女)나 묘령(妙齡)의 색마(色魔)가 이르거나 사갈호표(蛇蝎虎豹)와 이매망량(魑魅魍魎) 등의 사나운 짐승과 도깨비가 덮치거나 사귀흉도(邪鬼凶盜)가 죽이려고 덤벼드는 등 헛것이 나타나 장난질함에 동요(動搖)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신념이 풀어지고 심신에 동요가 생기면 지난날에 쌓은 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며 동요된 후에 다시 마음을 잡고 계속하여 한다면 도리어 재앙의 벌을 받게 되나니 매우 조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마물(魔物)이 나타나 시험하더라도 반석(盤石)과 같이 굳고 정대(正大)한 신념과 지성으로서 개의치 말고 냉정(冷靜)하고 엄숙한 태도를 굳게 가지고 쉬지 말고 한결같은 정성으로 닦아 나아가면 모든 만물은 순식간의 찰나에 가라앉고 공부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되리라. 




제4절 통지(通知) 

통지라 함은 알린다는 말이니 형상이 나타나는 현상(顯相)의 과정을 지나 더욱 공부하여 오래 수행하여 깊어 가면 통지(通知=頓悟)의 길이 열리어 비로소 신비가 나타남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물을 상세하게 통지하게 된다. 

수행의 경험과 통지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허황(虛荒)한 말이라고 꾸짖고 미신(迷信)으로 돌려서 코웃음도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혹시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도 헤아리면서 이 글을 쓰는 바이나 수행에 뜻을 둔 이상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태도는 절대로 금물(禁物)이니 무엇보다도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하고 만약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은 절대로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수도(修道)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신을 개발함이요,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물 속이 깊고 얕음은 강가에 앉아서 깊으니 얕으니 단언하기보다 배를 타고 강심(江心)에 들어가서 실제로 측량해 보는 것이 확실할 것이오, 동산(東山)에 오를 때는 눈앞에는 노나라(魯國)만 보이므로 한 나라의 영토가 협소(狹小)함을 깨닫게 되고 태산(泰山)에 오를 때는 시야가 넓어져서 천하도 오히려 작음을 알게 됨은 옛날 성현(聖賢)도 실제 경험에서 확실하게 말한 바 있는데 오직 과학(科學)만을 연구한 사람은 철학(哲學)을 눈에 보이지 않으니 허무한 것이라고 멸시(蔑視)하며 그와는 반대로 철학만을 연구한 사람은 천박하다고 오히려 과학을 무시(無視)하는 것을 흔히 보는 바, 이는 모두가 한쪽만을 아는 아집(我執)에서 오는 일인데 철학이나 과학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학문의 근본이 되는 신학(神學)은 공부할 생각조차 아니하고 부질없이 부인(否認)부터 앞세운다고 하면 이는 열대지방(熱帶地方)에 사는 사람이 한대지방(寒帶地方)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한대지방에 사는 사람이 열대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가 의아해하면서 한대와 열대의 근본적 차이가 태양(太陽)과 멀고 가까움에 있음을 부인함과 같은 행동이라. 만약에 의문되는 바가 있다고 하면 한 달의 세월을 허송할 각오로 한 차례 실제를 시험한다면 참된 종학(倧學=天神學)의 첫 단계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만일 처음부터 반신반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나 이 세상에 살아오는 동안에 착한 일은 적고 악한 일을 많이 지은 사람은 비록 10년의 세월을 보낸다고 할지라도 성공은 고사하고 진경(眞境)의 첫 단계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오, 심하면 재앙의 신벌을 받게 될 것이다.

유학(儒學)에서 몸을 닦아 성품을 거느림[修身率性]으로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확실히 함[格物致知]에 이름도 정성 여하에 달렸고, 불법(佛法)에서 마음을 밝혀 성품을 봄[明心見性]으로서 차츰 닦고 문득 깨달음[漸修頓悟]에 이름도 정성 여하에 달렸고, 선도(仙道)에서 기운을 길러 성품을 단련함[養氣煉性]으로서 신선으로 바뀌어 하늘에 오름[羽化飛昇]도 정성 여하에 있으며, 종문(倧門)에서 성품을 트고 공적을 마침[性通功完]으로서 영원토록 쾌락을 누림[永得快樂]도 정성 여하에 달렸으니 오직 정성은 온갖 이치를 트는 원동력(原動力)이 되고 믿음은 온갖 일을 행하는 유일(唯一)한 법칙이 되나니, 이 정성[誠]과 믿음[信]을 한결같이 쌓아 나가면 마침내는 심령(心靈)을 통하여 앎을 얻는 지경에 이르게 되리라. 




제5절 망아(忘我) 

나[我]는 육체의 나[肉體我]와 정신의 나[精神我]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의 나에 의하여 육체의 내가 있게 됨을 알지 못하고 육체의 내가 있음으로 해서 정신의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릇되게 인식하는 이가 많은데 이것은 우리 종도(倧道)가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하였으므로 삼일(三一)의 진리(眞理)를 알지 못하고 삼일(三一)진리를 모르는 까닭으로 신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오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도 모든 학문은 실제(實際)보다 이론(理論)이 많고 이론이 많음에 따라서 이상(理想)에 편중(偏重)하여서 후인(後人)들이 선각자(先覺者)의 체험에 의한 참된 학문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많으므로 고루(固陋)하게 제 나름대로의 일방적 학설(學說)을 내세우게 됨에 따라 공리공론(空理空論)적인 허설(虛說)에 귀착(歸着)되는 폐단이 많고 그에 따라서 보편성(普遍性)의 결함을 수반하게 되므로 모든 학설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나쁜 배척관념이 생기고 뿌리 박혀 공격(攻擊)과 말살(抹殺)의 나쁜 버릇에 의하여 학파(學派)의 성쇠(盛衰)가 순환(循環)하게 됨은 유감스러운 일로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만물의 있고 없음을 주재(主宰)함을 신(神)이요, 신의 이치를 발현(發現)하고 신의 공업(功業)을 대신 실행함은 사람이다. 


신의 실체(實體)는 변함이 없는 참된 허무(虛無)이되 덕·혜·력(德·慧·力)의 삼대만은 온전히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실체는 변천(變遷)이 계속하는 존재로서 감·식·촉(感·息·觸)으로 달리어 떨어지고 만다. 

허무를 가리켜서 어찌 존재함으로 인증하느냐 하면 있던 것이 없음에로 돌아감을 똑바로 살펴보면 있던 전신(前身)이 없음이오, 없던 전신이 있음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없었다고 있던 것을 부인한다고 하면 지나간 옛날의 것은 모두가 빈 세계일 뿐이요, 있었다고 해서 없었던 것을 부인한다면 현재만이 변함없이 존속(存續)할 것이다. 빈 데[虛]서 실제[實]가 나타나고 없음[無]에서 있음[有]이 발생하나니 실(實)과 유(有)의 모체(母體)는 허무(虛無)임이 확실하게 판명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을 허가 내포(內包)하고 유를 무가 생산함이 증명하고 있다. 

만물을 실제하게 하며 있게 하는 것과 또 비게 하고 없게 하는 것은 곧 신의 덕·혜·력으로 조화(造化)함이라. 이에서 망아(忘我)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나를 잊어버리고 정신의 나를 단결(團結)함이니 잊는다는 것[忘]은 성품[性]의 분얼작용(分蘖作用)인 곧 마음[心]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육체의 유무관념(有無觀念)이 없는 지경에 도달하여 허울[形]이 정신[神]에 의존하였는지 정신이 허울에 의존하였는가를 초월하여 허울은 허울대로[形自形] 정신은 정신대[神自神]로 분리(分離)함을 가리켜 말함인데 정신이 허울에서 오래 떠나면 죽음[死]이 되나 호흡작용(呼吸作用)이 기혈(氣血)의 순환(循環)에 따라 존속할 때까지 허울과 정신의 합작공부[形神合作工夫]를 하면 죽음에까지 이르지 아니하고 육체의 나도 삶을 회복하게 된다. 

종(倧)이라 함은 한얼사람 곧 신인(神人)이란 뜻 이외에 능히 신도 되고 사람도 됨을 가리킴인데 허울을 떠난 신은 신이고 사람이 아니며 허울을 합한 신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다. 바꾸어 말하면 종이라 함은 신과 사람을 아울러 일컫는 명사(名詞)요 종도(倧道)라 함은 능히 신도 되고 사람도 되는 이치와 방법을 가리켜 말함이다. 불교(佛敎)에서 성불(成佛)한다고 하는 것은 곧 육체의 삶을 존속하려면 모든 고뇌(苦惱)가 따라 있게 되므로 허울과 정신의 분리작용[形神分離作用]을 영구히 하여 허울을 버리는 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까닭에 사람 아닌 사람[弗人]을 이룬다는 뜻이다. 



제6절 원각(圓覺) 

나를 잊는 현묘한 지경[忘我妙境]에 이르면 허울은 일단(一團)의 원(圓)으로 남게 되어 체내(體內)에는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진공(眞空)만을 이루게 되고, 정신은 일단의 원으로 결정(結晶)되어 밝은 거울과 같이 환하게 비치고 그친 물과 같고 고요히 맑아[明鏡止水] 고정(固定)함을 이루어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견문지행(見聞知行)의 고동[神機]을 발동하여 분합변환(分合變幻)의 조화(造化)를 행하나니 세상의 속된 사람들의 육안(肉眼)으로는 이를 불가사의(不可思議)라 일컫고, 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성단(成丹)이라 하고, 유학에서는 명덕(明德)이라 일컬어 각각 붙인 이름이 있는데 네모도 없고 세뿔도 없는[無方無角] 원(圓)을 깨달음은, 방법은 비록 달라도 다같은 성공(成功)에로 귀일(歸一)하는 한 이치[一理]요 진리(眞理)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의 고동[神機]이 크게 발동하면 보고 듣고 알고 행함을 마음대로 하여 위나 아래나 멀거나 가깝거나 겉이나 속을 막론하고 모든 소리와 행동을 빠짐없이 살펴보고 나뉘고 합하고 변함을 때에 따라 하여 비와 바람과 구름과 우레를 때없이 부리게 되나 사람의 품격(品格)의 수박(粹粕)과 업적(業蹟)의 선악(善惡)에 따라서 문득 깨달아 대각이 되고[頓悟大覺] 차츰 닦아서 작게 깨닫는[漸修小悟] 것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唯一無二] 정성과 믿음으로 수도(修道)한다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르지 못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정기를 보정(保精)함으로써 목숨을 알고[知命], 목숨을 앎으로써 성품을 트게[通性]되나니 삼법(三法)이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원리(原理)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상품(上品)인 사람은 학문으로 들어가서 착함을 돌이키는(返眞) 전능(全能)을 이루나 뭇사람은 금촉문(禁觸門)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정기를 보전하지 못하고 또 조식문(調息門)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목숨을 알지 못하고 지감문(止感門)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성품을 트지 못하므로 이 세문을 차례로 거쳐서야 비로소 완전한 공효(功效)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지감문에서는 없게는 할지언정 있게 하기는 불가능하고, 조식문에서는 있게는 할지언정 없게 할 수는 없고 금촉문에서는 변하게는 할지언정 화(化)하게는 하지 못하나니 불가분의 원리에 순종하여 삼법을 아울러 수행하면 변화(變化)의 만전(萬全)을 이루게 되리라.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