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금촉법(禁觸法)
제1절 금정욕(禁情慾)
정(情)은 마음에서 갈려짐이고, 욕심(慾)은 정에서 갈림이다. 아무리 성철(聖哲)이라도 정욕(情慾)이 없을 수 없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품[性心]이 없을 수 없음은 마치 본말(本末)과 모자(母子)와의 관계와 같다. 바꾸어 말하면 근본이 없는 끝이 없으며 어미가 없는 자식이 없는 것이니 근본은 하나이나 그 끝은 천 갈래 만 갈래에 이르고 어미는 하나이나 열 곱이나 되는 아들딸을 낳음과 같이 성품은 참된 한 원[일원(一圓)]이오, 마음은 선악의 두 갈래요, 정은 공과 사곡과 사특[公·私·邪]의 세뿔[三角]이오, 욕심은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과 음탕함과 닿음[聲色臭味淫抵]의 여섯 길의 무수한 각도로 퍼져 나감을 감추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도 사사로운 마음을 억제하고 예의를 다시 세우는 조목으로서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곧 귀와 눈과 입과 몸의 접촉에 있어 예가 아니고 바르지 아니함을 상대하지 말도록 규정하여 놓았다.
금(禁)함은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공능(功能)을 완전히 폐함이 아니라 음탕한 소리와 사특한 빛을 귀와 눈에 접하지 말고 나쁜 냄새와 후한 맛을 입과 코에 들이지 말고 간음과 일함에 있어 난잡하게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약(藥)을 쓰지 아니하고 스스로 몸의 건강을 얻는 근본방법(根本方法)이며 생명을 위하여 기혈(氣血)을 기르고 정수(精髓)를 보전(保全)하여 하늘이 부여(賦與)한 명한(命限)을 온전하게 하는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여섯 가지 욕심에 끌리어서 호화롭게 사치를 다함으로서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욕심을 채우고, 맛좋은 음식으로 위장을 쇠약하게 하고, 음란한 행위로서 기혈(氣血)을 쇠약하게 하니 이것은 살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재촉하기 위해 사는 것이니 어찌 가련하지 아니한가.
삶을 사랑하는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 저승의 극락(極樂)과 천당(天堂)을 동경(憧憬)해 바라지 말고 현세(現世)의 몸을 편안하게 하고 입명(立命) 곧 하늘이 명하여 부여한 본 성품을 온전히 하여 이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수진(修眞)의 비법(秘法)을 정성껏 수행할 것이다.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차례로 나감이 이치에 당연한 길이니 한배검께서 마련하신 윤리(倫理)를 밝히고 제천보본(祭天報本)하신 교화(敎化)를 지키어 착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재앙을 내리는 하늘의 법칙을 잘 지킴으로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생활을 해 나가려면 먼저 정욕의 불길[情慾火]을 끄기에 힘쓸지어다.
집에 붙은 불은 끄기에 힘쓰면서 마음에 붙은 정욕의 불길은 그대로 내버려 둘 뿐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이를 더해 나가니 참으로 우매(愚昧)함을 탄식하며 가엾음을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가장 맹렬하고 무서운 욕심불은 재물을 탐내는 것[財利火]과 명예를 탐내는 것[名利火]과 주색을 탐내는 것[酒色火]과 분노하는 것[忿怒火]의 네 가지가 시간을 다투어 마음을 불태우며 목숨을 재촉하니 깊이 반성하고 깨달아 사대욕화(四大慾火)를 끄고 막기에 힘을 다할 것이다.
제2절 독신고(讀神誥)
정욕(情慾)을 금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몸이 건강해지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방을 가리어 지감하는 방법과 같이 자리잡아 앉되 북쪽 벽에는 천진(天眞)을 모신 뒤 남쪽 벽에는 창호지 한 장 크기의 진리도(眞理圖)를 써 붙이고 향불을 피우고 촛불을 밝힌 다음 정성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서원(誓願)하되 모든 사념(邪念)을 끊어 없애고 서사를 읽고〈각사〉를 염송한 후에 목소리를 가다듬어《삼일신고(三一神誥)》를 낭송(朗誦)하되 하루의 공부하는 과정은 자신의 역량과 능력에 따라서 미리 정하되 총횟수(總回數)를 3만독(三萬讀)이나 5만독(五萬讀)이나 백만독(百萬讀)이나 자기의 뜻에 따라 먼저 정하고 일정(日程)은 쉬임없이 한결같이 계속하여 실천하라.
먼저 몸에는 3백 66알의 대단주(大檀珠)를 걸고 손에는 36알의 소단주(小檀珠)를 쥐고 한 말씀에 한 알을 헤아리며 복동하되 어김이 없도록 하라. 적어도 한번 공부하는 독고수(讀誥數)는 3만회를 내리지 않음이 좋고 오직 경건(敬虔)한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다하여 소원하는 목표를 다하도록 주의하라. 지성(至誠)이면 하늘이 감응(感應)한다고 함은 수도하는 사람의 격언(格言)이니 성공(成功)에 이르지 못함은 오직 신념이 빈약함과 정성이 미치지 못한 것임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이에 서사(誓辭)와 각사(覺辭)와 신고(神誥)의 원문(原文)과 진리도(眞理圖)를 적어 둔다.*
제3절 성변화(成變化)
변화(變化)라 함은 물체(物體)와 사태(事態)의 변천상태(變遷狀態)로 알 것이나 여기에서 말하는 변화라 함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神秘)로운 변화이니 참[眞]을 닦는 사람은 먼저 이 점에 마음 두어 이해하고 공부할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에 지성감천(至誠感天)이라고 하는 것은 성력(誠力)을 다하면 하늘의 현묘(玄妙)한 이치가 감응(感應)하여 때아닌 물질도 얻고 뜻밖의 사업도 성취하고 피하지 못할 재액(災厄)도 모면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세(事勢)에도 봉착하게 되니, 예를 들면 부모의 병환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정성에서 맹종(孟宗)은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얻고, 왕상(王祥)은 얼음 속에 잉어를 얻었고, 솔거(率居)는 한배검(天神)께 원도(願禱)하여 비법(秘法)을 받아 절세(絶世)의 명화가(名畵家)가 되었으며, 흘나사한(訖那沙翰)이 출유(出遊)할 때에 삼척동자(三尺童子)가 아비의 명을 실행하고자 엿새 동안 전력한 결과로 폭우(暴雨)가 몰아쳐서 바위를 운전함이나 천지신령께 기도하여 자손을 낳고 병을 고쳤다는 등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이 예로부터 수없이 현실에 나타났음을 옛 문헌이나 전해 오는 고담에서 익히 보고 들어온 바이다.
역경(逆境)에서도 선(善)을 행하면 순경(順境)으로 변화하고, 편안한 곳에서도 악(惡)을 행하면 위험한 데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이와 같이 변화하는 근본(根本)은 진선(眞善)이고. 그 작용(作用)은 성신(誠信)인 바 평소에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행동을 쌓으면서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다하면 그 어떤 일을 기원하여 이루지 못할 이치가 있으랴.
부딪힘을 금하는 수행을 정성을 다하여 쉬지 말고 어김없이 실행하므로써 하늘로부터 받은 바 양심(良心)을 지키고 귀와 눈과 입과 코와 정혈(精血)의 남용을 막고 스스로 몸에 지닌 정신과 기운을 건강하게 한 후에 일심(一心)으로《삼일신고》를 정성껏 읽음으로써 큰 고동을 발동할 것을 목적하면 혹은 그 성력(誠力)에 따라서 혹은《신고》를 읽은 횟수에 따라서 차차 좋고 맑은 조짐을 징험하게 된다.
징험(徵驗)과 성공(成功)의 순서와 공효(功效)를 들어 보면 재앙(災殃)과 액운(厄運)이 차츰 사라져 없어지고, 질병(疾病)이 침입하지 못하고, 병장기(兵仗器)를 피하게 되고, 금수(禽獸)를 순복(馴伏)케 하고, 사람과 귀신이 공경하고 두려워 하며, 선관(仙官)과 신장(神將)들이 지도하고 환골탈태(換骨脫胎)하여 도수를 모아서[會度] 한 몸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과학자(科學者)는 의심도 하고 불신(不信)도 하고 부인(否認)도 할 것이나 다시 한번 인식과 사고(思考)를 바꾸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질은 형체(形體)가 있음으로 자연적인 변화도 있고 인위적(人爲的)인 변화도 있음을 눈으로 볼 수 있으나 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이 허령(虛靈)한 것임으로 고요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움직이면 나타나는 작용(作用)의 변화가 지극히 큰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자각(自覺)으로서 인식(認識)하게 되는 것이다. 빈 것 곧 허(虛)는 본래 부피[量]가 없고, 영(靈)은 일정한 한정(限定)이 없음으로 형체가 있는 물체는 변화의 도수가 더디고 형체가 없는 물체의 변화는 그 도수가 빠르다는 것은 현대의 과학상에서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어찌하여 물질은 변화가 있으되 정신과 마음은 변화가 없음을 누가 보증하며 그 누가 단정할 것이랴. 이것은 어리석고 몽매(蒙昧)한 사람의 추상(推想)이며 억설(抑說)인 것이다.
큰 고동[大神機 곧 見聞知行]의 발현과정(發現課程)은 수진(修眞) 공부를 하는 사람의 체험하는 현비(玄秘)에 맡기고 이에서 자세하게 설명함은 피하나 물방울이 떨어져서 바위를 뚫으며 성심(誠心)을 모아 금석(金石)을 꿰뚫어 봄과 같으니 빨리 성공하고자 탐내고 재촉함은 절대로 금할 일이다. 열매가 다 익으면 손을 대지 아니 하더라도 절로 나무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니 서둘지 말고 쉬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닦아 나갈 것이다.
정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과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 곧 호기심(好奇心)에서 시작하는 사람 그리고 죄과(罪過)가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수행을 시작하지 말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비록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기(神機)가 발동되지 아니함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재앙과 책벌(責罰)을 입어 수명(壽命)이 줄어지거나 질병을 얻는 등 해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설혹 눈앞에 화해(禍害)는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에 발전이 없고 더구나 성공이란 절대로 기약할 수 없으니 앞에 말한 바, 정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과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 곧 호기심에 끌린 사람과 죄과가 많은 사람은 시간과 심력을 허비하지 말고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 것을 다시금 주의시켜 두는 바이다.
맺는말
이상에서 해설한 것으로 우선 수진삼법(修眞三法)의 서술(敍述)을 마치는 바, 그 어느 것이나를 막론하고 평소에 겪은 바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선사(先師)의 가르치심과 각 종문의 설법에 벗어남이 없이 수행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현비(玄秘)를 찾도록 하였다.
사람마다 제각기 가진 정신이 곧 천신(天神)의 한 분자(分子)임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주재(主宰)가 육체인 것으로 그릇 알고 육체는 두텁게 양생(養生)코자 힘쓰나 정신은 이를 정양코자 하는 사람이 적고 또 자기의 정신은 중하게 여기면서 만물을 주재하시는 천신은 소홀히 하는 사람이 많음은 실로 탄식할 노릇이다.
사람이 삼재(三才)에 참여함도 이 신심(神心)이오, 만물을 지배하는 것도 이 신심이오, 만사를 조성(造成)함도 이 신심이오, 자유자재로 변화함도 이 신심이오, 하나에서 비롯하고 하나에서 마침과 셋에 나아가고 셋을 모음도 모두 이 신심 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신심의 작용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성[誠]과 믿음[信]과 부지런함[勤]의 여하에 달려 있으니 믿음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는 힘으로 심령(心靈)의 신비(神秘)함을 통하여 영원토록 쾌락(快樂)을 누리는 만덕문(萬德門)으로 오르기를 거듭거듭 바라며 추호라도 거짓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경자(庚子:개천 4417[1960]년) 단오날에 지은이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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