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cension/Ascension Healing Resources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by 맥도널드 배인 (4)

namaste123 2009. 4. 3. 09:22


"Beyond the Himalayas"

by Murdo MacDonald-Bayne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제 3장)



계속의 푸른 들을 내려다보니 몇 마리의 야크가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새벽녘 안개 속에서 풀을 뜯는 것은 이슬이 맺혀있을 때가 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지만 그런 풍경은 친숙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고지(高地)에서 이른 아침에 소들이 풀을 뜯는 것을 늘 보며 자랐고, 때로는 야생 사슴이 내려와서 새벽의 푸른 목장에서 목초를 뜯어먹고 있는 것을 보는 일도 있었다. 어렸을 때의 나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맨먼저 하는 것이 산사슴이 내려와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 티벳의 풍경은 내게는 고향의 그것과 흡사했던 것이다. 더구나 야크는 목과 어깨 사이에 혹이 불룩 나와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스코틀랜드의 하애랜드 소와 많이 닮았다.


“저 야크는 어디서 왔을까요? 엊저녁에 저기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하고 물었다.
“강변을 보게나. 짐짝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보이지. 저것은 티벳 양모(羊毛)를 인도로 운반하는 4백마리도 넘는 야크 수송대의 화물이라네. 이런 광경은 흔히 벌어지지. 아침 먹이를 다 먹으면 소몰이들이 야크를 모아서 저 짐을 지워 고개를 넘어간다네. 어디 저기로 내려가서 소몰이꾼들 속에 끼어볼까. 그것도 자네에게는 하나의 체험이 되겠지.” 하고 린포체대사가 말씀하셨다.

우리는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과연 거기엔 티벳 양모 곤포가 눈어림으로 8백개나 쌓여 있었다. 야크 한 마리가 짐 안장 양쪽에 곤포 한개씩 두 짝을 나른다. 티벳 양모는 질이 좋아서 인도에서는 수요가 아주 많은 것이다.

대사는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야크라는 짐승은 참으로 재미있다네. 야크는 티벳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준단 말이야. 털을 짜서 유목민이 사는 큰 천막집이 되고 가죽은 길고 짧은 신발이 되며 고기는 식량이 되고, 쓰고 남을만큼 많이 나오는 젖과 버터는 식량뿐이 아니라 밤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특히 승원에서 많이 쓰인다네. 똥은 모아져서 땔감이 되어 취사와 난방에 쓰이지. 살아서는 밭을 갈아주고 또 티벳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을 등으로 날라준다네. 그러나 여기서는 야크는 무엇보다도 쓸모있고 값어치 있는 동물이라서 들에 한도 없는 야크가 돌아다니고 있는거야.”

티벳에는 여태까지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은 골짜기도 있고 사람이 살기는 하지만 외부의 사람들은 전혀 그것을 모르고, 또 사는 사람들 자신도 외부의 일은 전혀 모르는 골짜기도 몇 개 있다. 그들은 거대한 산맥에 갇힌 자기들만의 세계에 살면서 산너머의 일을 알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으며 그런 생각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내가 전에 담런 고장을 찾았을 때 본교-불교가 전해지기 전의 티벳의 원시종교, 정령(精靈)을 섬김-가 그대로 행해지고 있고, 때로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승원마저 있었다네. 라마승들이 겨우 그 악마숭배와 미신을 티벳에서 거의 없애주었지. 실은 라마승들 자신도 대부분 맹신과 독단과 미신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점 하나만은 나라에 공험다운 공험을 한 셈이지.”

“그런가요. 승원이나 라마승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군요. 외부 세계에서는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곳의 종교에 관한 여러 가지 이상한 이야기들이 퍼져 있답니다.”


“그렇지. 독선적 교리나 미신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무지와 가난이 만연되는 법이야. 그것이 참된 발전에 커다란 장애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종교상의 미신이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사람들은 가난하다네. 그것은 민중이 기도의 재료가 되고 동시에 먹이가 되기 때문이며, 그들을 무지하게 할수록 미신과 공포를 수단으로 삼아 통치하는 자들에게는 편리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그런 상황도 급속히 끝나가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외딴 나라인 이 티벳에서도 제 머리로 사물을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네. 티벳에서는 승원이 3천개 이상 있다는 것을 자네는 아는가? 그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라사-티벳의 수도-부근에 있는 드레븐 사원인데 9천명도 넘는 라마승을 거느리고 있다네. 이 승원들은 하나의 도시와 같고 완전히 자급자족하고 있지. 다음으로 큰 것이 세아라 승원인데 드레븐에서 과히 멀지 않고 약 8천이 넘는 라마승이 있다네. 라사 앞에 있는 간덴 승원에는 5천의 승려가 있다네. 여기는 티벳의 학문의 중심이고 학문을 하는 승려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수한 자들이 모이지. 나도 그 승원에서 오래 가르쳤다네.”

“그거 재미있군요. 어떤 것을 가르치나요?”
“철학, 신비학, 마술, 점성학, 고전, 형이상학, 의학 등등이야. 티벳의 큰 학자나 신비가들이 거기에는 있는데, 마술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들에게 자네를 만나게 할 작정이네.”
“티벳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은 삼예 승원인데 몇 백년 전에 파드마 산프 하봐라는 신비의 라마승이 건립한 절이라네. 그에 대해서는 그가 그곳에서 가까운 말그로 호수의 정령들을 부려서 막대한 양의 금은보석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거대한 바위를 뚫어 만든 곳간 속에 감추고 그 바위 위에 승원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지. 그렇게 매장된 굉장한 금은보석은 수백년을 묻힌채로 있는 것이야. 그러나 나는 이렇게 보지. 파드마 산프 하봐가 라마승들을 시켜 산을 파헤쳐 금을 캐내고 또 금방의 호수를 뒤져서 보석을 채취하게 했다고 말이야. 왜냐하면 그 지역이 티벳에서 가장 지하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되어있기 때문이야. 또한 주민들에 대해서도 금이나 보석을 발견하면 승원에 바쳐야만 한다는 계율을 만들어 놓고 개인이 멋대로 금을 소유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규정해버린 것이야. 어느 승원도 재산이 많은데 일반 민중은 그럴 수 없이 가난한 까닭을 이것을 알 수 있지. 민중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방적으로 지시받을 뿐이고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스스로의 머리로 사물을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뿐이라네.” “그것은 서양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사람들은 미망(未忘)속에 살면서 진리를 찾고 있지. 그러나 미망의 존재는 그들이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만의 존재이고, 깨달으면 그것은 이미 없어지고 말지. 미망은 결코 진리를 내포할 수 없으며 무지는 결코 이해(理解)를 내포하지 못하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대사는 점점 영감상태(靈感狀態)로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하여 대사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편안히 앉아서 이 예지와 진리에 넘치는 거룩한 스승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마음은 ‘참’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뜨거운 소망으로 타올랐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대사의 말씀이 나 자신을 바꾸어 나가고 있음이 뚜렷이 느껴졌다.
“그들은 미망 곧 가짜를 꿰뚫어보지 못한다. 그 곳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편견, 신앙, 남의 말에 좌우되고 스스로 자기를 한정하고 있다. 그들은 참이 아닌 것을 가려내는 창조적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가짜에 관한 단 하나의 진리는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깨닫고 자신이 미망의 포로가 되기에 이른 과정을 이해할 때까지는 여전히 미망에 사로 잡힌 채로 있을 것이다.”

이제 대사는 그야말로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이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대는 이것을 분명히 터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그대는 진리를 철저히 깨치고자 원하면서도 실지로는 미망을 품고 헤맬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참을 깨칠 수가 없다. 먼저 무엇이든 그대가 그것을 믿게 된 과정을, 왜 자신이 그것을 믿게 되었는가를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다른 믿음이나 관념, 생각, 사상,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맞서게된 애초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의 생각으로 자기한정을 한 채로 여기에 왔다면 그대는 그 자기한정을 거쳐서만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그대 자신의 자기 한정에서 해탈해 있다면 그대는 이렇게 말하는 나의 영향에서도 벗어나서 나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에 대한 나의 생각처럼 일체의 겉모습, 국적, 종파, 신조 따위를 걷어내고 나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같은 질료(質料), 같은 생명으로부터 우리의 창조주와 닮은꼴로 만들어졌으며, 전혀 같은 하나의 신의식(神意識)을 지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 본성에 있어 무한이기 때문에 어떠한 분리도 있을 수 없으며 참으로 있는 것은 오직 신 곧 ‘한얼’뿐이고 그밖에 실재하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고 이것만이 우리의 본질, 참모습(實像)이기 때문이다.”

“아아..” 나는 속으로 탄성을 올렸다. 여기에 사람 모두가 한 겨레요 동기간이며 신인 어버이를 함께 하는 비의(秘義)가 있었던 것이다. 이 한업는 깊은 이치를 스승께서는 이렇게 간결한 말로 나타내 보여주신다. 나는 그저 꿈쩍도 안하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찬란한 이 상태를 깨서는 안된다. 대사의 눈은 감져져 있고 그 얼굴 모습은 천사의 그것 같아 마치 대 천사가 생명의 비의를 아는 자, 곧 대상의 육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듯했다. 아니 ‘그런 듯’이 아니라 그럴 것이었다. 대사는 부드럽고 영롱한 어조로 말씀을 이어가고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저절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가 각기 다른 종교단체나 국가, 이데올로기의 집단을 만들어내 그 속에 들어가서 각자 자기가 속해있는 것만이 진짜라고 믿고 있다. 그 때문에 서로 싸우고 싸움으로 결말이 나지 않으며 서로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 대체 참이, 진리가 있을까?” 나는 ‘없습니다’하고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혀가 굳어있어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떤 깊은 정감이 몸 속에 솟아남을 느꼈다. 그것은 차츰 겉으로 떠올랐다. 뭔가 나로 하여금 한 마디도 소리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 두려움을 품는 것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길잡이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더더욱 대립에 휘말리게 된다. 대립하기 때문에 또 두려워진다. 그리하여 다시 두려움을 비춰 내보일 그 어떤 이상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본 바탕이 깨닫지 못했으니 그것은 다만 자신의 두려움을 뒤덮어 감출 뿐이다. 자신의 두려움 그것의 정체를 꿰뚫어보게만 되면 두려움은 그저 사라져버리고 대립이나 모순은 꺼져 없어지는 것이다. 그대의 이상이나 공포는 그대가 그대의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것일뿐이야.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것은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이든 온갖 두려움이든 어느 것이나 참의 나타남은 아닌 것이다.


진리는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한결같이 이미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것은 ‘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온갖 관념, 사상, 생각과 사물에 대한 자기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미망을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만약 대립이 있다면, 두려움이 있다면 갈망과 편견과 모순이 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조화(調和)도 있을 수가 없다. 마음이 대립되어 있어 탓하고 저항하고 비난하고 있는 한 서로의 이해도 조화도 있을 수가 없다.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탓하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망을 분명히 알아버리면 지금 말한 것도 알게 되고 그때는 자신이 미망의 일부가 되는 일은 없다. 그때 진리가 개현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재이며 영원이며 한결같으면 순간에서 순간으로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바뀌는 것은 사람의 마음 뿐이다. 신앙이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면 마음이 마음 자신을 해방한다. 그 해방, 그 자유 속에야말로 참이 있는 것이다.  비난하는 것으로, 탓하는 것으로, 피하는 것으로, 맹종.맹신하는 것으로, 맞서는 것으로 마음은 둔화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일체의 자기 한정에서 해탈한 데에만 자유는 있으며, 이 자유 속에만 평안이 있고, 평안 속에만 사랑이 있다.  만약 자기가 좋고 싫고에 파묻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자기 자신의 자기한정을 나타내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바로 그대로이다. 나는 잠시 절실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분명히 ‘남’은 나의 ‘거울이고 그 거울 속에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비춰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티벳을 여행하면서 이른바 유쾌한 것도, 불쾌한 것도 조금씩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불쾌한 것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면 그대는 그것에 맞서고 있는 것이며 이미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사실을 보아도 반발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이 사랑의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그렇다면 나의 아들이여, 그대가 여기에 올 턱이 없다  ‘말’은 곧 만트라를 외워대는 사람도 있으나 그런 것으로 마음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있던 것마저 사라지게 하고 만다. 가슴은 마음이 멋대로 이리저리 가짜를 만들어 내지 않을 때에만 채워질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서로 엇갈리는 온갖 생각, 관념, 사상 또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게될 때 비로소 가슴은 사랑으로 생생히 살아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상대방의 손을 쥐었을 때의 그 따스함, 그 흡족함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안다.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저항을 모르며 또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영원한 사랑에 채워져 있고 신은 사랑이며 신만이 있기 때문이다. 신을 싸 감추고 있는 것은 마음이 멋대로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하다. 나의 아들아, 이제 여태까지의 미망이 그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음이 내게는 보인다. 이사야서 65장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이 말씀을 끝으로 대사는 감았던 눈을 뜨셨다. 그것은 아득히 저멀리를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대사께서 머지 않아 그 육체를 원래의 질료로 되돌려 해소해 버리시리라는 것이 겨우 나에게도 납득이 갔다. 


린포체대사는 진정 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어 그 넋은 일체의 욕망에서 해탈했고 영적인 것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그쳤으며, 스스로가 그대로 생명 그것임을 알고 있고 ‘실재 참’을 이미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대사는 일어나시더니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말없이 자리를 뜨셨다. 그로부터 온종일 나는 홀로 두어졌다. 린포체 대사와 나의 스승이 일부러 나를 떼어놓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힘으로 문제를 풀게하기 위해서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질문을 던지면 그분들은 전혀 상대를 하지 않는 태도로 나오시는 일이 흔히 있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그런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문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 당시에 나에게는 그런 질문의 내용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대사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됐다. 사람들이 많은 질문을 하는데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것은 매우 냉정하고 실례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질문자를 냉대하거나 업신여기기는 커녕, 오히려 그런 때는 깊은 사랑이 나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대답을 해준다면 질문자에게 진리 그것에서는 동떨어진 이미지를 보태어주는 결과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이미 이런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어떤 대답을 해주면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관념을 보탤 뿐이며, 마음이 이미 만들어낸 온갖 허구, 신앙, 편견, 공포 따위에서 마음 자체를 해방하는 일을 방해할 뿐이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실은 사실이다. 사실은 신앙이 아니며 신앙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상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는 있다. 적어도 사실을 발견하는 방법은 일러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신앙은 사실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에 대한 신앙은 결코 사실 그것을 나타내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분명히 깨달았을 때 나은 질문하기를 그쳤던 것이다. (원본이 없어서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내용으로 보면 ‘사실’을 ‘실상’ 혹은 ‘실재’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음.)

나는 여러 시간을 홀로 정좌했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열어젖히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까지의 온갖 상념들을 마치 스크린에 비친 영상처럼 공평하게 관찰할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점점 분명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심판하거나 분별하지도 않고 찬양하거나 탓하지도 않았다. 마치 남의 마음을 관찰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윽고 마음의 심층에서 마음 그것이 부여잡고 있던 온갖 생각들이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여태까지 달라붙고 움켜쥐어 왔던 갖가지 것들이 차례차례로 풀려나왔다. 나의 마음이 형성된 과정과 근원이 이젠 분명해졌다. 그것은 갖가지 유전에 따른 경향, 무수한 인상, 생각, 편견의 결과이고, 그 대부분은 또 나 자신이 나에게 가한 제약과 본디 한계가 없는 ‘하나’라는 진리의 직접파악을 방해하는 미망 속에 갇힌 사람들의 의견, 암시, 해설에서 생긴 것들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덮어놓고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스스로가 제약되어 왔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나는 미망을 미망이라 탓하지 않고 또한 미망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미망 속에서 살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미망이 생겨나는 소이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설령 사방이 미망으로 에워싸이더라도 다시는 그 포로가 되는 않는다는 결의를 굳혔다.

나는 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남의 의견을 샅샅이 검토하고 의문을 제기해서 살펴보아야만 하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바를 순식간에 살펴서 그들이 한낱 모방자에 불과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또 그것만으로 그쳐서도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나 자신의 상념과 감정의 반응도 살피고 따져서 그것이 가는 곳과 그 동기와 이유를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나은 이제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것들의 본질과 양상을 알고 그것들이 비롯되어 나오는 소이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됐다. 그런 것을 분명히 규명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얽매임에서 해탈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은 사실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네’ 하고 가볍게 무시해버리던 스승의 말이 뚜렷이 떠오르면서 일찍이 생각도 못했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 깨달음이란 바로 ‘그런 것은 사실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이제 빛나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이 ‘길’을 나는 홀로 전진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 이외에 누구도 나에게 진리를 계시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혼자서 발견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참’은 나 자신의 것이었을 뿐이다. 남의 것이 아니다. 남이 말하는 진리는 결코 나 자신의 진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의 것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관념이요 신앙일뿐, 나는 여전히 묶인 채로일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를 안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안내하고 이끌며 나의 안에 ‘지금’ 계시는 영원 보편의 ‘한얼’이 이끄는 바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영원 그것이다. 순간순간 내가 실재(實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나간 순간은 이미 한낱 기억으로 되어버렸을 뿐이다. 그것을 붙잡아 보려한들 그것은 이미 마음의 이미지일 뿐이다. 순간순간에 나는 과거로부터도 미래로부터도 자유로와져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다만 마음 속에 있을 뿐 실재가 아니다. ‘지금’ 이것만이 실재인 것이다. 나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그 밖의 어떤 것도 될 수가 없었다. 그 밖의 것들은 모조리 한낱 관념이요 ‘작은 나’가 만들어낸 심상(心想)이었을 뿐이다.

이제까지의 미망이 하나하나 풀려나와 내가 자유로와져 가고 있음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와 더불어 마음을 초월한 어떤 힘을 느꼈다. 나는 이제 온전한 하나이다. 우주의 힘이 모습으로 나타나는 촛점이었던 것이다. 나의 ‘신앙’은 이미 공포의 반대관념이 아니라 그것은 이제 ‘직접 체험에 의한 앎’으로 변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실재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실재가 무엇인지는 아직 말하지 못하지만 실재가 실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실재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나도 또한 실재 그것일 따름이다. ‘나와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주님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항상 나와 더불어 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다. 주님이야말로 조종자이다. 이제 그 힘의 적용을 방해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자각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이 자각을 거쳐서만 실재는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이 깨달음을, 이 ’직접체험에 의한 앎‘을 여태껏 놓쳤을까? 깨달음이란 이처럼 단순한 것을, 여태까지의 나의 미망과 온갖 신조(信條)에의 얽매임이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이제 다름아닌 나 자신의 온갖 상념, 사상, 신조, 편견, 공포 따위는 한 겨레  한 동기들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것을 알았다. 진정 이제 깨달았다. ’자기가 남에게 하는 일은 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일이다’ - 이 말은 거짓도 엉터리도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들이 하는 일은 바로 내게 하는 일이다’고 한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남에게 하는 것은 바로 나를 이 땅위로 보내신 신에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전체 속에 있고 전체는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깨달은 이상 이제 나는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늘과 땅에 있어서의 유일한 힘인 자유와 예지와 사랑을 나는 현실로 나의 안에서 체험한 것이다.

이제 나는 주님의 치유의 힘을 알았다. 그 순간 나도 예수 그이처럼 ‘일어서서 걸어가라’고 할 수 있는 생생한 느낌이 있었다. 사실 그 뒤로 나는 온세계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을 고쳐주었으며, 그 가운데는 얼굴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몇몇 있다. 내게서는 나이가 사라졌고 나의 나이를 아는 사람들은 나의 다시 젊어진 모습에 놀라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놀라운 꿈 이야기 같지만 사실 그것은 이제까지 알려진 어떤 꿈이야기 보다도 엄청난 것이다. 참으로는 어떤 사람이든 모든 인간에게 이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그 힘의 드러남을 방해하는 것은 사람들이 단절(斷絶)이 있다고 믿는 그 그릇된 믿음이다. 사람과 사람이, 인간과 신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는 미망이 그 힘을 뒤덮어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에 있어 ‘하나’이다. 어리석음과 미망 속에 있는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이다.

선(善)과 악(惡)은 그저 상대적인 것이요, 다만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 속에는 어떤 악도 존재할 수 없으며 거룩한 것만이 실재이며 영원이며 보편이다. 악, 지옥, 악마 따위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가 생각의 잘못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악에 사로잡혀 악밖에는 보지 못하게 되어 있는가. ‘마음은 마음이 보는 것을 닮는다’는 말은 참이다.

주 예수의 가르침은, 믿는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지어낸 온갖 형석으로 뒤덮여 가리워져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비의 너울로 감싸 사람들을 혼미 속으로 빠뜨린다.

이제야 알았지만 이 책을 쓰는 일은 때에 맞는 일이었다. 모든 사물에는 때가 있다. 이 이야기도 말할 때가 온 것이다.

라마승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리는 총가 소리가 나를 명상에서 나오게 했다. 벌써 태양은 승원이 서 있는 산 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장엄하고 화려한 광채의 난무, 선홍에서 진한 금적색으로 바뀌면서 빛살은 팔방으로 뻗치고 승원 전체가 마치 거대한 불구덩이 속에 있는 듯 그 찬란한 광채 속에 태연히 쉬고 있었다.

나는 승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더듬어 갔다. 린포체 대사와 나의 스승이 마중을 나와주셨다. 뭔가 내가 생생히 빛나는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스승이 이렇게 말했다. “오오, 자네는 청춘을 되찾았군그래.”
그렇다. 바로 그 말씀 그대로였다. 인류가 몇 천년에 걸쳐 계승해온 온갖 자기한정이라는 덧없는 짐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이제 나는 무애자재인 것이다. 그 느낌은 이미 말로는 할 수 없다. 그런 해탈, 거기서부터 살아가는 힘, 그 법열을 나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고전음악의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은 내게는 다시 없는 안정제였다.

다음날 나는 승원을 돌아보려고 나섰다. 금과 은으로 만들어지고 개중에는 보석들을 박아놓은 것도 있다는 초상화들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영어가 능숙한 첸센이라는 젊은 승려가 나를 안내해주게 되었다. 그는 다지린에 있는 영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라마승이 되려고 티벳으로 돌아왔다는 청녕이었다.

“제가 영어를 할 줄 알아 다행입니다. 덕분에 우리 승원을 안내해드릴 수 있으니 영광이지요.”
“나야말로 당신과 함께 견학을 하루 수 있으니 기쁘군요.”

사실 영어가 능숙한 안내자를 얻을 수 있었음은 고마운 일이었다. 먼저 서열이 높은 라마승들이 차를 들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분들은 나에게도 차를 내어주었다. 그것은 매우 큰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방에는 보통으로는 들어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린포체 대사의 제자라는 말을 듣고 기꺼이 맞이해주었던 것이다.

티벳의 차에 대해서는 말을 들어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그 때까지 나는 실지로 맛본 일은 없었다. 그들이 마시는 차는 중국에서 수입된다. 수입된 차는 붉은 벽돌 같은 모양의 굳은 덩어리이다. 그것을 깨뜨려 끊는 가마솥에 넣고 거기다 썩은 기름냄새가 나는 야크버터와 소금을 넣어 몇 시간씩 끓인 것이 그들이 상용하는 차이다. 그 맛은 내게는 아주까리기름보다 더 역했다. 어릴 때 한 달에 두 번씩 어른들이 아주까리기름을 먹이곤 했었기 때문에 아는 아주 질색이었다.

라마승들은 대개 찻잔을 앞에 놓고 승원의 일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장황하게 나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생각난 듯 차를 한모금씩 마시는 것이다. 그런 시간이 몇 시간씩 계속된다. 그 차를 처음 맛본 것인데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러나 그들엥게는 다시없이 귀한 차를 싫어하는 눈치를 보일 수야 없는 노릇이다. 나는 맛이고 뭐고 느낄 겨를이 없도록 단숨에 차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켜버렸다. 겨우 고역을 면했구나 하고 찻잔을 내려 놓았더니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워주는 것이었다. 찬잔이 비면 얼른 차를 다시 따라주는 것이 예의임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아주 조금씩 홀짝거려 잔에 차가 조금 남아 있게 했다. 그러면 다시 차를 따라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내가 그 뒤 얼마 안가서 그 차에 인이 박히고 말았다. 그것은 자극적인 효과가 있고 추위를 덜어주기도 하는 귀중한 음료였다.

높은 승려들의 거실을 나와 다시 승원의 다른 곳들을 안내받았다. 첸센은 흥미있는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곧 아시게 되겠지만 승원 건물의 입구는 언제나 아침해가 뜨는쪽으로 나있게 되어 있습니다.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뒤는 산을 업어 감싸여지도록 세우게 되어 있는 겁니다. 승원을 향하고 뒤는 산을 업어 감싸여지도록 세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승원을 지을 때는 점성가들로하여금 부지를 잡게하고 주춧돌을 놓는 날을 잡아야 하며, 승원을 지은 뒤에는 언제까지든 매년 그 정초일을 기념하는 의식을 갖습니다. 승원 가운데는 천년이 넘는 것도 있지요. 주춧돌 속에는 부적, 성전(聖典), 굉장한 값어치의 금은제 불상 등을 묻습니다.”


“그런 관례가 사라지는 날에는 언젠가는 누군가가 굉장한 횡재를 할 수도 있겠군요.”하고 내가 말했더니 그는 놀란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영어교육을 받았지만 태어나서부터 굳어온 사고방식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서실을 보게 되었다.
“이 도서실은 가장 유명한 서고의 하나랍니다. 아주 오래되고 희귀한 원고들-직접 손으로 쓴 것이지요-의 소장으로서는 간덴 도서관과 비교할 정도예요. 그런 고문서의 인쇄는 커다란 목판으로 투박한 긴 종이에 찍는데, 그렇게 찍은 목판본을 보관하기 위해 큰 방이 있는 것입니다.”

과연 아주 큰 방에는 그런 대행의 인쇄물이 그득그득 쌓인 선반이 몇 백이나 늘어서 있고 여러 명의 라마승들이 보살피고 있었다. 도서실 안에는 여기저기서 우리들이 돌아보는데도 아랑곳 없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라마승들이 여럿 있었다. 도서실 전체의 넓이는 웬만한 공회당 만큼이나 되었다.

법당 큰방 입구에는 금실로 짠 현란한 비단 띠와 명주스카프가 여러장 걸린, 높이가 12자도 넘을 것 같은 불상들이 여러 개 서 있었다. 그의 말을 따르면 그 상들은 악령의 침범을 막는 수호신이라는 것이다.
“설마 그걸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법당의 내실에는 유리상자 안에 든 금과 은의 불상들이 있고 제단 앞에는 역시 금이나 은으로 만든 등잔들이 즐비했다. 속에는 야크 버터가 그득히 담겨 있고 등잔들은 버터가 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심지가 타고 있는 것이다. 몇백년을 계속 밝혀진 채로인 등잔도 있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티벳의 종교에서는 갖가지 무서운 계속되는 지옥에 대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이었다. 각종의 사람마다 각기 다른 종료의 지옥이 있다는 것이다. 환자를 죽게 한 의사들에게는 그들에게 걸맞는 지옥이 있어 거기에서는 그런 죄를 저지른 의사들이 거듭거듭 몸이 조각조작으로 잘리고는 다시 맞추어지고 그리고는 또 잘리고는 하는데, 몸에 검은 줄이 그어지고 그 줄을 따라 귀신이 벌겋게 달군 톱으로 썰어 나간다는 것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가는 지옥도 있어서 혀의 뿌리에서부터 끝까지 여러 가닥으로 찢기우고 그것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진다고 한다. 투덜댁 푸념하는 자는 목에 납을 녹여서 붓는다고 한다. 또 어떤 지옥에는 빙산들이 있고 그 틈에 몸이 내던져지면 거대한 빙산들이 양쪽에서 다가와서 가루가 되게 으깨버린다.

“그런 설교를 하니 가엽게도 사람들이 겁을 먹을 수 밖에 없겠군. 그러나 당신은 설마 그런 것을 믿지는 않겠지요?”
“글쎄요...”
정말 알 수 없는 태도로,
“아뭏든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도록 되어 있어요.”
“이거야 원, 당신들은 모두 위선자가 아닌가! 왜 진실을 대중들엥게 알리지 않는가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이 나라에서 아무 힘도 없게 되지요.”
“그렇다면 당신들이 갈 지옥도 있겠군!”
그는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승원에 시주하지 않는 사람이 가는 지옥도 있는 것으로 되어 있겠군. 그러니까 사람들은 무서워서 헌금을 하게 되는 것이지.”
“그야 그렇지요.”
“그런 일이 언젠가는 거꾸로 뒤집히게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나요? 티벳은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고립한 나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요. 물론 훌륭한 학승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믿지는 않겠지만...”
“높은 라마승들, 큰 학자들, 치료가들, 예언가들, 과학자, 원자 과학자들 가운데는 신비가들이 있고 그들은 원자력에 대해서는 서양의 학자들보다 더 잘 알지요. 선생님이 간덴에 가시면 그런 분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이 외부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에는 선생님도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나도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린포체 대사의 제자이지요.”
“네, 알고말고요. ‘린포체’란 ‘존엄한 이’이라는 뜻입니다. 그 분은 대사의 대사님이시지요.”
“왜 당신은 대사님에게 사사하지  않는가요?”
“유감스럽게도 대사님은 이제 제자를 더 받지 않으신답니다. 대신 저는 스르두 대사님의 제작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스르두’란 ‘예지의 스승’이라는 뜻이지요. 지금 간덱 승원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분과도 곧 만나게 되어 있지”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어쨋든 당신은 대중에 대한 자신들의 설교가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순진한 사람들을 미신으로 얽어매어 놓기 위해 그런 설교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그러나 선생님도 서양에서 마찬가지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요? 서양의 그 굉장한 교회 건물은 뭔가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돈을 걷어서는 돌이나 벽돌에 쓰고 장식에 써버리고 있지 않나요?”

나는 태도를 조금 바꾸어 보았다.
“그러나 당신들은 먼저 대중을 바르게 교육해야지요. 티벳 사람들에게 욕실이 달린 집을 주니까 욕실을 창고로 쓰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나는 보았소. 하기야 서양에서는 아직 희생을 바치는 것을 믿는 사람도 있지. 모두 형식만 다른 착취지요. 본질은 마찬가지이지. 당신들쪽이 조금 더 잔혹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이지요.”

내가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린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대개의 티벳 사람들은 아직 미신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이젠 자꾸자꾸 무어져가고 있지.”
대화가 흘러 우리는 태어남, 죽음, 다시 태어남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생명의 윤회 문제에 이르렀다. 내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의 환생과정과 이유 따위를 도도히 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가는 곳마다 그런 것을 대중에게 설교하는군!”
이 사람은 아직도 미망을 꿰뚫어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좀 흥분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린포체 대사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처음 린포체대사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찾아갔을 때의 일을 이렇게 말해 주었다.

제자가 되겠다는 그를 대사는 강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물가에 꿇어앉게 하더니 느닷없이 그의 머리를 눌러 물속에 잠기게 하고는 몸부림치는 것도 아랑곳 없이 한참을 강제로 누르고 있다가 겨우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물속에 처박혔을 때 가장 원한 것이 무엇이냐?” 그가 “숨을 쉬는 것입니다.”고 대답하지 대사는,
“네가 지금 숨만 쉬었으면 하고 절실히 원한 그만큼 진리를 열망하게 되었을 때 내게로 오라.” 하셨다는 것이다.

승원 안에 널려 있는 몇 백이나 되는 불상들을 돌아보고 린포체대사의 거처로 돌아왔다. 대사에게 내가 느낀 대로를 말했더니 모든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티벳의 라마교는 뚜렷히 두 파로 갈라져 있다네. 하나는 붉은 모자를 쓰고 하나는 노란모자를 쓰지. 그래서 홍모파(紅帽派)와 황모파(皇帽派)라고도 한다네. 황모파는 신비(神秘)의 면을 추구하며 내가 공부한 것도 그것이야. 홍모파는 의식(儀式)의 면을 추구하여 형식이나 행사를 앞세우는 파라네. 그들은 황모파처럼 신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 간덴 승원은 확실히 황포파이고 나는 거기서 공부를 했고 또 수년간 가르친 일도 있다네.”

“저를 안내해준 첸센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높은 성직자나 신학 교수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과 같아서 어려운 일이라고 여져집니다.” “그런 적절한 방법으로만 말해준다면 그들도 얼른 그 덧없는 멍에를 벗어버릴 수가 있게 된다네.”하고 대사는 웃으며 대꾸하셨다.

내가 전에 유럽의 어떤 식학자와 대화를 해 보았지만 통하지 않더라고 했더니, 그이는
“다시 해보게나. 이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르지.”
하고 암시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첸센의 집안은 부유한 계층이야. 그래서 그는 친구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제 방도 가지고 있지.”
“그럼 가난한 집안 출신의 라마승들은 어떤가요?”
“아아, 그들은 기숙사의 큰 방에서 함께 기거하지.”
“그런데도 첸센만은 독방을 쓴단 말이지요?”
“그래. 그의 가족이 승원에 많은 돈을 바치고 있는 것이야. 그것이 이 나라의 관습이라네. 자네가 이미 알게 되었듯이 여러 가지로 차별이 정해져 있어. 시간의 경과만이 그것을 바꾸어 나간다네.”

티벳에서는 거의 모든 집잉 남자 하나씩을 라마승이 되도록 출가사키는 것이 관습이라고 한다. ‘라마’라는 말은 ‘뛰어난 자’라는 뜻이고 엄격하게는 승원장에게만 해당되는 칭호이지만 지금은 승원 안의 성년에 이른 모든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있다.

대새 사내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일단 승원으로 보내지는데 엄격한 시험을 하여 육체와 정신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험을 통과한 아이는 본인의 십이궁도(十二宮圖, 점성에 쓰임)를 작성하고 적성을 살펴 그 아이에게 맞는 부문을 정해 소속시킨다. 많은 학예부문이 있어 각 부문마다 한 사람의 장로가 통솔하여 각각의 적성에 맞는 일에 힘쓰게 되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한창 자라나는 출가 소년들은 한 걸음 한 걸음 공부해 나가면서 자신의 종교의 신화에 정통하게 되며 희망에 따라서는 대학에도 들어가데 된다. 오랜 세월에 걸친 준비 후에 21세가 되면 정식으로 승려로서의 인가를 받고자 승원장에게 신청을 한다. 그리하여 몇 번의 득도식(得度式)을 거쳐 머리를 깎는데 처음에는 정수리에 한 웅큼의 머리를 남겨둔다. 그리고는 거지옷을 걸치고 사원 큰 방에 모인 승려나 가까운 친지들 앞으로 나가 라마승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선택하였음을 보인다. 그 절차가 끝나면 승원장은 남은 머리를 마저 자르고 출가승으로서의 법명을 주며 그로부터는 법명으로 불리우게 되는 것이다. 걸쳤던 거지옷을 벗기고 라마승의 법복을 입히고나면 그로부터 그가 앉을 자리가 지정된다.

만약 그가 밀교 쪽의 길을 택하면 밀교에 정통한 고승에게로 보내져서 형이상학적인 높은 가르침에 관한 여러 학과를 닦아야 한다. 공부가 깊어지고 점점 향상해가면 마침내 승원 안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는 승원을 떠나 그가 원하는 지식을 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신청을 낸다. 그런 타당한 신청이 허락되지 않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간의 식량이 담긴 바랑을 메고 승원을 떠단다.

조금의 식량만을 가지고 험준한 히말라야를 뚫고 나가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바로 이 시련을 거쳐서이다. 모진 시련 끝에 스승을 찾아내면 즉시 교육이 시작된다.

그는 일체의 미혹과 그때까지의 생활의 그림자를 마음에서 떨쳐버리라는 명령을 받으며 스스로의 마음 속을 응시하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관찰하는 훈련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자아가 지어낸 온갖 심상으로 가득차 있음을, 그리고 그 심상 그것에는 본래 아무 힘도 없고 다만 자기가 그것에 힘을 주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상념과 반응은 주로 두려운 걱정, 의혹, 무지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마치 거지옷을 말씀히 벗어버리듯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참 나’는 마음의 감정이나 이미지, 관념 또는 육체나 환경 같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여 인간의 사고의 허망함을 궤뚫어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수행의 가장 긴요한 점이다.

마음을 깨끗이 비움으로써 그는 그밖의 사람들을 알지 못하는 정도의 주의와 자기통제의 집중력을 개발한다. 그는 일체의 그릇된 생각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하고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것 속으로의 문 앞에 서게 된다. 그는 이미 전과 같은 자기의 관념이나 사상, 감정, 반응의 노예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육체의 기능 곧 심장의 고동이나 혈액의 순환 등을 스스로 통제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를 배우고 알게 된다. 그의 육체는 그 자신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예민한 기계가 된다. 그의 마음은 정밀하고 민첩해져서 어떠한 혼란도 없고 아주 미세한 지령에도 즉각 따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겨우 ‘길’이 시작에 불과하며 그 뒤는 그 자신이 홀로 제 힘으로 발견해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 뒤의 ‘길’ 그것을 그에게 쥐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뜰하게 일러주신 대사는 이어서,
“내 아들아, 그대가 여기에 왔을 때가 바로 이 단계였다‘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나의 앞길을 이처럼 알뜰히 가르쳐주실 분이 또 있을까. 나는 이제 알았다. 대사는 내 어깨에 한손을 얹고는 다시 이렇게 말하셨다.
“아들아, 그대는 나의 신뢰를 받을만한 그릇이다. 그대에게는 이제까지 높은 지도령이 몇 분 분이 있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그들에 섞여 그대와 함께 있게 되리라. 그 지도령 가운데는 그대가 이미 대화를 나눈 영도 있다.”

“네. 스승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래, 알고있지. 모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참모습에 대한 진리에 눈이 어두워 허망한 구분과 차별을 지어내었을 뿐이다.”

저녁을 마친 다음 우리는 의자에 앉아 린포체 대사가 좋아하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잔잔한 고요 속으로 멘델스존의 부드러운 선율이 곱게 흘러갔다. 내게는 마음을 조화시켜줄 것이 필요했다. 그것을 대사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자기 자신 속의 모순과 대립이 녹아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러나 아직도 밖의 모순, 대립이 눈에 띄었다. 나는 뭔가 아직 덜 깨친 것이 남아 잇는 것이다. 내 안에는 노여움도 아직은 얼마간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오래지 않아 깨끗이 가신다는 것을 자신하게 되었으니 마음은 느긋했다. 하긴 나의 해탈은 느낀 기분처럼은 완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출처] 벳의 성자를 찾아서 |성자 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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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acdonaldbayne.homestead.com/Beyondindex_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