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cension/Ascension Healing Resources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by 맥도널드 배인 (3)

namaste123 2009. 4. 3. 09:20


"Beyond the Himalayas"

by Murdo MacDonald-Bayne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제 2장)



캐러밴의 준비가 끝나고 보니 짐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내용은 앞으로의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필수품을 갖추었을 뿐이었으며, 조금 색다른 것이라면 1파운드 캔에 포장된 영국제 고급 비스킷 50통이었다. 티벳 사람들, 특히 라마승들이 그것을 좋아해서 선물로 쓰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따로 실크 스카프를 여러 장 마련했다. 그것은 티벳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의식에서 선물로 주고받는 물건이다. 명주 스카프를 증정할 때 상대방의 목에 걸어주면 그를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 본다는 표시이고, 그저 넘겨주기만 하면 상대방을 아랫사람으로 본다는 표시이다.

나는 언제나 스카프를 상대방 목에 걸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지로 나는 많은 덕을 보았으며, 특히 높은 라마승들이 나에게 많은 원조와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

카린퐁의 조그만 거리를 벗어나 티스터 강 계곡으로 내려갔다. 이 강은 세계에서 가장 물살이 빠른 강으로 알려져 있으며 물은 푸른기가 도는 흰 빛깔이다.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그러나 에베레스트 보다도 등반이 어렵다는 칸첸쥰가에서 흘러내리는 거대한 빙하의 얼음과 눈이 섞여드는 강이기 때문이다.

계곡은 차츰 깊어지면서 길도 거의가 좁은 오솔기의 연속이다. 그런 소로가 한량없는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로 땅이 패어서 생긴 수로를 윙윙거리면서 달리는 티스터 강줄기를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었다. 늪지대의 고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고 끈적끈적한 냄새가 사면의 통과불능인 깊고깊은 정글로부터 풍겨나오고 있었다.

이 진녹색의 짙은 숲속에서는 코끼리, 물소, 사나운 벵갈 호랑이, 표범, 원숭이, 구렁이 등 수백종의 야수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겨우 그 무서운 지대를 뚫고 나섰을 때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고지로 올라감에 따라 여기저기에 환히 열린 공지가 나타나면서 좀처럼 보기드문 웅장한 경치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푸른 하늘은 초록의 숲을 덮은 천장같고 산허리에는 철쭉이 선명하다. 한편으로는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티스터 강이 울툭불툭 튀어나온 바위 위를 특급열차처럼 포효하면서 달려가고 있다. 그런 경관이 나의 기억에 박혀 있어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이다. 산맥, 정글, 강, 소로, 나무들, 녹지대... 그것들이 하나로 어울려 아름다우면서도 엄숙한 파노라마를 구성하니, 그 넘치는 자연과 야성에 나는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퍼뜩 들곤 했다. 소로에서 한 발짝 헛디뎌 저 포효하는 티스터 강의 흐름 속으로 떨어지기만 하면 그때는 영락없이 일막의 끝인 것이다. 전망이 터지면서 저 멀리 영원한 백설을 인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이 바라보였고, 며칠 사이에는 저 봉우리 가운데 어느 고개를 넘어야 하는 나의 여정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었다.

이제야말로 일생에서 가장 거창한 모험으로 접어든 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emfEM고 이제부터 겪을 일들에 기대와 기쁨이 저절로 솟았다. 나의 마음 속에는 한 가닥의 두려움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말을 이미 들었고 어떤 위험에도 자신있게 직면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위대한 히말라야 산맥 저 너머에 내가 풀어야 할 신비가 숨겨져 있음은 분명했다.

첫날은 30킬로미터를 걸었다. 그 정도가 그 고장에서는 하루의 알맞은 행정이었다. 우리는 강가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묵었다. 주민들의 집은 땅에서 2미터 가량 떼어 기둥 위에 얹어 지은 오두막들이고, 집둘레는 말뚝으로 에워싼 꽤 넓은 빈터여서 밤에 습격해오는 맹수들로부터 가축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도중에 행정기관의 경비원들을 위한 조그만 경비초소도 있었지만 밤이 되면 경비원들이 와서 묵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장소를 찾기로 했다.

나는 마을 뒤 언덕 중턱에 있는 동떨어진 오두막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풀로 엮은 거적을 씌운 산막이었다. 나를 돌보는 호위역이 걱정이 되는지 “나리, 괜챦겠읍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뭐 노새와 함께 자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거기도 사람이 잘 곳이 아니겠습니까.”
언덕 중턱 돌출부를 깎아내고 그 오둠막은 세워져 있었다. 호위역이 침낭을 꺼내서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내게 할당된 작은 물통과 대야 하나분의 물로 세수를 하고,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상쾌한 피로감으로 나는 이내 잠에 빠졌다.

그런데 한 밤중에 그 허술한 산막 둘레로 찾아든 짐승이 나를 깨운 것이다. 그놈은 분명히 냄새를 맡고 나직이 으르렁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호랑이나 표범이 틀림없었다. 그놈이 더 대담해지기 전에 겁을 주어야 했다. 나는 아직 물이 들어있는 대야를 들어 짐승이 있다고 여겨지는 쪽으로 냅다 던졌다. 이어서 물통도 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것만으로도 짐승은 굉장히 놀란 모양으로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도망쳤다. 얼마 후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돼지의 비명이 들려왔다. 결국 그 짐승이 먹이를 찾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 일이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는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즐기는 기분이었으니까. 아침에 호위역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셨군요. 참 다행입니다.” 하고 치하해 주었다. 나는 태연히 웃어버리기는 했지만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해서 방비가 잘 될 곳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면도를 하고 청소도 마치고 나서 일행과 함께 아침식사를 들었다. 소금으로 간을 한 죽과 통조림, 크림, 베이컨 한 조각, 토스트와 홍차가 메뉴였다. 정말로 기분좋은 아침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때의 느낌이 되살아올 정도이다.

그 날 아침은 모두가 아주 좋은 기분으로 길을 떠났다. 나의 기분이 그대로 전염되는지 조랑말과 노새들까지 즐거워보였다. 일행은 몇천 미터나 되는 험준한 산길을 차례차례로 올라갔다. 아득히 저 아래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티스터 강의 포효가 들려온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저 편에 있는 빙하가 이동하면서 이 강에 섞여들어 다시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저 강에 얽힌 이야기도 많겠지요?” 하고 호위역에게 물어봤다. “그렇지요. 거 강에서는 많은 사라들이 죽는답니다.”
좁은 길 일부가 무너져 내려 발을 디딜 여지도 없다. 우리는 벼랑에 달라붙다시피 하면서 겨우 걸음을 옮겼다. 노새 등의 짐이 벼랑에 부딪쳐 3백 미터도 넘는 골짜기도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아슬아슬했다. 다행하게도 마부들이 경험이 많아 용하게도 노새들을 무사하게 건네주었다. 나는 내 조랑말에 타는 모험을 피해 조심조심 뒤로 끌면서 걸었다. 그 말도 경험이 풍부한 말이었다. 그 길을 여러 번 왕복한 놈이었다. 겨우 벼랑길을 벗어났을 때 굉장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전날 밤 내가 신세졌던 오두막만큼이나 되는 바위덩어리가 섞인 돌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 위험한 대목이었다. 어떻게 되어 그런 사태가 일어날까? 곰 탓일까? 그 일대에는 곰이 상당히 많다. 아니면 사냥 탓일지도 모른다. 우기 동안에는 때로 산허리가 몽땅 계곡으로 무너져내려 길이 없어지고 마는 일도 있으며, 그런 때는 새로 길을 내는데 며칠씩 걸린다고 한다. 히말라야 등반은 정말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난행고행인 것이다.

그 날 밤에 시킴 국경에 닿아 영허즈밴드 탐험대(영국의 군인, 1863~1944 티벳 탐험으로 유명함)가 세워놓은 제대로 된 산막들 가운데 하나를 차지해서 쉬었다.

여기에서 구르카 병사들 한 소대가 있어 티벳으로의 통로가 되는 시킴으로의 불법입국자들을 단속하고 있었다. 나는 통행증을 제시하고 명단에 서‘m을 했다. 나의 여행에 대해 자세한 설명도 했다.

7개월 뒤 돌아올 때 여기서 다시 명단에 서명을 하여 내가 입국했을 때와 같은 인물이고 무사히 돌아갔다는 것을 증명했었다. 닭, 달걀, 감자 같은 것은 손쉽게 사들일 수가 있었기에 그날 밤은 닭고기 구이와 기름에 지진 감자로 식사를 했다. 그날은 거의 이틀분의 거리를 걸었기 때문에 식사가 특히 맛있었다.

다음날 강을 건너 시킴으로 돌아가 수도 간토꾸까지 강행군을 했다. 간토꾸에는 티벳의 정무관으로 굴드라는 사람이 주재하고 있어 그날 밤에는 그 분과 훌륭한 만찬을 나누었다. 다음날 시킴국왕-마하라쟈라고 부른다-을 예방하여 유쾌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왕비는 어여쁜 티벳 여성이고 야툰의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주 매력적이고 더구나 황홀할 정도로 곱게 영어를 말하는 것이 그녀의 매력을 한층 돋구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이번 여행 중에서도 대단히 어려운 코스가 시작됐다. 그것은 나투라 고개를 오르는 것이었다. 길은 너비가 60센터미터 남짓 밖에 안 되고 산허리를 갈짓자꼴로 기고 있다. 높이 오를수록 벼랑 협곡도 깊어진다.

우리는 몇 무리의 당나귀 대열을 추월했다. 야크 대열은 8백 마리 이상인 경우도 있다. 티벳에는 바퀴가 달린 수레가 없으며 모든 것이 등에 실려져 운반된다.

어떤 아주 위험한 지점에서 당나귀 대열을 만났다. 길너비가 너무 좁은데다 바깥쪽은 그나마 패어 있었다. 그것은 말과 당나귀들이 산쪽으로 불어가면 등에 실린 짐이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쳐 짐과 함께 벼랑에서 몇천 미터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 수도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바깥쪽만을 밟고 가기 때문이다.

방울 소리가 들렸다. 당나귀들의 목에 달린 방울소리이다. 우리는 겨우 비켜설 곳을 찾아 당나귀 대열을 지나보냈다. 이런 종류의 체험을 생전 처음 한 나의 기분이 어떠했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그 날 숙소를 잡고 우리의 노새들의 짐을 내린 뒤에 등을 살펴보았더니 모두가 짐안장에 쓸려 뭉그러져 있었다. 그 작은 동물들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가엽기 짝이 없어 통역을 통하여 마부들을 책망했는데, 그들은 노새들이 아픔을 그다지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자기들의 발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해가 저물며 녹았던 진창이 다시 얼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면도날 같은 얼음으로 발이 여기저기 베어져 있었다. 그들로서는 노새 등의 허물 따위는 대수로운 것이 없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가 뜨면 길 위의 눈이 녹는다. 그러나 해가지면 그 진창이 다시 얼어 면도날 같이 되고 밝으면 그것이 발 밑에서 부서진다. 대개의 티벳 사람들은 일종의 새끼줄로 발을 감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조그만 노새나 당나귀가 그 가는 다리로 그만큼의 짐을 잘도 나른다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 험한 산길을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허덕 오르는 것이었다.

어느날 아침인가 한 마리의 노새가 발작을 일으켰다. 뒷발질을 하며 날뛰는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짐을 못지겠다는 말인지 짐을 얹기만 하면 뒷다리로 공중을 차서 짐을 떨구어 버리곤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마부들이 노새의 한쪽 뒷발과 앞발을 새끼줄로 묶어 뒷발질을 하기만 하면 코를 땅에 처박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는 그런 일도 없어졌다. 가만히 보니 그런 일이 별로 드문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험준한 산길을 구불거리면서 느릿느릿 올라가 이틀만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나투라 고개 정상에 닿았다. 그곳은 산림선(山林線)에서 약 7백 미터, 해발 약 5천 3백 미터이다. 그 경관은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아득히 저멀리 눈길이 닿는 끝까지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의 웅장한 봉우리들이 눈에 덮여 널려 있다. 위를 보고 저쪽을 보고 그리고 참비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신비로운 땅이었다. 속세에서는 이 땅이 불가사의이고 속세는 또 이 땅에게는 더욱 불가사의이다. 그것은 그대로 꿈의 나라이다. 저 아래 골짜기로 내려가면 나의 한평생의 소원의 성취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 장엄한 전망은 더더구나 나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것이었다.

챰비 계곡으로 차츰 내려가니 산허리는 만발한 진달래로 덮여 혹은 분홍색으로 혹은 진홍색으로 혹은 자주색 도는 흰색으로 저마다 아름다움을 다투고, 해발 4천미터의 푸른 골짜기 바닥은 야생의 꽃들로 온통 채색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티벳 집들의 붉은 지붕이 보이고 파랑, 빨강, 노랑의 체크무의 같은 농토들이 그것을 에워싸고 있다. 그 가운데를 아모츄 강의 거센 흐름이 가로지르고 그 물이 수로로 끌려 땅을 축이고 있다. 나는 매혹되어 빳빳이 선채로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가 안되는 그 경관에 빨려들어 있었다.

그 야생 꽃 무리로 채색되고 잘 가꾸어진 밭들의 체크무의에 둘러싸인 붉은 지붕이 산재하고, 그 가운데를 한줄기 강물이 밧줄처럼 흐르는 에메랄드의 분지 사면을 우뚝 우뚝 순백의 산보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저쪽 산허리에 외따로 안개를 드리우고 서 있는 신비로운 티벳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바로 신비를 가르치는 배움터, 잊혀진 시대의 지혜가 아직도 실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신기롭기만 한 마법의 융단같았다.

그날 밤은 산허리의 쾌적한 산막에서 쉬었다. 다음날은 다시 구불구불 야툰으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넘어선 나투라 고개로 우리는 외계에서 이미 차단되어 이제 신비의 땅, 세계의 지붕에 있는 금단의 비밀처에 들어선 것이다.

‘인간은 구하는 것은 찾아낸다’는 말은 어김없는 진실이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경치, 첩첩한 산의 모습, 또는 아슬아슬한 모험 그것을 구한다., 그러나 나는 풍경 그것이 아니라 뭔가 영원한 것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 손에 들어오는 찰나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산만 안에서 나는 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 앉아 내일이라는 날이 내게 가져다 줄 것에 대해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렇게 상당히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불이 이미 사그라져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남은 불의 붉은 빛이 차츰 희미해져 갔을 대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바로 침낭 곁에 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은가! 엉겹결에 나의 호위역이 들어왔나 하고,
“무슨 일이지요?”
하고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찬찬히 다시 살펴보았다. 그것은 라마승 같은 법의를 걸친 인물이었다. 말못할 강한 감동이 나의 몸속을 달려감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은은한 동양인의 모습, 이마는 수려하고 눈빛은 쏘는 듯 빛나는 얼굴은 그저 거룩하기만 했다. 두 눈은 많이 떨어져 있는 편이지만 얼굴 전체의 모양은 훌륭했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한참을 서 있더니 이윽고 그 모습은 고요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원래가 매우 냉철한 편이고 무엇이든 충분히 생각해본 다음이 아니고는 받아들이지 않는 성질이다. 그래서 환영을 본다거나 스스로 상상을 해대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일찍이 알지 못한 어떤 수수께끼임이 틀림없다. 아무려나 이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해명될 일일 것이라고 스스로 달래며 잠들었다.

다음날 야툰에 도착하자 그이가 나타나 맞이해 주었다. 그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도록 당부했고 또 자신을 ‘친구’로 여기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친구 이상의 존재이다. 나는 그이에게 나의 체험을 이야기했지만 그이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없고 그저,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해요. 내을은 자네가 만나야 할 분이 있어. 그분은 자네를 이미 알고 있다네.”
할 뿐이었다. 이상한 말이었다. 이 금단의 땅에 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다음날 그이와 둘이서만 길을 떠났다. 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람을 만날 기대로 나의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얼마나 가면 그분을 만나게 되나요?”
그이는 골짜기를 가리키면서,
“저기에 린마톤이라는 곳이 있다네. 거기에 자네가 만날 분, 자네를 이미 알고 있는 대사가 계시지. 승원에 살고 계시지만 이미 오래 전에 승려들이 지니는 신조나 교리, 의식 따위는 넘어서버린 분이야.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라네. 그분은 모든 라마승들에게서 아니 실지로는 온나라 사람들에게서 위대한 스승으로 섬겨지고 있지. 그러나 그분은 자네에게 말씀하실 것이야. ‘필요한 것은 스승이 아니다. 가장 높은 스승은 자기 자신 안에 있으며 거기에서만 자기가 구하는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이야.”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나서는 입을 다물며 승원에 닿을 때까지 한 마디도 없었다. 산허리에 그 승원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승원 바로 앞까지 가기 전에는 승원의 건물이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기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광경도 흔하지는 않다. 우리는 둘이 다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산허리에 그렇게 당당한 건물이 대체 어떻게 세워질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을 해 보았다. 거대한 바위 계단을 올라 승원의 적어도 10미터는 될 것 같은 대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 육중한 대문이 마치 정교한 기계장치라도 되어 있는 듯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렸다. 아무래도 안에서 우리를 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문이 열리면서 몇 사람의 라마승이 우리를 맞아 정중히 안내해 주었으니까.

몇 개의 넓은 홀을 지나 복도로 나왔다. 복잡한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 금으로 칠해져 있는 어떤 문 앞에 닿았다. 문 곁에는 금색 장식술이 달린 기다란 금빛 비단띠가 늘어져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라마승이 그 띠를 잡아당기자 안에서 징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는 나의 면전에 바로 이틀 전 밤에 산막에 나타났던 그 거룩한 모습이 서 있지 않은가! 그분이 바로 위대한 ‘게시 린포체’대사였다. 나는 대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만남은 나에게 참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커다란 신비의 가장자리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분은 나를 동기간으로서 환영해 주셨다. 그분의 따듯한 마중을 받는 순간 나는 뜨거운 정감이 온 몸 속을 스쳐감을 느꼈다. 전에도 그 정감을 느낀 적이 자주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러니깐 몇 년이나 계속되어온 것이다.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우리는 곧 어울려서 내가 해온 여행이라든가 내가 떠나온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 자신이 온세계를 여행했고 수개국어를 구사했다.

이미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우리는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회식이 끝나자 나는 나를 위해 마련된 쾌적한 방으로 안내되었고, 이제는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은 전에 없이 편안히 잘 수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튿날 아침, 나의 스승과 린포체 대사 그리고 나 셋이서 야생의 꽃들이 만발한 사이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개천가의 아주 호젓한 곳에 이르렀다. 몇 세대에 걸쳐 소리 없는 흐름으로 갈리고 닦인 돌과 바위 위를 개천의 물이 끊임없이 살살 미끌어져가고 있었다. 주위의 분위기는 마치 전기를 띠고 있는 듯 짜릿짜릿 몸에 느껴져 왔다. 린포체 대사가 그 산막으로 나를 찾아주셨을 때를 말씀하셨다.
“이런 분위기 속에는 영체이탈(靈體離脫)이 매우 수월하다네.”
“그렇습니까? 제게로 와주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시지요? 저는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때와 같은 감동을 느껴왔읍니다만, 여기에 와서 비로소 그 참뜻을 알았습니다.”

나의 입에서는 스스로도 놀랄만큼 거침없이 분명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뭔가 완전히 만족한 느낌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제가 어떻게 뽑혔나요? 그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그것을 위해서 태어나 있는 것이야.” 

그러고는 아무리 들어도 좋은 목소리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창조주의 뜻이기도 한 경우도 흔히 있다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그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늘 땅의 모든 힘이 동원되는 법이지. 이런 까닭으로 어떤 지극히 높은 힘을 지니신 이가 자네를 여기까지 데려오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잠시 잠잠하다가 다시 말을 이으셨다. “무엇보다도, 자네는 스스로 계획해서 이곳으로 왔는가?”
“환생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오오 자네는 다른 사람이 자네에게 말한 것을, 또는 책에서 읽은 것을 무턱대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또 실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도 모르네. 생명은 오직 하나일 뿐이며, 그것은 쪼개어질 수가 없는 것이야. 자네가 지닌 생명과 나의 안에 있는 생명은 전혀 같은 하나의 생명이야. 원래 하나의 생명에 갈라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육체 속에 있는 생명은 육체를 초월한 대생명과 그대로 하나이지. 생명 전체가 자네나 나의 안으로 갈라져 들어간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어. 자네가 보거나 느끼거나 하는 것들 사이에조차 분리(分離)란 있을 수가 없어. 물질이란 이른바 물질계에 사람들이 붙인 이름들이지만 과연 물질이란 무엇인지를 자네는 알고 있을까? 물질의 실태를 규명하려고 들면 그것은 벌써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다네. 다시 그 ‘다른 것’의 실태를 규명하려 들면 그것은 또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리고, 이렇게 물질은 무한히 바뀌어 가면 끝이 없지. 무한에는 끝이 없어. 마음은 본래 마음을 초월해 있는 진리를 결코 알지 못한다네. 마음은 그저 진리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관념, 사상, 진리에 대한 이미지, 진리에 관한 신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 그것은 분명히 진리 그것은 아니야. 따라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네. 그러나 진리가 가르침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알지. 더구나 진리는 안에서만 찾아낼 수가 있어.”

“잘 알았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풀어대는 책이 수없이 나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을 쓴 사람 자신이 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관념이나 말뿐이고, 그것이 또 더욱 많은 관념이나 말을 그칠 줄 모르는 홍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로군요.“
“바로 그렇지.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의 가치는 있는 셈이지. 그것은 그들이 제 힘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야. 다른 것에 대한 그들의 가치도 마찬가지이지.”
“그러나 자네가 이제부터 할 일은 생각, 관념, 사상이라 무엇인가,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밝히고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것은 진리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아는 일이라네. 그러나 생각 내지 관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위해서는 그것에 앞서 먼저 어떤 생각, 관념을 가져야만 되지. 자네 자신은 스스로 진리라고 여겼던 여러 가지 관념에 가득 차 있었어. 그러나 자네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것은 진리가 아니야. 왜냐하면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제부터 자네는 이 말을 거듭거듭 듣게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는 남이 진리 그것이 아닌, 그저 생각과 관념을 지닌 것 뿐이라고 해서 비난하는 일을 결코 않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런데 진리는 생각이나 관념이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니 관념이나 사상이나 심상은 진리가 아님을 자네는 잘 알고 있지만, 이제는 자네가 진리에 대한 관념, 사상,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네를 비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할 것이야. 관념, 사상, 심상 따위는 본디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고,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야. 진리는 모든 피조물의 배후에 있는 창조의 본원이야. 만들어진 것은 진리가 아니며 ‘만들어지지 않은 것’만이 만드는 것이요, 그것은 자네에게도 아니 우리 전체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참이라네. 왜냐하면, 모든 것 속에 ‘하나인 존재’가 있고 ‘하나인 존재’ 속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야.  

라마승드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총가-일종의 나팔소리- 소리가 울렸을 때 대사의 말슴이 끝났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되는 기도나 의식(儀式) 따위 형식 모두를 배척해야 하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아니. 만약 내가 배척한다면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지. 그렇다고 그 속내를 안 이상 거기에 따라가는 일도 없어. 기독교에도 형식과 의식이 있지 않나.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다 비슷한 것이야.”라고 대답하셨다.
“의식(儀式)은 정신에 속한 것-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얼(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야. 그것을 행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지만 모두 마음에 속하는 것임에는 다름이 없지. 이제는 자네가 잘 알아야 할 점이야. 그렇지 않고는 자네는 결코 해탈을 알지 못한다네. 그것을 이해하기를 자네가 거부한다면 자네는 그것을 믿건 안 믿건 그것에 꽁꽁 묶여 있는 것이야. 영성(靈性)은 사랑과 지혜와 힘의 말 없는 표현이지만 의식(儀式)의 되풀이는 그렇지가 않지.”
“그럼 자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 자네의 경험을 위해서도 승원 안으로 들어가 의식에 참석해 보도록 하지. 그러면 모든 종교가 다 비슷비슷한 것을 알게 되겠지. 말은 다르고 읊음은 달라도 마음은 그저 어떤 사고방식을 추종하고 있음이야. 마음이 만들어낸 것의 정체, 그것이 어떻게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를 알 때 사람은 비로소 무애자재가 될 수 있다네. 불교도, 기독교인, 회교도 속에 무신론자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종교로서는 각각 다르겠지만 모두 어떤 이상을 추종하고 있음이요, 무신론자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결국 같은 것이야. 그것들은 모두 마음 속에 있지, 안그런가? 그것들은 다만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뿐이지.”

총가가 마치 거대한 징소리 같은 소리를 길게 끌며 계속 울렸다.
“그런데 자네 서구인은 총가 대신에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고 있지.”
우리는 대법당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라마승들이 모두 결가부좌 자세로 줄줄이 앉아서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고 있었다. 이 진언은 ‘연꽃 줄기 속의 보주(寶珠)에게 영광 있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 쪽의 승려들이 ‘..훔’하고 끝내면 이어서 다른쪽 승려들이 ‘...옴’하고 제창을 시작하는 식으로 진언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져 울려퍼져 대법당의 기둥들마저 진동하는 것이었다. 사이사이에 거대한 징이 쳐지고 그 장중한 꼬리를 끄는 소리가 숱한 작은 종소리와 뒤섞여 울리고 거기에 따라 승려들의 진언소리도 차츰 부풀어 오느는 것이었다.

그 음향이 나의 두뇌를 꿰뚫고 지나가면서 나는 깊은 삼매경에 드는 느낌이었다. 그 음향은 그런 효과를 나에게 미치는 것이었다. ‘옴 마니 반메 훔’이란 주문을 반복하는 사이에 금욕행자가 되는 라마가 있다는데 나는 그 과정을 그 때 이해 할 수 있었다. 결국 그것은 자기최면인 것이다.

예불의 의식이 끝나고나서 내가 진언을 외는 소리와 징이나 총가의 소리가 굉장한 영향을 주더라고 말했더니 나의 스승은,
“그렇고말고. 라마승들은 어쩌면 소리의 힘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들의 그 힘의 근원까지 안다면 세계를 이끌어 나갈 수도 있을거야. 음성을 갖는 것은 한얼(大靈) 뿐이라네.” 하고는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린포체 대사가 말씀하셨다.
“자, 방으로 가서 초기의 거장들과 근대 작곡가들의 음아글 즐겨볼까?”
린포체 대사는 나의 긴장을 풀어주시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날이 나에게는 문자 그대로 놀라운 날이었고 여러 가지를 쉴새없이 보고 들어 마음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스승이 그러하듯 대사님도 자신의 제자를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계셨다.

우리는 대사의 내실로 갔다. 거기에는 완전한 소리가 재생되는 좋은 축음기가 있었다.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베토벤, 바그너, 그리이그, 모짤트, 바하, 멘델스존, 쇼팡... 등 뛰어난 악장들의 음악에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개운한 마음으로 대사의 방에서 나의 사실로 돌아왔다. 나는 마음 표면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냉철히 응시하고 관찰하면서 나의 마음을 파헤쳐 나갔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은 진리가 아님’을 파악 하는데는 그리 오래는 걸리지 않았다.

맨 끝에는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은 내가 익혀 온 그것이 아니라 상반하는 생각, 관념, 사상, 심상에서 해탈한 마음에서 생기는 침묵이었다. 그 거대한 침묵 속에서 나는 하나의 실재감을 체험한 것이다. 그 ‘순간’ 속에 ‘영원’이 있엇던 것이다. 그 나타남인 일체의 힘과 영광은 참으로 ‘지금’이었던 것이다.

지혜와 사랑과 힘의 이 거대한 원천을 지속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이미 나(自我, 작은 나)의 생각을 시작하여 ‘참’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그 ‘순간’을 다시 한번 잡으려 하였지만 이미 그것은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한낱 경험이요 기억일 뿐이었다.

지나간 순간은 이미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영원인 것이 실존했고 순간에서 순간에 사는 것이 ‘살아있는 진리’이며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이고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직 남김없이 깨치지는 못했던 것이다.

처음도 끝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떨어져 있다’는 분리(分利)의 생각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나가 아니라 일체의 있음 곧 만유(萬有)와 하나된 나요, 창조주와 피조물이 그대로 나와 하나로 어우러져 있음이었다.

‘참있음’의 이 모습을 말로 나타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지금 그리고 영원히 나의 것이었다. 나는 만족했다. 탐구는 끝난 것이다. 이제 다시 새로운 전진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 자신 밖에는 어떤 것도 그것을 밝힐 수 없으며, 나 스스로가 몸소 그것을 나타내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날의 나머지 시간을 나는 나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저녁때 어느 틈엔지 나는 편안히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 같은 심신의 가벼움으 느꼈다. 나는 영원 속에 살고 있다. 이미 두려운 것이 없고 마음의 목마름은 가셨다.  나는 자유 그것이었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맑고 별들은 아직 아스라이 빛나, 그 빛을 받아 산과 계곡은 또렷한 윤곽으로 보였다. 흰눈에 덮힌 크디큰 산들의 등 뒤로부터 해가 솟았다. 무수한 색깔의 빛살이 춤추는 새벽은 바로 아름다운 그것의 펼쳐짐, 별들의 반짝임은 이윽고 붉은 해의 빛살로 바뀌어 무거운 남빛의 하늘꾸껑이 엷은 파랑으로 바래면서 짙고 옅은 눈뷘 무지개를 비춰낸다. 처음에는 둔한 붉음으로 산들의 가장자리에 빛살이 터지고 차츰 빨강과 분홍이 나타나 서로 뒤섞이면서 광채를 좌우상하로 놓으니 그것이 눈을 쓴 산봉우리들에 반사되어 하늘을 꿰뚫고 이윽고 모든 그늘은 눈아래 골짜기로 소리없이 녹아내려 사라진다.

태양의 첫햇살이 나타나자 승원의 문들이 뚜렷이 드러나고 라마승들이 제창하는 옴 마니 반메 훔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온화한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향내음과 더불어 골짜기 아래로 메아리치며 잦아든다. 이 경관에 접하자 나의 오관은 그것을 지울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으로 새겨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그때의 생각이 날 때마다 내 눈 앞에는 그 웅장하고도 상쾌한 광경이 떠오르고 그 상쾌한 분위기가 느껴지며, 거센 강물 소리와 거대한 징소리, 총가의 울림, 라마승들의 영창이 들려오고 은은한 향내음이 코를 간질이는 것이다.

나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문득 뒤돌아보니 나의 스승도 같은 자세로 있었다.
“이 경관을 즐기고 있는 것 같군.”
“네. 이 분위기 속에 있으니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그렇군. 상념은 일어날 때마다 파동을 내어 육체의 원자나 세포에 서로 다른 움직임을 자아내기 때문에 얼굴의 근육은 상념의 파동을 모양으로 나타내어 보이는 법이다. 그런 까닭으로 자네의 얼굴은 훨씬 젊어져 보이는군. 자네의 심장의 고동과 호흡이 벌써 자네의 육체조직의 변화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어. 원인과 결과는 하나이지.”

스승이 말씀하시는 것은 남김없이 이해해야겠다고 다짐한 나였기에 그이의 말을 지그시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 말은 중대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이는 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네. 하나님의 창조란 영원히 한결같은 지혜있는 에너지를 변화시켜 모양으로 나타나게 함이야. 그것은 신의 마음에서 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보다 큰 아름다움이 된다네. 파동이 창조의 기본이고 그 리듬에 실리어 원자가 조직되어서 우리들의 눈 앞에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야.”
스승은 말을 이었다.
“또한 그것이 마음과 몸의 건강을 유지하지. 그 자력적인 끌어당기는 힘과 내재의 지혜있는 움직임은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가 있으며 그 성과는 인간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야. 이 지혜 있는 움직임은 개인 속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역을 넘어 죽죽 퍼져나가서 급속히 온 지구에 파급된다네. 그리하여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거룩한 가르침대로 ‘거룩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우리들 자신의 넋 속에 투영한다네. 우리들 뒤에 오는 사람들은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우리를 만든 신성(神性), 곧 온 인류의 배후와 안에 있는 신인 그리스도를 보다 크게 나타낼 것이다.

그이는 잠시 말을 멈추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린포체 대사는 머지않아 그 육체를 영원히 벗게 되어 있어. 대사께서 육체를 드리우고 계시는 사이에 자네를 만나게 하려는 것이었어. 보기에는 아직 젊은 것 같지만 2백년 이상이나 이 세계를 위해 끊임없이 일해 오셨다네. 그러나 이 세계는 대사를 모르지. 그 대사께서 지금 여기로 오시는군.”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대사는 50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대사가 계시는 것만으로 나는 젊어지는 것이었다. 대사는 우리가 이야기하던 것을 알고 있었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자네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창조한 크디큰 지혜는 항상 실재하니 인간 쪽에서 그것을 충실히 나타낼 준비가 되기만 하면 인간이 지금까지는 그저 어슴프레 꿈꾸어 보는데 지나지 않았던 사물이 구체적으로 인간을 통해 실현되어 나올 것이야. 그렇다네. 온 우주를 꿰뚫어 활동하고 잇는 이 하나의 큰 지혜가 지금 여기서 움직이고 있단 말일세. 그 밝은 나타남을 방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야. 그러면서도 역시 인간을 거쳐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들을 실현시켜 나간다네. 인간이 그 현현의 초점이야.”
“편재(偏在)인 그 전지(全智)를 계시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전능(全能)의 큼이여!”
“우리가 육체를 떠날 때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야. 육체있는 생명과 우주의 모든 생명의 총체와는 아무런 나뉨도 갈라짐도 없어. 그대로 한 생명인 것이지. 이른바 죽음은 그것을 갈라놓는 것도 떼어놓는 것도 아니지. ”

깊은 고요가 사면에 찾아들고 나는 그것을 몸으로 뚜렷히 느낄 수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