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World of Arts

[자료]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namaste123 2011. 11. 5. 04:30

불교미술을 찾아서 10 / 조정육 / 『그림공부, 사람공부』의 저자

부처님의 상징(3)-불상

 

 

4. 삼국시대 불상(2) - 보살상(3)

 


3.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불상을 대표하는 보살상으로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들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가부좌하고 의자 위에 앉은 보살이 왼쪽 다리를 풀고 절반만 가부좌한 상태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상을 말한다.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쪽 다리 위에는 왼손을 살며시 얹어 놓았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가락은 뺨에 댄 채 깊은 명상에 잠긴 형식이다.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약 1세기동안 삼국시대에 유행한 불상 형식으로 현재 크고 작은 불상과 파손된 예까지 합하면 거의 30 점이 넘을 정도로 많이 남아 있다.


반가사유상의 명칭에 대해서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는 설과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이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태자사유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인생 무상을 깨닫고 출가를 고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이는 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이 사바세계로 하생할 것을 고민하는 모습과 겹쳐 두 가지 학설이 발전하게 되었다. 처음 인도에서 반가사유상이 조성되었을 때는 두 다리를 X자로 교차해서 앉은 교각(交脚)보살상과 함께 여래상의 협시보살로 선보였다. 중국에서는 나무 아래에서 앉은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되다가 6세기 말쯤 나무가 사라지고 독립된 형식으로 조성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신라에서는 화랑을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길 정도로 유행했다. 특히 우리나라 반가 사유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한국 불상조각의 백미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한다. 또한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일본 국보1호 목조반가사유상은 그 소재가 우리나라에서 많이 자라는 적송(赤松)이라는 점과 쇼토쿠(聖德) 태자가 받은 불상이 신라에서 건너갔을 것이라는『일본서기』의 기록 그리고 조형적인 특징이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보살상의 세 번째 형식인 반가사유상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①고구려와 백제의 반가사유상




                                  (도1)<평양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반가사유상>, 6세기 후반, 높이 17.5cm, 리움미술관, 국보118호

(도2)<납석제반가사유상 단편>, 부여 부소산 출토, 백제6세기 후반, 높이 13.5cm, 국립부여박물관




(도3)<병인년명 금동반가사유상>, 606년 또는 666년, 높이 39cm, 호류지 헌납보물156호, 동경국립박물관,

(도4)<금동반가사유상>, 백제 6세기 후반, 높이 20.5cm, 호류지 헌납보물158호, 동경국립박물관,  

 


 


(도5)<금동반가사유상>, 백제 7세기, 높이 16.3cm,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도6)<서산마애삼존불 좌협시>, 백제 7세기초, 충남 서산

 


(도7)<방형대좌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높이 28.5cm, 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미륵반가사유상>(도1)은 출토지가 확실한 귀중한 고구려 불상으로 7세기 전반기 작품이다. 머리에는 삼산관을 쓴(머리 뒤에는 두광을 꽂은 광배촉이 돌출되어 있다) 보살상은 네모진 얼굴에 비해 신체는 가늘고 날렵한데 하체는 굵고 둔중하다. 왼팔은 반가부좌한 발 위에 올려놓은 반면 오른팔은 부분적으로 결실되었다. 그러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정적인 느낌이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백제의 상으로는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납석제반가사유상 단편>(도2)과 <서산 마애불 좌협시>(도6)를 들 수 있다. 부소산 출토상은 신체의 하반부만 남아 있는 상인데 일본에 현존하는 백제불상의 국적을 고찰할 때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일본 장야현(長野縣) 관송원(觀松院)에 있는 <반가사유상>과 대마도 정림사(淨林寺)에 있는 <반가사유상 단편>이 모두 부소산 출토 사유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불상 중 호류지에 있는 헌납보물중에는 반가사유상이 155호부터 162호까지 열 점이나 되는데 그 중 백제에서 전해주었거나 영향을 받은 작품이 상당 수 된다. 제156호(도3)와 158호(도4) 반가사유상은 날씬한 몸매와 대좌양식에서 백제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쿠라(小倉) 콜렉션에 있다가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금동반가사유상(도5)은 공주에 있는 석탑에서 발견되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둥근 얼굴과 부드러운 조각 수법 등이 백제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 지역 반가사유상 중 백제의 미를 온전히 간직한 상으로는 <서산마애삼존불 좌협시>(6)를 들 수 있다. 둥그스럼한 얼굴을 한 보살이 이중으로 된 원형 두광을 배경으로 사유상의 형식을 취하고 앉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이 협시보살로 조성된 예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양 팔의 일부가 일부 파손되었지만 넉넉한 백제미를 느끼는 데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출토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백제적인 미감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방행대좌금동미륵보살반가상>(도7)을 들 수 있다. 방형(사각)으로 된 대좌 위에 앉은 반가상은 가늘고 긴 신체비례와 X자형 영락장식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데 그 형태가 극도로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추상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부표현의 정교함과 대담한 변형이 오히려 반가사유상의 정신세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준다.




②신라의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현재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도8)<경주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 신라7세기, 높이 1.6m, 국립경주박물관


(도9)<봉화석조반가사유상>,신라7세기, 높이 1.75m, 경북대박물관

(도10)<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사유상>, 신라7세기, 높이 약8.2m, 경주 건천읍 우정동

 


위의 세 점의 반가사유상은 모두 돌로 만들었다. 경주 송화산에서 출토된 <석조반가사유상>(도8)과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석조반가사유상>(도9)은 머리와 양쪽 팔이 없으나 반가부좌한 다리 위에 왼손이 남아 있어 이 상이 반가사유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두 상 모두 매우 큰 작품으로 천의에 둘러 쌓인 신체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양감이 두툼하다. 이에 비해 <단석산 신선사마애반가사유상>(도10)은 양감보다는 선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마애불이라는 재료적인 특징에서 오는 한계 때문일 것이다. 


김유신의 수도처로 알려진 단속산에는 10여m 절벽으로 된 ㄷ자형 자연석실이 있는데 이 곳에는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공양상 등 10여구의 불상과 200여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미륵불로 알려진 본존의 높이는 8.2m로 장육상(丈六像)인데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유신이 이곳에서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도11)<금동반가사유상>, 7세기 전반, 높이17.1cm, 국립중앙박물관

(도12)<경남 양산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높이 27.5cm,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반가사유상>(도11)은 다른 반가사유상이 대부분 뺨에 손가락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살짝 대는 것에 비해 여기서는 손바닥으로 고개를 받칠 정도로 얼굴을 푹 수그렸다. 그래서 정면에서 보면 얼굴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반가사유상 중에서 이 상만큼 깊은 생각에 빠진 상은 없을 정도로 태자(혹은 미륵)의 ‘사유’가 실감나는 작품이다. 경남 양산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도11>은 앞 작품만큼 과장적이지는 않으나 역시 머리를 상당히 많이 숙이고 몸도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신체 비례에 비해 대좌는 매우 낮고 좁은데 대좌 위로 늘어진 천의의 표현이 매우 입체적이고 변화가 풍부하다.

 


③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그리고 고류지 반가사유상

 

(도13)<금동미륵반가사유상>, 6세기 후반, 높이 80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78호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도13)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도14)과 더불어 삼국시대 불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 작품은 기존의 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사실성과 종교적인 숭고미가 결합되어 7세기 조각 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국보83호 반가사유상에 비해 조금 더 장식적이고 화려한 국보 78호상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날렵함이 느껴지는 천의를 입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에서는 양 옆으로 관식이 늘어져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봉보주보살상과 관음보살상 그리고 호류지 몽전의 구세관음과 백제관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손가락 두 개는 뺨에 대고 나머지 두 개의 손가락은 동그랗게 구부려 변화를 준 보살상의 얼굴 표정은 희노애락을 전부 포함하면서도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럽고 복합적이다. 


섣부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표정 속에는 완전한 적멸에 든 보살의 은은한 미소가 배여 있는가 하면 중생에 대한 한없는 자비심에서 우러난 슬픔도 또한 담겨 있다. 목에 장식된 목걸이와 똑같은 문양의 팔찌가 양팔과 손목에도 채워져 있으며 대좌를 덮고 있는 천의는 물론이고 탄력이 넘치는 자연스러운 신체 표현과 뒷마무리까지 깔끔한 주조 기법 등에서 삼국시대 불상 조각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도14)<금동미륵보살반가상>, 7세기 전반, 높이 93.5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83호

 


국보78호 반가상이 장식적이라면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도14)은 일체의 장식이 배제되어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반쯤 감은 눈과 반듯한 콧마루, 은은하면서도 힘 있게 번진 입가의 미소, 가늘지도 않고 풍만하지도 않은 적당한 신체 표현과 율동감이 느껴지는 천의의 표현 등은 이 작품을 한국을 넘어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조각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얼굴에 댄 4개의 손가락에서는 리드미컬한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데 이는 천의 자락을 살짝 누르고 있는 무릎 위의 왼손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 


상체는 천의를 걸치지 않은 듯 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다. 일체의 현란함과 거추장스러움을 배격한 반가상은 장식이라고는 양쪽 팔 윗부분에 팔찌만을 하고 있다. 상체의 단순함과 천의 자락의 입체감이 어울려 긴장감과 생동감을 주기 위한 배려다. 머리에는 삼산관을 쓰고 있는데 머리 뒤에는 광배를 꽂았던 광배촉이 남아 있을 뿐 현재 광배는 결실된 상태다. 더 보탤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조화로움이 느껴지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인간의 손으로 빚었으면서도 인공미가 전혀 묻어있지 않아 애초부터 하늘에서 태어난 작품 같다. ‘우아하다’는 표현에 성스러움을 담아 인간이 도달하고 싶은 최고의 이상미를 상상한다면 국보83호 반가사유상에 근접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근사한 단어로 찬사를 늘어 놓는다 해도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단어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국보 78호 반가상과 국보 83호 반가상의 국적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삼국의 영토분쟁이 잦았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출토지만으로 그 작품의 국적을 단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15-1),국보83호반가사유상과 고류지(廣隆寺) 반가사유상 (도15-2) 

 





(15-3)수리 전 목조반가사유상 (도15-4)수리 후 목조반가사유상

(도15)<목조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높이 1.23m,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

 


국보83호 반가사유상(도14)과 거의 똑같은 형식의 반가사유상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 국보1호로 지정된 <목조반가사유상>(도15)은 목조의 나무결을 잘 살린 동양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상을 만든 적송이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라는 것과 당시 기록을 통해 신라에서 건너간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날카로운 콧날과 일본적인 느낌으로 수리하기 전의 얼굴 모습은 국보83호 반가상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수리하기 전의 고류지상과 국보83호 반가상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생동감의 차이는 부드러운 목재와 단단한 청동이라는 재질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다.

 



4. 호류지 백제관음



 

16-1)<목조관음보살입상(백제관음)>, 아스카시대,7세기중엽, 209.4cm, 나라 호류지 대보장전

 


삼국시대 보살상 중 마지막으로 살펴 볼 작품이 일본 호류지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입상>, 일면 <백제관음>이다(도16). ‘구다라관음’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호류지의 불상 중에서 몽전(夢殿)의 <구세관음>만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백제관음이 7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데는 학자들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으나 1200년경에 호류지에 안치되었다는 기록 외에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백제관음은 녹나무(樟木) 하나를(單木) 통째로 깎아서 만들고 그 위에 채색한 조각작품으로는 그 높이가 209.4cm로 등신대를 훨씬 넘는 크기다. 이렇게 난이도가 높은 기술은 7세기의 일본 사람들은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고급 기술로 오직 백제장인만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스카 시대 이후 일본에서 백제장인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그 기술은 사라지고 대신 불상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한 다음 몸체에 끼워 넣은 후 조립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불상은 ‘백제관음상’이라는 명칭 그대로 19세기 말까지는 백제에서 왔다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한국을 식민통치하던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 불상의 재료인 녹나무(樟木:구스노키)가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고 오직 일본에서만 자라는 나무라 하여 백제 도래설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녹나무가 한국의 전남지방과 제주도에 자생하고 있다는 보고가 발표되면서 불상의 백제도래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당시 일본인의 키가 160cm가 넘지 않은(그래서 일본인을 ‘왜소하다’는 의미에서 ‘倭人’이라고 불렀다) 상황에서 등신대를 훨씬 넘는 불상의 크기가 백제도래불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16-2)<목조관음보살입상(백제관음)>, 아스카시대,7세기중엽, 209.4cm, 나라 호류지 대보장전

 


백제 관음의 몸체는 녹나무로 만들었고, 왼손에 들고 있는 정병과 대좌는 삼나무를 썼다. 머리에는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수식이 달린 청동투조(透彫)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밑 테두리 가운데와 양 옆에는 파란색 구슬이 박혀 있다. 목과 양쪽 팔, 그리고 팔목에도 청동투조목걸이와 팔찌가 장식되어 있다. 


파란색 구슬은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에서도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5-6세기 신라고분출토품에서 유리구슬이 발견된 것은 앞 장에서 살펴보았다. 유리구슬이 박힌 청동투조보관은 호류지의 사천왕상의 보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도16-3) 불꽃처럼 타오르는 화염무늬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에서도(도16-3)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광배 뒷면에 새겨진 중앙의 연꽃 무늬는 백제 각 가람에서 출토된 기와 무늬와 동일하다.

 



16-3)(좌)<남장증장천왕>(호류지), (중)<몽전 구세관음>(호류지), (우)<금제관장식(왕비)>(무녕왕릉)


 


(16-4)(좌) <백제관음의 광배>와 (우) 백제 기와




(16-5)<백제관음>과 <서산 마애불 우협시>


 

1958년에 일본을 찾은 프랑스 문인 앙드레 말로(1901-1976)는 <백제관음>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다. 이것이 백제다.”

그러면서 “이 말할 수 없는 충격”이라는 말로 감탄하더니 “백제관음은 분명히 세계 조각의 최고봉 중의 하나다. 이 판단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백제관음은 세계 10대 조각의 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 때 법륭사 안내를 맡은 일본인이, 이 백제관음이 백제(조선)에서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앙드레 말로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도 그러한 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이 얼굴만으로도 판단된다. 이것은 일본인의 얼굴이다. 완전히 일본인의 얼굴이다. 대륙에서 온 조형의 요소는 물론 있지만 새로운 일본적 요소가 확실히 드러나 있다. 의심 없이 일본적 포름이나 정신성이 느껴진다.” 이에 대해 김윤식 교수는『문학과 미술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굳이 앙드레 말로의 경박한 예술관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이방인이 ‘대륙에서 온 조형의 요소’인 백제의 미감을 제대로 알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백제미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도 앙드레 말로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일본 학자 뿐 아니라 한국의 학자들 중에도 있다!) ”


삼국시대 불상과 보살상, 특히 일본에 있어서 일본 미술로 알려진 우리 불상을 살펴보면서 나 또한 내내 김윤식 교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지 일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선조들이 만든 위대한 예술품이 일본 미술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낳아주신 부모가 일본에 잠시 여행갔다고 해서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논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죄스럽고 부끄러운 억지다.

 



5. 맺음말


지금까지 10회에 걸쳐 우리나라 불교미술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회화사 전공자인 내가 굳이 불교미술에 대해 살펴본 것은, 그만큼 불교미술이 우리 문화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불교가 전래되고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불교는 이 땅에서 천 년의 세월동안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억불숭유정책을 쓴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여전히 꺾이지 않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사람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의 터전은 그 지역에 맞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다. 그 문화 속에서 사람은 태어나고 문화를 몸에 익힌 후 문화 속에 죽어 간다. 문화는 문화에 몸을 기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요람이자 무덤이다. 문화를 아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개별적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들여다보는 행위는 앞서 간 사람들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남긴 발자취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생애는 문화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잃고 주저 앉아 있을 때 만약 앞사람의 발자취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 발자취는 불교 문화다.(끝)

 

 


*참고문헌

-곽동석,『금동불』, 예경, 2005년

-김리나,『한국고대불교조각 비교연구』, 문예출판사,2003년

-김윤식,『문학과 미술 사이』, 일지사, 1994년

-문명대,『한국불교미술사』,한언,2007

-존 카터 코벨,『일본에 남은 한국미술』,글을 읽다, 2008년

-최성은,『석불, 마애불』, 예경, 2004년

-최선주,허형욱,『인체로 나타낸 진리의 가르침 불교조각』, 국립중앙박물관, 2006년

-『국립경주박물관 명품100선』, 국립경주박물관,2007년

-『백제가람에 담긴 불교문화』,국립부여박물관, 2009년

-『韓國의 國寶-회화,조각』,문화재청, 2008년

-『한국의 미-불상』, 중앙일보, 1983년

-『岩波奈良の寺 -法隆寺』, 岩波書店, 1979년

-『原色日本の美術 2-法隆寺』, 小學館,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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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료 출처:  blog.daum.net/_blog/ hdn/ArticleContents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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