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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돌아갈 사람, 흙빚어 만든 예술

namaste123 2010. 2. 9. 06:54






흙으로 돌아갈 사람, 흙빚어 만든 예술


왕실도자기 초대명장 지당 박부원 선생




도자기를 빚어온 46년 외길 인생 지당(志堂) 박부원 선생(71·사진). 흙으로 빚어 탄생시킨 그의 작품들은 시대를 초월한 전통적 미학이 살아있다. 옛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걸 뛰어넘어 다양하고 새로운 한국 도자기를 발전시켜온 그는 지난해 왕실도자기 초대명장으로 선정됐다. 한국 도자예술의 아름다움을 지켜온 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원요’를 찾았다.

 

▲ 왕실도자기 초대명장 지당 박부원 선생 ⓒ 이인숙 기자

 



달항아리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 

너무나 욕심이 없고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하다” 



故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에서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갈하고 순수한 내면이 배어나온 듯 하얀 젖빛, 소박하면서 넉넉한 듯 풍만하고 둥근 선이 한국인의 심성을 닮았다는 달항아리. 그가 있는 도원요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도 달항아리였다. 한 아름 족히 되는 크기에 보기만 해도 넉넉해지는 달항아리가 살포시 웃었다.


불안한 듯 안정하고, 비대칭인 듯 대칭이다. 수학적 개념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자로 잰 듯 일정함이 없는 대신 작품마다 다른 실루엣에서 개성적 묘미가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사람이 정성을 다해 빚었지만, 구울 때는 하늘의 뜻에 따라 다르거든요. 가마에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색감이나 형태가 찌그러져서 나올 수 있는 게 더 아름답지 않습니까?”


모두가 잠든 칠흑 같은 새벽, 그는 조용히 일어나 전등 하나를 켠다. 그리곤 부드러운 불빛 아래 은은하게 드러난 달항아리를 마주한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면 달항아리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아… 달항아리! 참으로 아름답다!’ 소리 없는 침묵의 대화, 그가 이른 새벽 달항아리와 나누는 첫 인사다.

 

▲ "비대칭의 대칭이죠" 그가 낳은 애장품이기도 한 달항아리는 정형화되지 않으면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녔다.

 



분청 접시


1962년 10월 어느 날, 한 청년이 인사동을 거닐고 있었다. 작품이 진열된 가게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가지런히 놓인 그릇들 사이에 뒤집혀 있는 작은 그릇 하나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굽이 다 보이도록 엎어져 있는 분청 접시였다. 둥글게 도드라진 굽이 마치 오래 신어 닳고 닳은 짚신 같았다. 보면 볼수록 오래전 기억 속에 있던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 저런 그릇을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청년 박부원, 그는 무엇에 이끌린 듯 그릇을 만든 사람을 찾아 나섰다. 어렵사리 만난 스승은 한국 도자기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故 도암 지순택 선생이었다.   


“꼭 도예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도자기란 분야도 전혀 생소한 분야였죠. 그런데 무엇인가에 끌린 듯했죠.”


도예 인생은 그렇게 우연처럼 시작됐다. 그는 도암 지순택 선생을 따라 강원도 첩첩산골로 들어갔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맥이 끊긴 한국 전통 도자기 재현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흙을 구해다 반죽을 해서 도자기를 만들고, 나무를 해다 가마에 넣고 불을 지폈다. 작품을 만들려면 거칠고 열악한 환경에서 참고 견뎌야 했다. 잘 먹지 못해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손은 벌겋게 동상이 걸렸다.


전북 김제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그다. 양반가문 자손이 도자기를 만드는 상놈이 되겠다고 하니 가족들의 반대는 말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그릇을 만들겠다며 산속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멀쩡했던 사람인데 돌았나보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도자기를 잘 만들어서 도예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만들어 본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작은 접시를 본 이후 그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본성이 깨어난 듯했다.


-도자기에 관심도 없었는데 어떻게 만들 생각을 했습니까?


“이미 어렸을 적 하늘은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잠재의식 속에 소명을 주었다고 봐요. 그런데 계기가 되니까 그릇 하나를 통해서 하늘이 내게 그 길로 가게 한 거죠. 너무 거창한가요? 양반이라는 제도도 사람이 만든 거지 신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신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으니까 양반인 나를 짐놈으로 만든 거죠(웃음).”


-어떤 작품을 재현하셨나요?


“청자, 백자, 분청사기 각각 여러 종류가 있는데 모두 재현작업을 했죠. 꼭 재현이라는 의미가 옛날 것을 그대로 하는 건 아니에요. 하나의 형태나 색상이 몇백 년 전 옛날과 똑같이 전수되는 건 전통이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에게 맞는 정서와 문화가 수십 년 후에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게 전통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색깔이나 문양은 변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는 한국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아름답고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겁니다.”


-한국 도자기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인위적인 것을 떠난, 자연적인 것이죠. 일본의 유명한 도예가가 한국의 도자기는 만들어진 게 아니고 태어난 거라고 말했죠.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기능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이 탁월하다고 해도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은 따라갈 수가 없죠. 로뎅도 작가는 자연이 불러주는 예술을 통역하는 자라고 말했어요. 그 유명한 작가도 자연이 만들어준 아름다움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거예요. 한반도의 자연에 영향을 받은 심성, 그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생활과 가까운 한국의 문화라는 겁니다.”

 


찻그릇

 

가마 속에 넣은 불이 붉다가 하얘지기 시작하면 정성들여 빚은 그릇을 넣는다. 1280℃ 고열 속에서 그릇은 장장 28시간 동안 열기를 견뎌야 한다. 그릇도 그릇이지만, 기다리는 도공의 속은 더 타들어간다. 마치 아이를 낳기 위해 분만실에 들어가는 아내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남편의 심경처럼.


“옛날엔 애를 낳으러 들어가면서 자기가 신던 고무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생각했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완성된 그릇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게 초조하죠. 우선은 정말 순산했으면 좋겠다, 두 번째는 아들일까 딸일까, 여러 생각들이 교차되면서 기다리는 거죠. 어린애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처럼 가마 문을 열고 좋은 작품이 나왔는지 확인하기 전까진 긴장이 되요. 과장이 아닌 사실이에요. 그게 지금까지 일생동안 반복된 겁니다.”


도자기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자기 실수를 용납하지도 않는다. 유약을 잘못 칠하거나 불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가마에서 나올 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다. 만드는 과정에서 소홀히 여긴 부분이 있다면 그만큼이 정확하게 표현된다. 겉모양은 완벽해 보인다 해도 부족함이 있다면 미련 없이 깨버린다.

 

▲  왕실도자기 초대명장 지당 박부원 선생


-아까운 생각도 들지 않나요?


“도자기는 처음 배울 때 깨는 법부터 배우죠. 물론 망치로 깬다고 하면 누구나 깰 수 있죠. 그게 아니라 깰 수 있는 용기, 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죠.”


도자기의 인생은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과 같다. 어쩔 때는 슬프거나 가슴 아플 때도 있고, 웃을 때도 있다. 잘 나오지 않으면 가슴 아프고, 잘 나오면 즐겁다. 


도예를 시작한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가마에서 그릇을 꺼내던 그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가 그토록 만들려 했던 그야말로 마음에 쏙 드는 다완(茶碗)이 나온 것이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찻그릇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아 밤마다 품안에 넣고 끌어안고 잤다. 지금까지 그만큼 좋은 작품은 없었다고 할 만큼 그에게는 하늘이 주신 선물과 같았다.


- 그릇을 아직도 갖고 계신가요?


“없어요. 그 작품은 꼭 소장하고 싶었는데 일본 사람에게 갔죠. 차완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이 한국을 세 번이나 왔어요. 꼭 사고 싶다면서 얼마나 간곡하게 청하는지, 어디에 있든지 당신 자식인데 가서 대접 잘 받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정말 오래 고민한 끝에 차완을 주기로 했습니다. 대신 값을 부를 수는 없었어요. 알아서 하라고 했죠.”


- 얼마를 주던가요?


“지금 돈으로 수천만 원 정도 될 겁니다. 지금 돈으로 말하면 상상할 수 없이 큰 돈 이었죠. 돈의 액수가 많은 것도 충격이지만, 그 사람의 그릇에 대한 미적 감각은 정말 탁월했죠. 설명할 필요가 없었어요.”


고명딸 시집보낸 아버지의 마음처럼 그는 여전히 다완에 대한 미련이 조금 남은 듯했다. 그가 사랑했던 최고의 작품은 아쉽게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얼마나 혼을 바쳐 만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작가는 작품이 말을 하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숨길 수가 없잖아요. 아름답다는 자체가 가만히 있지 않고 언젠가는 내가 여기 있다고 소리치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가야 하지만, 그릇은 깨지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 있잖어요. 작가는 수백 년 후에도 대접받는 그릇을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노력해야 해요. 지금 만든 좋은 그릇도 얼마든지 한 순간에 영원을 만들 수도 있어요.”


 


 

좋은 그릇은 언제나 좋다. 세월이 흘러 사람은 늙어도 그릇은 늙지 않는다. 그는 구도나 설정으로 만든 그릇보다 무심(無心)한 마음으로 만든 그릇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본래의 심성으로 만든 그릇은 바로 그 사람의 얼굴이자 본성이 되는 셈이다. 구함이 없어야 얻을 수 있다는 진리가 작품을 만들 때도 통하는 것이다.


“얼마짜리라고 계산해서 그릇을 만들면 그릇에서 돈 냄새가 나요. 아마 흙이 당신 참 건방지다고 할지도 모르죠. 그릇이 나올지 안 나올지는 계산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억지로 만들지 않고 자연의 순리대로 만든다. 흙 역시 생명이고 자연이기 때문이다. 


“흙은 살아있는 생명의 어머니죠. 흙처럼 진실한 게 어디 있어요? 흙이 참 맑은데, 진실하다는 건 맑은 거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가듯, 흑은 사람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똑같아요. 동질성이 있으니 촉감이 좋을 수밖에요. 끼리끼리 만났는데 당연히 편하게 느껴지죠.”


흙이 변해서 그릇이 된다. 인간도 나중엔 한 줌 흙이 된다. 그래서 그릇과 인간은 닮았다. 세계 어떤 민족이든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싫어하는 민족은 없다. 민족마다 그릇의 내용과 성격만 다를 뿐, 그릇 속에 그 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담아 왔다.


“요즘 흔히 쓰는 일회용 그릇은 문화와 정서가 담길 사이도 없이 버려진다. 현대사회가 정서가 메마른 것도 일회용 문화 때문일지도 모르죠.” 


깨지지 않는 도자기가 좋다는 편견에 대해 그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깨지지 않는 것은 금속품이고, 깨져야 도자기라는 것이다.


“본차이나가 단단한 게 소뼈를 넣어 만들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에요. 뼈는 석회질이고, 석회질은 내화도가 없어요. 1000℃도 안 되서 다 녹아버려요. 소뼈를 사용했다는 것은 갈아서 유약으로 사용했다는 거고, 그릇이 단단한 건 기계로 엄청난 압력으로 입자를 압축해서 그런 겁니다.”

 

▲ "흙이 변해서 그릇이 됩니다. 인간도 나중엔 한 줌 흙이 됩니다. 그래서 그릇과 인간은 닮았습니다." 

 



생명의 탄생


그에겐 타고난 병이 하나 있다. 46년 동안 치료도 안 되는 고질병이다. 가마 속에서 28시간 구운 그릇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 가마가 채 식기도 전에 기어코 꼬챙이를 넣어보고야 마는 것이다. 겨울이면 그릇이 갑자기 차가운 공기를 만나면 깨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궁금함을 참기는 어렵다는 것. 그렇다고 탄생을 기다리는 설렘을 막을 방법이 어디 있을까.  어릴 때부터 아버지 옆에서 흙 만지는 것에 익숙했던 아들 수열(42)씨와 딸 소영(41)씨는 결국 그와 같은 길을 가기로 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후대의 누군가는 내 육체의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겠죠.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세월이라는 마차를 타고 가는데, 언젠가는 내려야죠. 영웅호걸도 영원히 달릴 수 없잖아요. 내리면 어디로 갑니까? 흙으로 가지요.”


‘도원요’를 알리는 위치에 그는 토야(土也)를 만들었다. 큰 대자 모양으로 서있는 사람을 흙으로 빚었다. 토(土)와 야(也)를 합친 글씨가 땅 지(地)이고, 땅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열린 머리로 세계를 끌어안는다는 의미도 넣었다. 


그는 시간과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후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욕심 없고 거짓 없이 순수한 열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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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윤덕 기자 back2tr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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