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Self-Improvement

창조와 진화

namaste123 2008. 8. 23. 01:27

데이비드 호킨스의 [나의 눈] 중에서


창조와 진화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나요?

생명이 <드러나지 않은 것의 무한한 잠재력>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만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녔습니다. 물질적인 형상의 세계는 영향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힘은 갖고 있지 못합니다.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내재적인 힘은, 그 자체는 형상이 없으나 형상에 본래 깃들여 있는 <지고한 본체>에서 나옵니다.

<무한한 영혼.신.광명의 빛>이 활성 없는 물질과 만날 때, 그 물질 안에서 구조적인 영향력, 잠재력이 생깁니다. 그런 잠재력은 바로 의식 안에 있는 생명의 끌개장의 영향력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명은 모은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인 <신성>의 빛에 의해서 탄생됩니다. 이런 전개과정 에서 의식은 주동자(主動者)입니다.

형상은 물체.물질의 '이것'과 '저것'이라는 모습으로 생겨납니다. 그러나 생명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성장과 작용의 주체가 되는 주동자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이원(二元)적인 것이 아니라 삼원적인 것입니다. 이 제 삼의 측면은 <의식> 안의 끌개 패턴으로 생겨나고, 기본적인 원형질로 나타납니다.

생명은 <신성의 빛>을 꼭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물질만으로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증식해야 하고, 자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창조>의 끌개 패턴들은 <신>이 현존하기에 좋은 조건이 갖춰진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것의 잠재력을 활성화해 주는 일종의 삼위일체입니다.

태초에 <창조>의 에너지이자 모든 생명의 에너지인 <빛으로서의 신>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는 단지 무한한 에너지와 잠재력만이 존재했습니다. 이어서 이 에너지는 비활성의 물질과 물체로 나타났습니다. 물질 구조의 이원적인 기초는, 생명현상이 전개될 수 있도록 이원적인 것들을 살아 움직이게 해주는 하나의 주동자가 더해짐으로써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생명 형상들은 극도로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행해야 할 최초의 과제는 생존과 복제였습니다. 의식은 진화의 과정에서 활발한 주동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의식 안에서 끌개장들은 형상에 일정한 패턴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피드백을 하고 학습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의식은 본래부터 타고난 기본적인 지능과 자료 저장 능력을 갖춘, 좀 더 복잡한 생명 형상들로 나타났습니다. 진화는 바로 그 의식의 끌개장들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러 가지 적응력을 습득하는 것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작용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자료를 저장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신경계가 생겨났고, 결국 뇌가 탄생했습니다.

창조에는 지성의 미학과, 아름다움과 은총의 무한한 표현인 생명의 드러남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진화는 지속적인 창조로 드러나는 <신의 은총>이며, 의식 자체의 지성은 그런 지속적인 창조에 일정한 패턴을 부여해 줍니다. 생명은 진화를 통해 표현되는 우주로서 드러나는 <신>의 빛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창조>의 소산이자 증인입니다. 과학은 단지 형상의 메커니즘으로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생명은 오로지 의식의 비선형적인 영역의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의식 자체를 합당한 연구 주제로 여기고 그것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학(意識學)이야말로 인간의 진화를 촉진시켜줄 가장 풍요로운 탐구 분야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의식의 진화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인류에게는 그러한 앎의 확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어서 큰 곤경에 처해왔으니까요. 지난 천 년 동안 인류는 테크놀로지 분야에서는 큰 진전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지만 인류의 대다수는 여전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천 년 동안 가난, 범죄, 중독, 정서적,정신적 질환, 전쟁, 다툼 등은 끊임없이 인류를 지배했습니다. 이번 생(저자의 이번 생 - 옮긴이)에서만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유행성 전염병들의 창궐, 인구 폭발, 상승일로의 추세를 보이는 범죄와 마약과 빈곤 등의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의학분야 에서는 대체로 질병을 몰아내고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을 돕는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룩했습니다만.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다시피 1986년까지만 해도 인류의 의식은 200 레벨 이하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190 레벨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인류는 고통의 덫에 갇혀 있었습니다. 파시즘, 공산주의, 독재 체제, 유토피아적인 계획 등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인기있는 해결책은, 하나같이 그것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원래의 상태보다 한층 더 고약한 것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종교조차도 막강한 압제자가 되어 수많은 학살극과 잔혹 행위에 휘말리거나 그런 행위를 지원했습니다.

권력의 부패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부문을 좀먹어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사회에서 일어난 나름대로의 진전은 200 레벨 이상으로 측정되는 소수 사람들이 이룩하고 떠받쳐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400대에 속하는 의학과 과학이야말로 사회에 긍정적인 이익을 가장 많이 안겨준 분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현재에도 전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표준 레벨인 200 레벨 이하로 측정된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인구의 극소수에 해당하는, 의식수준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이런 엄청난 부정적인 에너지를 계속 상쇄시켜왔습니다. 군국주의적인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패배 할 경우 적국에 앙갚음하기 위해서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도 남을 만한 양의 폭탄을 사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언한 '최후의 순간'이 현실화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언이 과연 현실화되느냐의 여부는, 북방의 큰곰인 러시아(구, 소련)가 무신론을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신>에게로 돌아서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획일적이고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은 전 인류의 의식수준을 190에서 207로 상승시킴으로써 균형상의 대전환이 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류는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큰 재앙이나 파멸의 책임을 특정한 지도자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지지 없이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대중들 가운데 의식수준이 200 레벨 이하로 측정되는 사람들은 왜곡된 개념들, 슬로건, 선전, 그리고 증오와 앙갚음과 교만과 분노와 탐욕에 의학 집단적인 프로그래밍에 취약 합니다. 그러므로 인류 전체의 의식수준이 200 이상으로 유지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진화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미국에서 행해진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의 79퍼센트가 사형제도에 찬성 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중요한 모든 영적인 가르침들에 크게 어긋나는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아직까지 사형제도를 인정하는 주들에서 살인범죄율이 가장 높고, 폐지한 주들에서 가장 낮다는 몇몇 연구 결과가 사회 일반에 널리 보도되었는데도 말입니다.사형을 지지하는 의식수준은 200 레벨 이하입니다. 그런 수준은 전통적으로 미움, 복수심, 잔인성, 앙갚음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비장(脾臟)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미움과 복수심과 잔인성 들이 살인과 같은 레벨로 측정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살인이 그런 이들의 의식에 미치는 결과는 피고인이 유죄로 보이든 무죄로 보이든 똑 같이 나오는 듯 합니다.

 
 
어째서 <창조>에 대한 협소한 이해와 혼란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 문제는 단지 패러다임의 문제입니다. 선형적인 인과율에 대한 믿음의 한계를 동반한 뉴턴의 패러다임에서는 우주의 '원인'을 시간과 공간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물론 논점을 사실로 가정하고 논의를 계속하는 것이며, 첫 번째 원인이 무엇이고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이며 다시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묻는 식으로 끝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결과를 빚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됩니다.

전체를 이해하려면 선형적인 차원과 비선형적인 차원 양쪽에서의 이해를 모두 포괄해야 합니다. <창조>는 <창조>의 비선형적인 무한한 근원에서 시.공간을 넘어선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일어납니다. 이 전개과정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인 '초월자'는 드러난 것인 '내재자'가 됩니다.이어서 그 내재자는 진화를 통한 변형을 촉진시켜 줍니다. 그러한 변형은 단지 <창조>가 눈에 보이는 형상들로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주는 '원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는 원인 대신 드러나지 않은 것 속에 존재하는 자체의 <근원>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창조>가 시간 속에 고정된 '사건'일 수 없다는 것은 아주 자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조자>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히게 될 테니까요. 시공의 제약을 받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창조자>는 창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한한 힘은 형상을 넘어서 있습니다. 단지 형상 없는 것만이 형상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힘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은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써보기는 하지만 잘못된 도구들을 사용하곤 합니다. 그 해답은, 설명으로서의 '인과 관계'의 개념에 근거한 물리적인 힘의 패러다임인 선형적인 인과관계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적인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들간에 끝없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양쪽 모두가 틀린 것일까요?

그 싸움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합니다. 성서에 입각한 창조론자들은, 창조주가 '주사위를 한 번 내던져' 시간 속에 우주 전체를 창조해 놓고는 '하늘나라'의 다른 곳으로 물러났다고 가정하는(이신론적(理神論的) 전제 - 옮긴이) 과학자들이나 회의론자들과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도 역시 전체적인 핵심을 놓치고 있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창조는 <신>이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진행되고 지속됩니다. 진화는 단지 <창조>의 현재진행형의 전개이자 표현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한 신>이 '시작하거나 끝내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모든 차원을 넘어선 존재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과학 이론에 의하면 '빈' 공간의 1㎤ 안에 있는 잠재적인 에너지는 우주 전체의 질량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허공의 모든 ㎤ 안에 있는 잠재적인 에너지가 무한한 비율로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의 힘은 드러난 것의 힘과 맞먹거나 더 클 것입니다)

인류는 <신>의 무한한 영광과 위대함, 힘을 엄청나게 과소평가 해왔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참나>가 자아를 대신해서 들어설 때, 그 전능함이 지닌 힘은 그 <무한함>이 자신의 근원이자 실체라는 사실로 인해 저절로 알려집니다. <신>에게는 어떤 제한도 따르지 않습니다. 무한함의 모든 시간의 전�넉인 지속이 한 찰나보다 짧다고 말하는 것은 본체에 대한 일종의 우화적인 추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 이르러 하나의 패러다임이 또 다른 패러다임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신축성을 보일 수 없음은 분명해집니다.

 
 
<창세기>에 내재된 진실은 무엇입니까?

흥미로운 것은, 구약성서에 포함된 모든 내용을 운동역학 테스트로 시험했을 때, <창세기>가 유일하게 사람을 강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창세기는 <창조>가, 어둠과 허공과 형상 없음 으로서의 드러나지 않은 것을 <신>의 영혼 속의 신성의 작용에 의해 빛과 형상으로 드러나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 빛은 물질로서의 형상을 창조했고, 거기서 다시 식물과 물고기와 새와 동물과 같은 생명체들을 차례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창세기>는 <창조>의 힘의 근원이 '빛'이라는 점을 거듭 밝혔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동물들의 모습은 '종류에 따라서' 그 본질의 형상이 표현된 것이라는 점도 역시 되풀이해서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들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고 따라서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갖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성과 비실재를 피하라는 운명적인 경고가 떨어집니다. 선악은 지각과 관련된 것이요,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믿음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는 인간이 제한된 존재요, 깨달은 신과는 달리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꼭 필요했습니다.

인간은 형상을 갖춘 존재로 생겨났으며(인간은 지상의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믿음을 빚어낼 수 있을 만한 의식의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원성의 나락으로 떨어진 뒤 진실을 거짓에게 넘겨 주었으며, 더 나아가 그 거짓된 것이 독립적인 존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거짓된 것의 허구적인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빚어냄으로써 수치심과 죄의식, 교만, 형제 살해,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등으로 고통받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하늘에서는 깨달은 아바타들과 붓다들을 세상에 나게 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이원성(이 경우에는 선과 악)을 초월함으로써만 타고난 순수함에 대한 깨달음을 되찾을 수 있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오류에 빠지기 쉬운 레벨에 갇힌 것은, 전통적으로 지식으로서의 힘에 대한 갈망이라는 허영심 탓으로 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된 직후에 몽매한 상태가 되어 오류에 종속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200이하의 의식 레벨에서 일어나는 행위들은 전통적으로 죄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영적인 스승들은, 죄는 지옥이라는 형태의 업보를 빚어내므로 죄를 피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인간은 외적인 도움 없이는 200 레벨의 의식수준 이상 올라갈 수 없고 따라서 구원자들이 필요한 듯 했습니다. 영적인 스승들의 의식수준은 대단히 높아서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있기만 해도 의식이 200 레벨 이상으로 올라갔습니다.

200 레벨 이하의 의식수준들은 내재적인 힘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으로 대체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상승하려면 내재적인 힘이 필요하며, 그 힘은 영혼의 보이지 않는 레벨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들은 일종의 에너지장으로 방출되는 그 순수한 힘을 통해서 더 낮은 레벨의 의식들을 끌어올려 줍니다. 기도나 예배에 의한 종교적인 혹은 영적인 헌신은, 영적인 스승들을 통해 빛을 발하는 <신>의 은총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소중합니다.

앞에서 말한 모든 내용은 운동역학 테스트로 그 진실성 여부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저 성스러운 인물을 생각하거나 그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당사자를 강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헌신, 기도는 긍정적인 효력을 발휘합니다. 이 사실은 금방 입증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자는 600 레벨 이하로 측정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며, 그것은 전인류가 위대한 영적 스승들의 기여를 참으로 필요로 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내용과 부합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천의 임상의들이 여러 해를 두고 실험한 결과 알아낸 공통된 사실 중의 하나는, 운동역학 테스트에서 특정한 어떤 자극들은 모든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많은 청중들에게 운동역학 테스트의 유용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흔히 쓰는 방법의 하나는, 청중들에게 형광등 불빛을 보게 한다든지 농약을 쥔 손을 명치에 갖다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극들은 거의 예외없이 모든 청중을 약하게 만듭니다. 강당 앞에 갖다놓은, 농약에 오염된 사과를 쳐다보게 하는 것도 역시 청중들을 약하게 만듭니다(반면에 성스러운 인물을 상상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강하게 해줍니다).

예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운동역학 테스트를 배우려고 한 임상의를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부정적인 자극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실험 결과 그들은 외부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대해 일종의 면역성을 지녔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적 수준(A Course in Miracles)』이라는 영적인 가르침을 연구해온 영적인 탐구자이자 학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발견이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좀더 깊은 연구.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즉 『기적수업』수행서 일 년 치 분량의 내용을 실천에 옮기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운동역학 테스트를 하고, 그 뒤에 다시 정기적으로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그들이 75과에 이르렀을 즈음, 부정적인 자극들에 대해 취약성을 보이는 경향이 사라졌습니다(『기적 수업』은 용서의 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 수행과정은 에고의 지각과 그것의 이원적인 위치성을, 거짓을 대신해서 들어서는 진리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기적 수업』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나는 단지 내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에만 종속될 따름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내면에 깊숙이 젖어들기 위해서는 그 전에 나오는 74개 과의 내용들을 지침대로 매일매일 꾸준히 실천에 옮겨야만 합니다.

알콜중독자 자활협회(AA)라는 영적인 단체에 대한 연구는 영적인 힘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관찰결과를 제공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알콜중독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그 단체의 강력한 에너지장의 영향력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술을 마시지 않다가, '혼자 힘으로 해나가겠다'고 결심하고 AA를 떠난 뒤에는 이내 무너져버리곤 합니다. 따라서 그 단체 회원들의 의식수준이 540이나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할 경우, 그들의 회복 여부는 단체 자체의 영적인 힘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강력한 전자기장 안에 붙잡혀 있는 쇳가루들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적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적적'이라는 용어는 뉴턴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것으로, 물질적 형상들 속에서의 논리와 인과관계라는 전체의 한계들 속에 갇힌 것입니다. 기적은 오로지 비선형적인 영역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지각에 영적인 힘의 초점이 맞춰질 때 그 지각은 논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근본적인 진실에 대한 통찰로 대치됩니다.

인류의 체험 속에서 기적적인 현상을 가장 빈번히 불러일으키는 촉매의 역할을 한 것은 아마도 용서일 것입니다. 용서는 치유하는 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사랑과 같은 긍정적이고 영적인 속성들을 회복시켜 주니까요. 우리는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에 벌어진 전쟁에 참전해서 격렬하게 싸웠던 사람들이 오랜세월이 흐른 뒤 서로를 용서하고, 과거에 품었던 증오심이 존경심과 형제애로 바뀌는 경우를 통해 이런 현상이 광범위하게 입증되는 것을 봅니다.

 
 
칼 융은 동시성(synchronicity)의 개념을 창시했습니다. 그 개념은 이제 좀 더 이해할 만한 것이 되고 있는지요?

프로이드의 의식수준은 499레벨로 측정되며 융은 540레벨로 측정됩니다. 따라서 융은 인습적인 논리의 한계 너머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융은 의식의 이런 도약에 힘입어 보이는 것이, 참된 힘이 거주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끌개장은 동시에 많은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설명해줄 만한 원인이나 확실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못한 관찰자에게는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에, 이런 동시성은 선형적인 차원에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의식수준이 600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기적이나 동시성 같은 것들이 삶의 일반적인 패턴이 됩니다. 또한 그런 것들은 '에너지는 생각을 따라간다'거나 '마음 속에 품은 것은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는 등의, 흔히 이야기되는 의식의 특성이 사실임을 입증해 줍니다.

이런 이해가 바탕이 되어 이제는 마음 속에 떠올리거나 그리는 것이 유용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성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를 뜻합니다. 그 상호관계는 서로 다르게 보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관찰할 수 없는 영역 안에서의 한 패턴입니다. 따라서 수천의 쇳가루들이 하나의 전자기장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전자기장 속에서는 하나의 사소한 변화가 눈에 띄는 사건들의 동시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영적인 힘은 엄청나게 많은 개인들의 마음에 따라서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런 능력은 의식으로서 드러납니다. 나날의 삶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연속되는 사건들을 논리나 의도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사건이 태도나 관점, 감정, 끌리는 마음, 영감 등과 같은 무형적인 것들의 소산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체험하는 삶은 보이지 않는 영역 안에서의 무형적인 것들 소산입니다. 그런 무형적인 것들은 적절한 형상과 정렬된 형태를 찾아냄으로써 끌림이나 반발, 의도 등의 작용을 촉발시킵니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유형적인 것들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지닌 의미입니다. 다행히도 애정어린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 행성에는 이런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료:
http://blog.daum.net/xynetworking/5609448

'자기계발·Self-Improvemen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념의 힘  (0) 2008.09.29
The Children of the 'New' Era  (0) 2008.08.29
의식의 진화  (0) 2008.08.23
예술과 잠재력  (0) 2008.08.23
The Indigo, Crystal, Rainbow and Star Children  (0) 2008.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