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Self-Improvement

의식의 진화

namaste123 2008. 8. 23. 00:25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의 혁명] 중에서


의식의 진화


인들의 운동 역학 시험이나 역사적인 분석에 의해 수치 계산을 해보면, 사람들은 평생 동안 평균 5점 정도의 의식 진전을 이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평생 동안 마주치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들은 불과 몇 가지의 교훈만을 배우는 셈이다. 지혜를 얻는 것은 더디고 고통스럽다. 아무리 익숙한 관점이라도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면 서슴없이 버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성장과 변화에 대한 저항은 이처럼 심각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낮은 의식 수준에 묶어 두는 믿음을 변경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 같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 세대에 발전할 수 있는 기대치가 고작 5점에 불과하단 말인가? 심각하게 주

목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의 의식 수준 분포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대다수는 그들의 무력함을 보상하기 위하여 표면의 힘에 의존하는 낮은 의식 수준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보된 문화권은 더 많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그로써 괄목할 만한 의식의 진전이 있었다. 반면,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인의 의식 수준은 떨어졌다. 미국인들이 월남전에서 과연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가시화되어 있지 않다.불행히도 우리의 연예계는 말초신경의 자극에 급급하고, 폭력의 방향으로 시청자들을 끌어가고 있다. 살인 사건이 매일 밤 TV에 등장하고, 어린이들은 이제 이것을 밥먹듯이 먹고 자라고 있다. 무시무시한 것을 즐기고, 이상하면 이상할수록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잔인과 혼란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는 의식 수준의 자기 증식을 제도화하여 다양한 사회 계층을 뿌리부터 물들여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각 개인에게는 다른 대안을 택할 수 있는 융통성이 주어져 있다. 고도의 이론 물리학, 비선형 동역학, 그리고 비선형 방정식의 본질을 살펴볼 때, 우리에게는 선택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규칙은 규칙에서 나오고, 모든 끌개 패턴은 한 '가닥'의 실과 같을지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변화를 초래하는 선택이란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무엇이 선택을 재촉하는가? 누가 종용하며, 왜 종용하는가?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성장과 발전은 불규칙적이며 직선적이 아니다. 실제로 성장의 본질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아무도 인생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연구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이미지와 결과만이 연구되었을 뿐이다. 더 단순화시키자면, 그것을 이해할 만한 수학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미분방정식이 가깝긴 하지만 본질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하나의 씨앗이 무엇을 품고 있어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보여주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성장은 더딜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성장은 억제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경향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항상 주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상 자신들이 좋아하는 상황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 범위는 대개는 개인의 비전에 의해 한정된다. 관점·가치관·의미 등은 조직적인 끌개 에너지 장의 한 부분에 속하는 에너지 패턴의 미묘한 거미줄을 다른 말로 바꾼 데에 불과하다. 끌개 에너지 장은 더 큰 끌개 에너지 장의 일부이고, 이렇게 무한으로 계속되어 결국 의식 자체의 전체적인 장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게 복잡하고 거대한 에너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600∼700의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전체성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높은 의식 수준의 사람들이 갖는 상상할 수 없는 이해력에 대해 경이를 느낄 뿐이다.


의식의 향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꺼이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자발성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가져오고,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가설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사람들이 변화하게 되는 동기는 여러 가지이고 셀 수도 없지만, 어떤 모순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에 접할 때에도 이런 변화가 자주 목격된다. 선(禪) 같은 자기 연마의 분야에서는 이러한 모순이나 수수께끼 같은 난국을 화두(話頭)로 삼아 커다란 진전을 위한 디딤돌로 사용하기도 한다.

의식의 분포도에는 두 개의 분기점이 존재하며, 이 분기점들은 의식의 진화를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되어 준다. 첫 번째는 200의 수준으로, 이 단계는 잠재력을 최초로 느끼는 수준이다. 이 단계에서는 남을 비난하지 않고 자기의 행동이나 느낌,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이 시작된다. 원인과 책임이 개인의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들은 무기력한 희생자의 처지에 남아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분기점은 500으로, 이 수준은 사랑, 비판 없는 용서의 생활 양식,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예외 없는 무조건의 친절함이다.(12단계의 자조 그룹은 어떤 경우에도 분노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반응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분노를 택하지 않을 수 있다.) 개인이 일단 이러한 믿음으로 행동한다면 그에게는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의식의 진보에 따라 세상이 더욱 친절해 보일 것이다.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세상은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홀로그램에서 보듯이- 보는 것은 어느 위치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려 있다. 그러면 어느 위치가 '실재'인가?

사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홀로그램과 같다. 특정한 관점들은 그의 독특한 의식 수준의 반영일 뿐이다. 홀로그램의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은 다른 쪽에 서 있는 사람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정신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은 그처럼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통상적인 반응이다. 세상은 거울이 아닌 무한한 차원의 홀로그램과 같다. 거울은 시간과 장소에 의해 결정되고 단지 하나의 모양만을 반영해 줄뿐이다. 청각의 경험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존재하는 모든 소리의 끌개 장이 계속되는 홀로그램의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물질 세계를 만질 수 있다. 이 세계는 짜임새, 색깔, 차원, 그리고 위치나 모양을 주는 공간적 관계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은 저변에 깔려 있는 일정한 순서에 지나지 않고, 이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 같이 결국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시간의 끝'으로 돌아가며, 그 근원은 바로 '지금'이기도 하다.

홀로그램은 본질상,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3차원의 홀로그램에는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4차원의 홀로그램에서는 어떨까? 거기에는 모든 가능한 상황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초월된 상태에서 순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지금이라면, 거기에는 여기서 저기로 따라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홀로그램은 인과관계가 아닌 동시성의, 끝없는 비선형적 사건들의 반영에 불과하다.

600∼700의 수준에서는 과거·현재·미래가 완전하고 동시성인 홀로그램의 가능성 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형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는 어휘가 진정으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거리의 '부랑자'를 예로 들어 보자. 대도시의 깨끗하고 화려한 동네에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이 혼자서 호화 저택의 모퉁이에 기대어 서 있다. 의식의 여러 수준에서 노인이 어떻게 보이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의식 수준의 밑바닥인 20(수치심)의 영역에서는 그를 더럽고 구역질나며 창피한 존재로 생각한다. 30(죄의식)의 수준에서 사람들은 그의 상황을 비난한다. 그가 그런 처지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복지 혜택을 이용하기 위한 파렴치한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50(절망)의 수준에서는 그를 자포자기 상태로 보고, 사회가 집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는 단적인 예로 본다. 75(슬픔)의 수준에서는 그를 비극적이고 친구 하나 없는 고독한 사람으로 본다.

100(두려움)의 수준에서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 혹은 사회악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125(욕망)의 수준에서는 그를 골칫거리로 파악하고는 왜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지 회의한다. 150(분노)의 수준에서는 그에게 폭행을 당할 것 같은 불안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분개한다. 175(자만심)의 수준에서는 노인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을 향상시키는 데에 필요한 자존심조차 없는 사람으로 본다. 200(용기)의 수준에서는 근처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없는지 알아볼 생각이 들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일자리와 거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250(중용)의 수준에서는 노인이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흥미롭게 볼 수 있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자'는 생각이 들며, 그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310(자발성)의 수준에서는 길모퉁이로 데려가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생각이 들고, 지역 봉사단체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350(포용)의 수준에서는 이 노인에게 호기심을 갖고 재미있는 얘기가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그가 지금 그런 처지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400(이성)의 수준에서는 이 노인이야말로 최근에 일어나는 경제와 사회 모순의 부산물이며 심리학 연구의 좋은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는 노인이 흥미로운 존재일 뿐 아니라 친근하고 신경을 써 주고 싶은 사람이 된다. 통속적인 사회적으로, 장의 범주를 벗어나서 자유를 향한 흔쾌한 노인으로, 물질에 대한 무관심에서 오는 평정과 지혜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게 된다. 600(평화)의 수준에서는 이 노인이 우리들 자신의 잠시 동안의 표현으로 보일 수 있다.

노인에게 접근함에 따라, 노인의 반응은 접근하는 사람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뢰감을 느끼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서움을 느끼고 낙담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화나게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그를 기쁘게 할 것이다. 노인은 어떤 사람은 피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꺼이 맞이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보느냐에 따라 우리에 대한 대접도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 수준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결정하고, 피동적인 관찰자로서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을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구성하고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수준에 따라 현실에 반작용을 가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외적인 사건들이 환경을 만들지는 몰라도, 그 사건들이 우리가 어느 수준으로 반응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형벌 체제를 생각해 보자. 똑같은 감방, 극심한 곤경과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수감자들은 '그들의 관점에 따라서' 현저한 반응의 차이를 보인다. 가장 낮은 의식 수준에 속하는 수감자들은 감옥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죄의식에 찬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똑같은 처지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낙담에 차서 말도 안하고 먹지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슬픔의 눈물을 감추려고 한다.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두려움이고, 이 두려움은 곧잘 피해망상이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아첨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같은 감방인데도 어떤 수감자들은 폭력과 공격, 또는 분노의 에너지를 보이기도 한다. 자만심은 남성적인 강인함, 잘난 체함, 또는 지배하려는 형식으로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다.

반면, 어떤 수감자들은 그들이 왜 거기에 가게 되었는가에 대한 진실을 알려고 드는 용기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인생을 정직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독서에 열중하는 수감자들도 있다. 포용의 수준에 이른 수감자들은 도움의 손길을 뻗으며 그들에 가입하기도 한다. 배움에 새로운 흥미를 갖고 감옥의 도서실에서 공부하며 감옥 속의 변호사가 되는 수감자도 있다.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많은 책들이 철장 안에서 씌어졌다. 소수의 수감자들은 의식의 변화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을 관리하고 보살피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들 중의 몇몇은 높은 에너지 장을 가지고 깊은 영적 생활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완전한 깨달음의 길을 밟아 나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세상이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의식 수준이 낮을수록 사물에 대한 응시가 힘들어진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흥미 있는 사실이다. 아주 낮은 수준에서는 사물과 만나는 초점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반면에, 높은 의식으로 올라갈수록 오래, 그리고 아주 깊게 응시할 수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눈빛, 적대적인 눈빛, 그리고 결백에서 나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는 눈빛들을 떠올려 보라. 잠재력과 인식은 손에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인식이란 어떻게 작용할까?

그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인식이 주관적이고 독창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법과대학의 모의재판을 생각해 보라. 많은 목격자들이 같은 사건을 달리 말하곤 하지 않은가. 의식이 투영되고 있는 영화관을 생각해 보자. 영사기를 의식 자체라고 본다면 필름에 담긴 영상들은 끌개 에너지 패턴이고, 스크린에 비치는 움직이는 영상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고 인식하는 세상 자체이다. 필름에 담긴 형태들은 마음 속의 ABC 끌개 장이라 할 수 있고, 스크린에 보이는 A→B→C는 현상 세계로서 눈에 보이는 세상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모델이다. 인과 관계는 필름의 단계에서 정해지는 것이지 스크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A→B→C의 사건들을 스크린의 수준에서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대가가 어마어마해진다. 인과 관계는 필름에 박힌 ABC의 형태인 끌개 패턴에서 나오고, 이것은 의식에 의해 조명되어 마음의 필름에 새겨진다.

의식의 흐름, 즉 생각과 인식, 느낌과 기억의 패턴은 끌개 에너지 장이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며, 에너지 장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이처럼 끌개 에너지 장에 지배를 받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믿음·목표에서 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특정한 형식으로 처리되고 또 특정한 가치관과 의미로 우리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끌개 장과 일치한다.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하고 신나게 보이는 것이 다른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흥미 없고 심지어는 구역질나는 것이 될 수 있다. 진실이란 이처럼 두려울 만치 주관적인 것이다. 현대 과학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학문이라고 신봉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믿을 수 있는 측정되고 예측될 수 있는 객관적인 세상이 '저곳' 어딘가에 있다고 느끼는 불안한 강박관념의 표현일 뿐이다. 인식의 정서적 왜곡을 초월함에 있어서, 과학은 그 자체의 기준의 한계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개념적인 왜곡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이란 전체적인 맥락에서 자료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항상 갖고 있지만, 결국 그 자료들에 전체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첨단 이론물리학의 최종적인 발견물은 인간 지식의 어느 분야에서도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곳'의 구성에 대해 자세히 분석할수록 결국 우리는 우리가 분석하는 것이 사실은 '여기' 있는 의식의 얽히고 설킨 과정들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저곳'에는 의식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우리의 습관은 잠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나의 것'으로 보려는 마음의 허영이며 착각인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이란 사실 세상 전체의 의식에 귀속된다. 개인의 마음이란 단지 이것들을 새로운 순열조합으로 배열할 뿐이다. 정말로 새롭게 보이는 생각들은 천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들은 항상 이것들이 자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고 발견되거나 주어진 것이라고 느낀다. 이것은 마치 두 개의 눈송이가 같지 않듯이, 우리도 저마다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눈송이들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을 요청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조건을 유산으로 받아 놓고 있다. 이 마음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마음만이 현실의 유일한 결정론자라는 전제의 왕관을 과감히 벗어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헛된 마음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인생의 영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려고 한다. 마음은 마음에 비치는 경험을 진정한 것으로 납득시키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각 개인은 저마다 자신의 세상 경험만이 정확한 것이라고 비밀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 수준을 논의하면서 자존심이 갖고 있는 약점의 하나는 부정성(否定性)에 있다는 것에 주목한 바 있다. 각자의 마음은 자신의 '옳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정'의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인간이 평생 동안 의식 수준을 5점 정도밖에 진전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는 착각을 버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기꺼이 변화하려는 태도는 흔히 개인들의 믿음이 다 허물어지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아주 '밑바닥'에 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닫힌 상자 속으로는 빛이 들어갈 수 없다. 위기의 좋은 점은 그것이 높은 의식 수준으로 가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인생이란 배움의 터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삶은 진정한 스승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루는 삶의 고통스러운 교훈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지 않는다면, 삶은 헛되이 낭비될 뿐이다.

우리는 경험하는 것들을 기록하고, 관찰하고, 목격한다. 그렇지만 앎 자체 속에서는 실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앎은 경험하고 있는 것을 단지 기록할 뿐이다. 앎은 경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앎이란 삶 자체와 동일한 무한한 잠재력의 끌개 장을 두루 포용한다. 그리고 고도의 깨달음의 수준에서 보면 마음이 미혹한 바가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은 그 내용과 동일시된다. 마음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하여 잘했다거나 잘못했다고 항상 판단한다. 마음은 자신이 하는 일이 고작 경험으로 그친다는 것, 더 엄밀히 말하자면 '경험을 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공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이 경험한 바를 보고할 뿐이다. 명석한 생각이나 깊은 느낌조차도 경험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기능, '경험을 경험하는' 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식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순진함이다. 의식은 너무나 잘 속아넘어간다. 의식은 들리는 것을 모두 다 믿어 버린다. 의식이란 테이프만 집어넣으면 곧이곧대로 쏟아져 나오는 녹음기와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식의 순진무구함을 결코 잃는 법이 없다. 그것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하며, 믿음이 굳다. 의식의 유일한 보호자가 있다면 그것은 들어오는 것들을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앎이요, 깨어 있는 정신이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식 수준을 높일 수 있다. 마음을 관찰하게 되면, 겸손해져서 다 안다는 자만심을 버리게 된다. 이 때 앎의 성숙이 시작된다. 겸허한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을 비웃는 능력이 생기며, 마음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인다워질 수 있다.

우리가 곧 마음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생각·믿음·느낌·견해들의 주인은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거대한 의식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아는 통찰력에 도달한다. 지금 우리들이 믿는 생각의 체제는 우리에게 주어지고, 흡수되고, 우리와 동일시된 것에 불과하며, 새 개념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러한 지나가는 개념들에 가치를 덜 부여할수록 우리는 이 개념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며, 마음의,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기쁨의 새로운 원천이 익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높은 의식 수준으로 올라감에 따라 존재 자체의 기쁨도 성숙한다.
 








자료:
http://blog.daum.net/xynetworking/420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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