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Self-Improvement

연금술에 대하여 (물질 연금술 대 영혼 연금술)

namaste123 2014. 4. 19. 09:09

(* 이 글은 잡지 정신세계 2002년 5-6월호에 실렸고, 다시 단행본 <내 영혼을 위한 시네마(2004)>에 포함된 원고이다. 이 글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 중 1편 '반지원정대'와 <해리포터> 시리즈 중 1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통해 연금술에 대한 얘기를 풀어간 것이다.)






연금술에 대하여 


(물질 연금술 대 영혼 연금술)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동화나 신화를 읽고 자기만의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의 주인공이 되는 공상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현실이라면 어림 택도 없는 백설처럼 허연 얼굴의 멋진 왕자나 공주(최소한 기사 이하로는 신분이 잘 내려오지 않음)가 되어 모험을 하는 야무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합니다. 말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그 혼자만의 즐거움이란 사탕이나 초콜릿에 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은 이런 달콤함을, 마치 붐처럼 어른들도 즐겨 찾는데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가 그것이라 할 수 있죠. 그중 대표적인 것이라면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판타지의 세계, 그것은 한마디로 현대판 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 우리는 날개 달린 매혹적인 요정, 입에서 불을 뿜는 용, 마술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법사와 같은 환상적인 존재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비현실적 세계는 신화만이 아니라 종교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모든 종교의 시조들이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에서 보여주는 온갖 기적들은 신화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화나 설화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하인리히 짐머는 신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신화는 기교 있게 꾸민 말을 통해서보다는 우연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요가를 하거나 정통 교리를 배워야만 얻을 수 있는 비교(秘敎)의 지혜를 가르친다." 


 


신화 속 영웅들의 삶은 우리 모든 인간들의 영적 삶에 대한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영혼의 여정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지요. 신화는 ‘상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진리를 말해줍니다. 상징은 온 시대를 뛰어넘는 인류의 보편적인 언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직접 호소하고 직관을 통해 작용합니다.

 

신화는 원형이기 때문에 모든 신화는 반복됩니다. 다양한 영웅들이 등장하고 무수한 상황들이 펼쳐지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대판 신화라 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들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특히 뛰어난 작품일수록 그런 원형들이 상징적인 형태로 잘 갈무리되어 곳곳에서 숨은 빛을 발하게 되지요.

말을 바꾸면, 어떤 작가가 직관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그 원형들을 포착하여 스토리로 잘 형상화 한 것이 훌륭한 판타지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 영웅은 으레 안락한 고향집 또는 부모의 품에서 떠나오게 되며 그 시점부터 온갖 시련이 그에게 불어 닥치게 됩니다. 이 과정은 우리 영혼이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물질계로 하강해 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에서 프로도는 고향 샤이어를 떠나와야 했고,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해리도 부모와 사별하고 이모의 집에 맡겨지게 되지요. 이때 프로도나 해리는 우리의 영혼을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지요.

영화 속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보면 생일잔치가 벌어진 그 날은 빌보(프로도의 삼촌)의 나이 111세, 프로도의 나이 33세 때입니다. 둘의 생일은 같은 날이었지요. 소설에서 작가 톨킨은 이 나이의 숫자를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모종의 깊은 의미가 숨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프로도의 나이 33은 예수가 그 생의 사역을 마친 33세와 같습니다. 에소테릭적으로 볼 때 33은 우리 영혼의 잠재력이 완전히 개화하는 영적인 완성의 수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33개의 척추골을 나타내는 수이기도 하지요. 요가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영적인 왕관이 씌워진 머리 속 뇌수에 도달하기 위해 33개의 계단을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프로도의 나이가 33세였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지닌 본래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할 수 있죠.

 

소설 속에서 빌보는 생일잔치 날 자신의 나이와 프로도의 나이를 합치면 144라는 수가 된다고 말하면서 수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는 12부족의 사람들을 12명씩 초대함으로써 144(12×12)라는 이 특별한 숫자에 맞추었노라고 자랑하지요.

12는 하나의 사이클을 이루는 각 단위 개체들의 총합입니다. 12라는 수는 예수의 제자들 숫자이자 아더왕의 원탁의 기사 숫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숫자 12는 점성학의 12궁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예수의 12제자와 아더왕의 12원탁의 기사들 하나하나는 우리 인간들의 12가지 원초적인 기질을 대표하는 인물들인 것이지요.

보통사람들은 12가지 기질 중 하나(즉, 자신이 속한 태양궁의 속성)가 특히 강하게 발현됩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목표는 이 12가지 신성의 속성 또는 힘들이 완전히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지상 명령이기도 하지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 하리라.”

우리의 인생길은 바로 그 완성을 향한 여정이라 할 수 있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열두 별의 면류관’을 머리에 쓴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해리가 11세(상징학에서 불완전을 암시하는 수) 때 마법 학교에 들어갔고 마법사의 돌(완성을 암시)을 찾은 것이 12세 때임도 우연한 설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영화 속에는 생략되었지만 프로도가 샤이어를 떠나 방랑의 길에 나선 것은 정확히 50세 때입니다. 그 시기 또한 우연히 그리 된 게 아니라 프로도 자신이 계획적으로 50세가 될 때를 기다려서 출발한 것이죠. 왜 하필 50세일까요? 여기에서도 우리는 깊은 영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프로도는 우리의 영혼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로는 우리 영혼의 행로이기도 하지요. 불가에서는 사람이 한 삶을 마치고 다시 새로 지상에 환생하기까지 바르도의 과정을 겪게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바르도를 통과하는 시일을 흔히 49일로 보지요. 그렇게 볼 때 50은 지상으로의 환생을 의미하는 수가 되는 것이죠.

프로도가 50세에 고향 샤이어를 떠나 외지로 방랑길에 나섰다는 것은 영혼이 바르도의 과정을 마치고 물질계에 다시 환생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이 물질계는 아기 해리가 보내진(즉, 환생한) 머글(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사는 집이라 할 수 있죠.

신화 속에서 영웅은 장성하며 생의 고뇌를 통해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보물을 찾아 모험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황금양털을 찾아 나선 아르고 원정대, 성배를 찾아 나선 원탁의 기사들, 불로초를 찾아 나선 길가메쉬 등.

 

영웅들이 추구하는 보물은 신화마다 다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완성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인간들이 착각해온 것은, 영웅들이 찾으려 애쓰는 그 대상물을 물질적인 어떤 보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래로 세상에는 만병을 통치하고 불로불사케 할 수 있는 신비의 영약 엘릭시르(Elixir)나 납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신비의 물질 '철학자의 돌'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옛날 유럽이나 중국의 연금술사들은 엘릭시르나 '철학자의 돌'을 만드는 데 온 생을 다 바치기도 했지요. 때로 그들 중 극소수 몇몇은 그 신비의 물질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전해집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도 나오는 니콜라스 플라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해리가 찾는 ‘마법사의 돌’은 사실 전통적으로 ‘철학자의 돌’ 또는 ‘현자의 돌’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 '철학자의 돌'은 생명의 영약 엘릭시르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프로도가 지니고 있는 절대 반지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철학자의 돌을 지닌 자는 늙지 않고 영생 불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뿐만 아니라 그 돌은 여러 가지 신비한 기적들을 발휘하는데, 그중 하나로 그 돌을 지니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하죠. 

이것은 프로도가 지닌 절대 반지의 힘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프로도는 비록 나이가 중년을 훨씬 넘었음에도 젊은 청춘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반지를 끼면 그의 모습이 타인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구요. 그러므로 넓게 볼 때 해리의 '마법사의 돌'이나 프로도의 절대반지는 동일한 종류의 물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에서 프로도는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신화 속에서 모든 영웅들이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손에 넣기 위해 애써온 그 보물을 프로도는 파괴하지 못해 안달한다는 것이죠. 그 보물을 탐하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악인들로 묘사됩니다. 이 점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도 유사합니다.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선한 영웅(이 경우, 니콜라스 플라멜)이 '마법사의 돌'을 파괴해 버리는 것으로 나오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고대의 신화와 현대의 판타지 소설(영화) 사이에 큰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전통적인 신화 원형(즉, 불사약을 찾아 나서는 영웅의 테마)이 현대에 와서 파괴돼 버린 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보면 양자의 차이는 다만 표면상의 것일 뿐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래로 연금술사들이 만들고자 땀 흘려온 ‘철학자의 돌’의 본질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자의 돌'은 불사를 가져오고 황금을 만들어내는 기적의 물질로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입니다. 진정한 연금술은 물질 연금술이 아니라 영적인 연금술이기 때문이죠.

진정한 연금술사들이 궁극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자기 존재의 변모입니다. 물질성(납)에 속박된 우리 안의 영혼을 해방시켜 영적인 황금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죠.

연금술사들은 우리 영혼이 해탈을 이룰 수 있는 과정을 상징과 비유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상징을 가르침의 수단으로 사용한 이유는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무자격자들로부터 진정한 비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물질 연금술과 영혼 연금술은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각각 외단(外丹)과 내단(內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일찍이 많은 연금술사들이 불사와 황금을 만들어내는 신비의 물질인 환단, 단사 등을 만들려고 노력해 왔지요. 갈홍, 위백양 등이 그 작업에 성공했다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외적인 물질로 생각해 단약(丹藥)을 만들어 먹었던 많은 사람들이 중금속에 중독 돼 죽어갔습니다. 진정한 연금술사들이 추구했던 것은 금이 아니라 영적인 황금꽃, 영혼의 해탈이라는 걸 그들은 몰랐던 것이지요. 로버트 플러드, 모리에누스와 같은 연금술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자의 돌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연금술 작업에서 네 자신의 몸이 화로가 되고 네 자신이 원광이 된다.”

해리가 최후로 '마법사의 돌'을 얻은 것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반영으로부터입니다. 달리 말해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마법사의 돌'을 찾은 것이지요. 거울이 '마법사의 돌'을 찾는 열쇠로 제시된 것은 그 신비의 물질이 외부가 아닌 우리 자신의 내면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죠.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과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작가인 톨킨과 롤링이 우리로 하여금 버려야만 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물질 연금술입니다. 황금을 만들고 육체의 불사를 꿈꾸고 세속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은 어둠의 존재들이나 하는 행위로 본 것이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 사루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나오는 볼더모트, 퀴렐 등이 그런 자들에 해당되겠지요. 이 점에서 현대의 이 판타지 작품들은, 상징적 표현의 특성상 고대 신화에서 분명히 말해주지 못하고 있었던 한 가지를 콕 집어 일깨워 주는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죠. 

 

현대판 신화라 할 수 있는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에는 진정한 영적 연금술의 상징들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단약, 엘릭시르를 찾아가는 과정이 두 작품에 모두 유사한 형식으로 묘사돼 있구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경우, 그 과정은 해리가 학교 건물 3층 밀실에 있는 머리 셋 달린 개 플러피를 피리로 잠재우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에서는 원정대가 카라드라스 산을 넘는 시도에서부터 시작되죠. 

우리는, 플러피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케르베로스의 변형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케르베로스는 명부의 왕이 다스리는 하계의 문을 지키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케르베로스가 지하가 아니라 3층에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마법사의 돌'을 찾는 해리의 모험은 바로 그곳 3층에서부터 시작되지요.



삼층 건물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기본적인 영적 구조를 연상케 합니다. 머리 센터(상단전), 가슴 센터(중단전), 배 센터(하단전)가 그것이지요. 힌두 경전에 따르면 시바는 두뇌에, 비시누는 가슴에, 브라마는 배에 거한다고 합니다. 시바는 파괴의 신, 비시누는 유지의 신, 브라마는 창조의 신입니다. 여기서 파괴의 신 시바는 왜 하필 머리에 배정되었을까요? 또 창조의 신 브라마는 왜 하필 배에 배정되었을까요?

 

시바가 머리에 연결된 것은 우리의 두뇌가 실상을 무너뜨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을 오류에 빠뜨리는 것, 그것은 바로 머리라 할 수 있죠. 쉼 없이 계속되는 생각, 걱정, 근심 등 지나친 두뇌 활동은 우리의 심리적 균형을 무너뜨리게 되지요.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에서 카라드라스 산봉우리(인체의 머리를 상징)에서 원정대가 맞게 되는 눈사태는 그러한 균형의 붕괴를 상징합니다. 인간들은 ‘생각의 희생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의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죠. 우리 머리가 지어내는 상념들은 끊임없이 요동치며 흐릅니다. 낮에는 생각을 하고 밤에는 꿈을 꿉니다. 한 시도 쉬지 못하고 흐르죠. 선사들은 그것이 바로 우리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마구니라고 말하죠. 그 마구니, 파괴의 신 시바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는 머리 셋 달린 개, 플러피로 묘사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괴물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해리가 피리를 불어 플러피를 잠재우는 장면은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메스가 흰 암소 이오를 구출하기 위해 눈이 백 개 달린 거인 아르고스를 잠재우는 모습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황금양털이나 황금사과와 같은 보물을 찾아 나선 영웅들은 그것을 지키는 잠들지 않는 용과 싸워 이겨야만 합니다. 서양에서 용은 비대하게 묘사되는데, 이는 인간의 저급한 물질성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날렵하게 생긴 동양의 용은 신적인 권능을 상징함) 특히나 잠들지 않는 용은, 세 개의 머리나 백 개의 눈과 동일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지요. 즉 이 모든 것들은 머리 속에서 쉼 없이 일어나는 감각작용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해리가 플러피를 잠들게 한 것은 외부 감각의 차단을 통해 내적인 고요를 성취하는데 성공한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아이반호프와 같은 영적 스승은 영적인 여정을 머리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적인 혼란을 그대로 둔 채 아래, 즉 하단전으로 내려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단전은 우리 인간 본성의 하계, 즉 무의식의 자리로, 준비 없이 그곳에 들어가면 자칫 통제 불가능의 어두운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쉽다고 하지요.

해리포터는 3층에서 몸을 날려 하강하여 지하로 내려옵니다. 반지 원정대도 카드라스 산봉우리에서 눈길을 치며 내려와 모리아의 동굴 속에서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아무도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노라.”

카발리스트들은 이 말의 에소테릭적인 의미를 우리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여행의 코스에 빗대어 해석합니다. 즉 머리에서 시작해서 척추를 따라 아래로 내려온 뒤 다시 척추 기저부에서 머리 위로 상승해 가는 영적인 에너지 서클.   

하단전은 인간의 생명 센터입니다. 아이반호프는 창조의 신 브라마가 배(즉 하단전)에 배정된 것은 거기에서 우리 영적인 고급 자아, 즉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화려한 저택이나 궁전이 아니라 마구간의 구유에서 태어났듯이 인간의 영적 아기가 태어나는 장소 역시 인체의 낮은 영역 하단전(즉 구유)이라고 하지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도”

이것은 연금술의 가장 중요한 금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밑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에 대한 정확한 복사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두 세계의 법칙과 작용이 동일하다는 의미일 뿐이죠. 물에 비친 집을 보면 두 집의 모양은 같지만 실제의 집 지붕은 반영의 세계에서 아래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죠.

이처럼 실재의 세계에 속한 상위 원리는 환영의 세계에서 아래에 반영되는 것이죠. 대우주는 소우주인 인간 속에서 거꾸로 반영됩니다. 따라서 신은 최고급계에 존재하지만 신성계의 반영인 인간 속에서 신은 가장 아래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창조자 브라마가 인간의 배속에 거한다고 일컬어지는 이유인 것이죠.

 

유명한 연금술사 발렌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자의 돌을 찾으려면 대지의 내부 속으로 들어가라.”

아이반호프는 이 말을 육체의 중심인 하단전으로 내려가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연금술사들은 흔히 '철학자의 돌'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곤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줄 것이며 그 생수의 근원이 배(즉, 하단전)라고 말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아이반호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라는 아기가 우리 안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자신 안에 그 아기를 끌어오고 양육하고 보살피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구유 속에서의 예수의 탄생은 의미심장한 비전적 상징이다. 우리가 신성한 아기 예수, 새로운 의식을 탄생시켜야만 하는 곳은 바로 구유, 즉 하단전이다.”

 

보물은 으레 땅 속 깊숙한 곳에 묻혀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도 모리아 지하 동굴 속에 신비의 광물 미스릴이 있는 것으로 나오지요. 창에 찔린 프로도가 죽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의 갑옷이 미스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죠. 여기서 미스릴은 '철학자의 돌'에 대한 대체 상징물로 볼 수 있습니다. 보물은 지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지옥과 악마들 또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밑으로 내려가기 전에 자신을 충분히 준비시켜야만 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어둠과 대면하기에 앞서 빛으로 무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지하로 내려온 해리와 모리아의 땅굴로 내려온 반지 원정대는 모두 그곳에서 괴물들과 부딪힙니다. 그곳에 있는 돌로 된 문, 즉 하단전을 통과하기 전에 그들은 그 괴물들과 싸워 이겨야만 했지요.

 

이 괴물들은 우리 안의 저급한 속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추악한 괴물은 꼭 상징이라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에소테리즘에서는 그런 괴물을 흔히 ‘문지방의 거주자’라 부르지요. 문지방의 거주자는 영적인 세계의 입구를 지키는 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질계를 떠나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그 괴물과 마주하게 된다고 하지요.

우리의 영안(靈眼)에 그것은 실제로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영계에 들어설 자격이 없는 자는 거기서 그 괴물에 의해 저지당하게 되죠. 슈타이너(인지학회의 창설자)에 의하면 그 괴물은 우리 자신이 과거에 몸과 마음으로 행한 모든 행위들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존재라고 합니다. 즉 그 괴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살아온 숱한 삶의 결산이라는 것이죠.

일반적인 경우 사람들은 사후에만 그 괴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 들어서려는 구도자는 살아 있는 채로 그 존재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죠. 이 때 준비가 되지 못한 자는 공포심 때문에 물러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를 막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 됩니다.


 

해리와 반지 원정대는 공통적으로 처음 지하 돌문을 통과한 후 여러 개의 관문들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에서는 이 과정이 상승의 형태를 띱니다. 그러니까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한 단계씩 위로 올라서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단계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존재의 영적 변모 과정이라는 것은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에서 간달프를 통해 더욱 잘 표현되지요. 마법사 간달프는 모리아의 동굴에서 괴물과 싸우다 어둠의 심연 속으로 추락합니다. 그러나 간달프는 거기서 다시 일어서 올라오죠. 지하 감옥에서 바위산의 최고봉까지 이어지는 계단(33개의 척추골을 상징)을 올라 마침내 산정(즉, 머리)에 이르게 되지요. 그리고 거기서 그는 벌거벗은 상태로 며칠 동안 죽은 듯이 누워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독수리 과이히르가 날아와 그를 구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미 이전의 간달프가 아닙니다. 몸은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찬란한 백색의 빛을 발하며, 마법의 힘은 훨씬 더 강력해집니다. 회색의 간달프가 드디어 백색의 간달프로 부활하게 된 것이죠. 이 장면은 마치 예수가 산상에서 찬란한 빛의 몸으로 바뀌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죽음과 부활의 모티프(motif)는 해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등장합니다. 해리가 마법사의 돌을 찾는 마지막 단계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다시 3일만에 깨어나는 것이 그것이죠. 이것은 영적으로 거듭나기 이전에 인간적인 모든 저급한 속성들이 죽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화에서 불사조는 자신의 잿더미에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죠. 불사조와 독수리 과이히르는 여기서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징학에서 새는 언제나 인간의 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과이히르는 간달프의 영에 해당되는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죠. 해리의 부엉이 헤드위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수리가 흑마술사의 탑에 갇힌 간달프를 구해주거나 부엉이가 통신의 전령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나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지요.

 

 

 


우리의 영적 여행은 하강과 상승의 사이클을 통해 머리에서 완성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가 상징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연금술에서 영적 변환의 용기로 일컬어지는 곳은 주로 하단전과 상단전입니다.

엘리아데와 같은 저명한 종교학자도 신화상의 곤륜산이 인체와 동일시되며, 배와 뇌의 비밀 부위에 '철학자의 돌'의 배양 장소가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런 상승의 과정은 아테나 탄생 신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테나는, 제우스가 입으로 메티스 여신을 통째로 삼켜 배에 넣은 뒤 시간이 흘러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태어나게 되지요. '철학자의 돌'의 탄생이 아기의 탄생에 비유되는 것은 동서양이 모두 동일합니다. 일정 기간동안 배에서 태아로 자라다가 마침내 머리를 뚫고 신생아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불상에 보면 머리 위에 흔히 아기부처(佛子)가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혜명경>에서는 그것을 선도(仙道)에서 말하는 양신(養神)과 관련지어 설명합니다. 양신은 진기(眞氣)의 호흡으로 배에서 포태(胞胎)되어 나중에는 머리 위로 출신(出身)하는 작은 인간 형태의 영체를 말합니다. 서양의 연금술사들이 만들고자 애쓰는 호문쿨로스(작은 인간)도 선도(仙道)의 양신과 매우 흡사한 측면이 있지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작은 인간’으로 설정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리 역시 소년이니 ‘작은 인간’임은 말할 것도 없구요.

 

<반지의 제왕(반지원정대)>과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두 작품 속에서 '철학자의 돌'은 모두 파괴됩니다. 프로도에 의해 파괴된 절대반지, 니콜라스 플라멜에 의해 파괴된 '마법사의 돌'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파괴된 '철학자의 돌'은 물질적인 힘과 육체의 불사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헛된 욕망에 다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영생이란 정신적인 것이고 프로도와 해리는 그것을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데 성공합니다. 가짜를 버리고 진정한 '철학자의 돌'을 그들은 얻은 것이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서로 다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두 작품이 그 외적 표현은 다르지만 동일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시 고대의 신화나 종교 설화와 유사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톨킨과 롤링이 모두 신화에 정통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작품의 유사성이 모두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일찍이 융은 인간의 환상이 신화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정신구조 속에는 동일하거나 매우 흡사한 관념을 생산할 수 있는 기능적 형질, 즉 원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요. 그에 따르면 이 원형적 이미지들은 전통과는 별개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인간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집단 무의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심리 기층이 형성되며 이로 인해 규칙적으로 특정한 패턴의 이미지와 형상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볼 때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는 현대판 신화라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신화가 반복되는 이유 또한 자명해집니다. 신화는 바로 우리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있는 고급 자아가 보여주는 진리의 길에 대한 원형이기 때문이지요. 다양한 상징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지만 그 알맹이는 여전히 동일한 그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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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 http://blog.naver.com/eyeinhand/10189560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