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Self-Improvement

깨달음의 시대 'A New Earth' (2)

namaste123 2010. 5. 29. 03:03

에카르트 톨레 A New Earth 2장 본문
 
에카르트 톨레가 지은 A New Earth라는 책을 류시화 선생님"NOW,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씁니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2378178&orderClick=LAG

 
저는 이 책을 "깨달음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2장까지 번역 마쳤을 때 출간사실을 알고 

번역을 마쳤습니다. 그래도 번역하면서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즐거운 추억입니다. 그리고 제 번역에는 원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주석과 연습문제가 많이 있어서 아마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008년 9월 장용창 드림.
 






깨달음의 시대 'A New Earth'


Eckhart Tolle/ 장용창()


 

제2장 Ego: 인류의 현재 상태

 


 

말이라는 것은, 입 밖으로 튀어 나오든 아니면 안 튀어나오고 생각으로 남아 있든 간에, 여러분에게 최면을 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쉽게 말에 걸려 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어떤 사물을 어떤 단어로 부르기로 정했을 때, 여러분은 그 사물이 무엇인지 안다고 굳게 믿는 최면에 걸리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씀 드리면, 여러분은 이름을 알고 있는 그 사물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여러분은 단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를 이름이라는 껍데기로 감싸 버렸을 뿐입니다. , 나무, 심지어 작은 돌멩이 등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왜냐하면 이 존재들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물들에 대해 아는 것, 혹은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그 사물들의 껍데기뿐입니다.

 

그 사물들의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사물은 모든 사물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근원인 신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나, 새와 꽃들도 존재의 근원으로, 그리고 여러분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물들에게 이름을 붙이지 말고 사물을 잠시나마 바라보고 있으면서, 그 사물이 그냥 거기에 있도록 내버려 두면 어떤 경이로움과 신비로운 느낌이 여러분 안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이 사물들 안에 있는 근원이 여러분과 말 없는 대화를 시도하면서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반 고흐는 이건 그냥 낡은 걸상이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고, 또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는 걸상의 존재성을 감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캔버스에 걸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 진짜 걸상은 몇 달러에 팔렸을 것이지만, 그 걸상을 그린 고흐의 그림은 아마 한 250억원 정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생각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을 이름이라는 껍데기로 싸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생각에 사로잡혀 살면서 잃어버렸던 여러분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물들은 다시새로움을 얻게 되고, 그 신선함을 얻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기적은, 그 어떤 말이나 생각, 감정의 찌꺼기, 혹은 이미지로 얼룩지지 않은 여러분의 가장 순수한 근원을 다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이런 기적이 일어나도록 하려면 여러분은 라는 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 나의 정체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바로 이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번역자 주. 이런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아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용어를 써서 설명하면 이렇다. 1970년대에 활약한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이를 두고 이데올로기의 호명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은 모든 국민에게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니 공산주의를 멸망시켜야 합니다.라고 주입시켰다. , 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을 다른 말로 호명呼名이라고 한다. 이렇게 나는 누구야라는 정체성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러므로 나는 ~하게 행동해야 해라는 스스로의 명령에 복종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정체성과 명령 복종이 바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누구나 신적인 존재이다. 그 어떤 관계로부터도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 이런 자유를 다 잃어버리고 그 정체성에 따라서만 행동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본성인 신성을 찾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래서 톨레는 그런 정체성에서 벗어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은 지금도 만연한다. 나는 학생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나는 경쟁이 심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해. 나는 효자니까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해. 등등. 이런 모든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절대적인 자유를 찾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사물이나 사람, 혹은 상황에 대해 여러분이 이름 붙이는 것을 잘 하면 잘 할수록 여러분은 그 사물이나 사람, 혹은 상황의 진실로부터 쉽게 멀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럴수록 여러분의 실존은 점점 더 깊이가 없어지고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또한 그렇게 이름을 붙이면 붙일수록 여러분의 내면과 주변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인생의 기적들에 대해 여러분은 점점 더 둔감해질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면 붙일수록 아마도 지식은 늘어날지 몰라도, 지혜는 잃게 되고, 기쁨, 사랑, 창조성, 생명력도 함께 잃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말과 생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말과 생각 또한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과 생각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언어는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의 진실을 줄여 버립니다. 모든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 , ,, 우라는 모음과 기역, 비읍, 시옷 등 몇 안 되는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언어로 우리가 누구인지, 이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심지어 저기 돌멩이나 나무의 깊이 있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짓 자아

 


라는 단어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최고의 거짓을 표현할 수도 있고, 최고의 진실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관습적인 용법을 보면 라는 단어는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일 뿐만 아니라 가장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나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즉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에고입니다. , 일상에서로 표현되는,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바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순수의식의 겉모습이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공간과 시간의 진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자아가 우리의 실존, 우리의 생각, 타인과의 관계 등을 해석하는 기본 개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실존, 우리의 생각, 타인과의 관계 등에 대한 이 모든 해석이 모두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최초의 오류를 반영한 를 자기 자신의 실재로 믿게 됩니다.

 

물론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파악하는 순간 거짓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거짓 자아는 여러분이 이를 진실이라고 착각할 때까지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가 아닌지를 바라보는 순간, 여러분이 진짜로 누구인지가 스스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여러분이 이 책을 천천히 읽는 도중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이 거짓 자아, 즉 에고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이 거짓 자아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라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진짜 가 아닙니다. 이 괴물 같은 언어화라는 축약의 과정 때문에 여러분의 진짜  라는 발음이나 라는 생각과 혼동되어 버립니다. , 그러면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 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린 아이들이 자기 부모님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특정한 소리가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배울 때,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머리 속에서 생각이 됩니다. 재미 있게도 이 단계에서 어떤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마치 제3자를 부르듯 호칭하기도 합니다.용창이가 배고파요. 잠시 후 아이들은 라는 마법같은 단어를 배우게 되고, 이를 자신의 이름,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면 다른 생각들이 원래 있던 라는 생각과 함께 생겨나 결합됩니다. 그 다음 단계로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연관된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바로 사물과의 동일시라고 합니다. , 어떤 사물-사실은 사물에 대한 생각일 뿐인데-에 대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사물에서 찾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예를 들어, 내 장난감을 누가 가져가기라도 하면 엄청난 고통을 느낍니다. 이때 잘 보십시요. 장난감을 누가 가져갔을 때 아이가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 장난감이 그 아이에게 아주 소중하거나 쓸모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실, 그냥 두면 아이는 그 장난감에 대해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때 아이가 고통을 느낀 이유는 바로 내 것이라는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 아이는 이미 그 장난감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이제 라는 생각은 이제 다른 생각들을 더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나라는 생각은 이제 남녀구분, 소유물, 몸이 느끼는 감각, 민족, 종족, 종교, 직업 등과 결부됩니다.가 동일시하는 또다른 것들이 바로 역할입니다. 엄마, 아빠, 남편, 아내, 춛적된 지식이나 의견,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과거에 였던 것들에 대한 기억, 혹은 나가 이게 나야라고 생각하는 모든 생각들, 이런 것들과 가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사물들의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결국 와 조금씩 연관되어 있어서 아무런 조심성 없이 함께 모여진 생각들의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마음의 구조물이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라고 했을 때 일컫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여러분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이는 진짜 당신이 아니라 이기적 자아인 에고라는 심리적 구조물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지만, 이때 는 여러분의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나오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 심리적 구조물과 자신을 철저히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 심리적 구조물이 강박관념으로 가득차 있고, 반복적이며, 방향성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이런 사람들은 아직 생각이나 감정과 떨어져 있는 초연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직 영적으로 각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가끔 제가 사람들에게 여러분 머리 속에 생각을 멈추지 않는 어떤 소리가 있어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무슨 소리요?라며 화를 내고 부정합니다. 어찌 보면 이 소리, 즉 에고라는 것은 사람들을 거의 사로잡아 버린 어떤 독립된 인격체라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 중 처음으로 생각과의 동일시를 끝내고, 생각 그 자체가 아닌 그 생각을 바라보는 관찰자와 동일시하던 경험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좀더 미묘하게 일어나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기쁨과 내면의 평화가 마구마구 샘솟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머리 속의 소리


 

깨달음이라는 것을 처음 어렴풋이 엿본 것은 제가 런던대학교 1학년일 때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아침 9시경, 즉 출근시간의 막바지에 지하철을 타고 도서관으로 가곤 했습니다. 한번은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제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그전에도 지하철에서 그분을 몇 번 본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여자분은 무척 눈에 띄는 분이었습니다. 지하철이 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분의 옆자리는 늘 비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꼭 정신병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분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고, 그 자신에게 쉴새 없이 큰소리로, 화난 목소리로 말을 했습니다.그 여자분은 자기 자신의 생각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혀 있어서, 제가 보기엔, 자기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여자분의 얼굴은 왼쪽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는데,마치 그 빈 공간에 누가 있어서 그 사람을 쳐다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그 여자분이 혼자 하는 말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가 내게 말했어. 그래서 난 너야말로 거짓말쟁이야라고 했지. 감히 니가 나를 고발해? 니가 맨날 날 이용해 먹었잖아. 내가 너를 그토록 믿었는데 넌 날 배반한 거야..... 마치 어떤 공격을 받아서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듯한 사람의 화난 목소리였습니다.

 

지하철이 토튼햄 법원 역에 멈추자 그 여자분은 벌떡 일어나 입으로는 끊임없이 욕을 해대면서 걸어나갔습니다. 저도 거기서 내려야 했기에 그 여자분을 따라 내렸습니다. 그 여자분은 베드포드 광장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남을 욕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혼잣말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제가 가는 방향과 달라질 때까지 그 여자분을 따라가면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망상 속의 대화는 하면서도 그 여자분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 둘은 대학교의 행정본부와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세닛하우스 건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정신나간 여자와 내가 똑같은 곳으로 가고 있었다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같은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신나간 여자가 교수란 말인가? 아니 적어도 학생, 교직원, 아니면 도서관 직원이란 말인가? 뭐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답을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그 건물에 들어설 때쯤, 그 여자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우연이겠지만, 그 건물은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을 영화로 만든 작품에서 마음의 경찰서 본부로 등장한 건물이었습니다.

 

(번역자 주.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을 영화화한 작품의 제목은 Brazil이다. 테리 길리엄이 감독을 맡아 1985년에 만든 이 영화는 SF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지만, 우리 나라에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의 비디오로 나와 흥행을 못하고,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구석진 비디오방에서 겨우 구해서 보았다. 독재 체제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소설보다 더 정확히 표현해낸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결국 마음의 경찰서에 갇혀 전기고문을 받다가 상상으로만 그 경찰서를 탈출하게 된다. , 미쳐버리게 된다.)

 

저는 제가 목격한 이 사건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25살이나 먹은 성숙한 대학생으로서 저는 저 자신을 아주 지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고, 저는 인간 존재의 모든 문제의 답이 바로 이 지능을 이용하면, , 생각을 하면 얻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깨달음 없는 사고 그 자체가 인간 존재의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근원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대학교의 교수님들이야말로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는 현인들이라고 생각했으며, 대학이란 지식의 전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저런 정신나간 여자가 그 신성한 대학의 구성원일 수 있겠습니까?

 

도서관 열람실로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서 저는 계속해서 그 여자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손을 씻으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난 저 여자처럼 되면 안되는데. 제 옆에 있던 사람이 순간 저를 쳐다보았고, 그 순간 저는 제가 말하려고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그 말이 제 입에서 튀어나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혼잣말을 하다니. 벌써 저 여자처럼 됐잖아? 그러니까 저의 마음이라는 것도 그 여자분의 마음처럼 끊임없이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여자분과 저의 마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 여자분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감정은 분노처럼 보였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걱정이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생각을 입으로 크게 말하고 있었고, 저는 대부분 머리 속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 여자분이 미친 거라면,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미친 거였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저는 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저의 마음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깊은 통찰력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잠시나마 생각에서 깨어 있음으로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저를 쳐다보던 사람도 나가고 없는 그 공간에, 혼자 저는 서 있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부터 떨어졌던 바로 그 순간에 저는 크게 웃었습니다. 아마 미친 사람의 웃음처럼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정신 말짱한 사람의 웃음이었으며, 중국의 배나온불상에서 보이는 웃음이었습니다. 산다는 건, 니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그 웃음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으며, 금방 잊어버릴 일이었습니다. 그 후 3년을 저는 걱정과 절망 속에서 지냈으며, 저의 마음과 철저히 동일시하면서 살았습니다. 제가 다시 깨달음을 경험하기 직전에 저는 거의 자살을 결심할 만큼 절망적이었고, 다행히 이때의 깨달음은 힐끗 쳐다보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저는 ~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부터 드디어 자유로워졌고, 마음이 만들어낸 그 잘못된 라는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경험은 저에게 깨달음을 맛보는 기회뿐만 아니라, 인간 지능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을지를 의심하게 되는 계기도 만들어주었습니다. 몇달후에 어떤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 저의 의심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월요일 아침 저는 강의를 들으러 갔습니다. 그 강의는 제가 무척이나 존경했던 교수님이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이 그 전 주에 권총으로 자살하였기 때문에 취소되었습니다. 정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교수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능에 대한 의심이 커졌지만, 그 대안은 이때까지도 아직 못 찾았습니다. 저는 아직 생각이라는 것이 우리 존재의 근원인 의식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저는 에고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고, 제 안에 있는 에고를 발견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에고의 내용과 구조

 


에고라는 마음은 철저히 과거의 경험이 지배합니다. 그 지배는 내용과 구조로는 두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장난감을 뺏겨서 울고 있는 아이의 경우 장난감이 그 내용입니다. 그 장난감은 다른 장난감이나 기타 다른 어떤 내용으로도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동일시하는 대상인 내용은 여러분의 환경과 성장배경, 문화 등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 아이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그 장난감이 나무이건 플라스틱이건, 장난감을 뺏겼다는 것이 고통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그 상황에서 그런 고통이 발생하는 이유, 즉 구조는 바로 그 단어 (의 장난감)에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물건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압박감이 바로 그 에고라는 마음에 만들어집니다.

 

에고라는 곳이 태어나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 중 하나가 바로 동일시입니다.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단어의 어원은 같다 혹은 만들다를 뜻하는 라틴어 idem입니다. 래서가 어떤 것을 동일시할(identify) ,  그것을 똑같게 만들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과 똑같게 만든다는 뜻일까요? 바로 와 똑같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는 그것에 나자신이라는 의미를 불어넣고, 그래서 그것은 나의 정체성(identity)의 일부가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동일시의 수준은 사물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나의 장난감이 나중에는 나의 차, 나의 집, 나의 옷 등등이 됩니다. 나는 이런 사물들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결국에는 그런 사물들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운명입니다. (번역자 주. 영어 단어 identification 등을 어떤 경우에는 동일시, 또 다른 경우에는 정체성으로 번역했다. 내가 이렇게 두 단어로 번역했지만, 원문의 영어단어는 모두 identity identification 등 같은 단어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사실 ~과의 동일시를 다른 말로 하면 ~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음이라는 것과 같다.)

 




사물과의 동일시

 


광고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물과의 동일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별로 필요로 하지도 않는 상품을 판매하고자 할 경우, 그들은 소비자들이 그 상품을 구매할 경우 그들이 더 멋지게 보일 거라는 확신을 광고로서 심어주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비자들의 자아에 대한 관념에 보탬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좀 더 여러분 자신을 드러내세요라고 광고합니다. , 어떤 상품을 이용하면 군중 속에서도 돋보일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또는 그들은 어떤 상품을 유명인사나 젊고 매력있고, 행복해보이는 사람과 연관시킵니다. 지금은 다 늙은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이 젊었을 때 사진을 이용하면 광고가 잘 되기도 합니다. 이런 광고 속에는 이 제품을 이용하면 당신도 저들처럼 멋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적어도 겉모습만이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높여주는 요술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메이커라고 부르는, 고급 상표 자체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합니다. 그냥 비싸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그 상품을 살 수 있다면, 그 상품의 심리적 가치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결국 남는 것은 원래 가격보다 훨씬 적은, 진짜 물질로서의 가치밖에 안 남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물과 동일시하는지는 나이, 성별, 소득, 사회계층, 기호, 문화 등등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과 동일시하는지는 모두 내용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반면 어떤 사물과 동일시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압박감은 구조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에고라는 마음이 작용하는 기본 방식 중 한 가지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사물을 구매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 소비의 목적-이 결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소비사회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에고라는 놈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계속해서 에고를 만족시킬 것을 찾습니다. 계속해서 구매하고 소비합니다.그래서 소비사회가 유지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물질 세계에서 사물은 필수요소이며, 이것들 없이는 생활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집도 있어야 하고, 옷이나 가구, 공구, 교통수단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름다움 혹은 내적인 가치로 인해 우리가 가치를 매기는 사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세계를 무시할 게 아니라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각각의 사물들이 그 존재목적을 가지고 있으며,모든 생명의 근원인 신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대부분의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든 사물들 안에도 영혼이 들어 있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보다 진리에 더 가깝습니다. 머리 속에서 모두 추상화시켜버리는 죽은 세상에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우주의 생명성을 더 이상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세상이 아닌 개념화로 인해 죽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발견하려고 할 때, , 사물들을 자존심 높이는 도구로 사용할 때 우리는 사물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에고가 하는 짓입니다. 에고가 사물과 동일시할 때, 에고는 사물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것이 역으로 우리의 소비사회와 경제체제를 만들어냅니다. 그리하여 이 소비사회에서 진보는 오직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만 달성되는 것입니다. 끝없이 더 많은 소비를 추구하는 것,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오작동이며 병입니다. 이것은 암세포와 똑같습니다. 끊임없이 더 많은 확장만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신이 기대어 살고 있는 그 사람을 죽게 만들어 암세포 자신도 멸망하게 됩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성장이라는 개념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성장이라는 말을 안 쓰고는 아무 것도 설명을 못하게 되었나 봅니다. 심지어 경체침체조차 그들은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부르니까요.

 

사람들의 삶 중 많은 부분이 이러한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낭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와서 물질 확대라는 것이 일종의 병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자기 자신으로 채우지 못하여, 물질로 채우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수련 방법의 한 가지로서 저는 여러분 자신이 사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관찰해보기를 제안합니다. 특히 나의 물건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잘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솔직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물건으로 인해 여러분의 자존감이 높아지지는 않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내가 갖고 있기에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거나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미묘한 감정을 일으키지는 않는가? 이런 물건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가? 자기자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을 남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사람들 눈에, 그리고 자기 자신이 보기에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애써 적이 없는가? 내가 어떤 사물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그런 사물을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분 나쁘거나 자존심 상하지는 않는가?

 




잃어버린 반지

 


한때 상담을 하고 영성 지도자로 일하고 있을 때, 암이 온 몸에 퍼져 있는 여자분을 일주일에 두 번씩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40대 중반이었던 그 분은 학교 교사였는데, 의사는 몇달도 못 살 것이라고 진단한 상태였습니다. 아주 가끔 몇 마디 말을 나누었을 뿐, 우리는 대부분 침묵을 지키며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이 침묵의 시간에 그 분은 교사로서 바쁘게 지내던 시절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내면의 고요함을 살짝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 그 분이 무척 절망하고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주 비싸기도 하거니와 그분에게 감성적으로 매우 소중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매일 몇시간씩 자기를 돌봐주고 있는 간병인이 이를 훔쳐간 게 틀림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부도덕적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그 간병인을 바로 경찰에 고발할지 아니면 만나서 얘기하는 것이 나을지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지금 이 순간에 그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분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그 분이 말했습니다. 그건 제 할머니의 반지였어요. 병이 날때까지 저는 매일 그걸 끼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병이 나자 제 손이 너무 많이 부어 올랐어요. 저에게 그것은 반지 이상이예요. 어떻게 제가 화를 안 낼 수 있겠어요?

 

그분이 그렇게 즉시 대답하는 걸 보니,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화를 내면서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분이 아직도 현재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고 이를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안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화를 내고 자신을 방어한다는 것은 아직도 에고가 그분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릴께요. 그 질문에 대해서 지금 답하지 마시고요,내면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지 살펴 보세요. 각각의 질문을 끝낸 후 잠시 멈출 거예요. 하지만 대답이 떠올라도 그걸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어요. 그분이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언젠가는, 어쩌면 아주 빠른 시일 안에, 그 반지를 놓아버려야 한다는 걸 아시나요? 그 반지를 놓아버릴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하신가요? 선생님이 그 반지를 놓아버리면 선생님의 존재가 더 작아질까요? 반지를 잃어버려서 선생님의 본질적인 자아가 어떤 피해를 보았나요? 마지막 질문 이후 몇분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분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미소가 감돌았습니다. 그리고 평화로와보였습니다. 마지막 질문이 어떤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어요. 처음에 저는 답을 찾으려고 제 마음을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제 마음이 당연하지, 너는 더 작아졌어라고 말하더군요. 그 다음에 저는 저의 더 깊은 자신에게 물었어요. 나의 본질적인 자아가 더 작아졌는가? 그러자 갑자기 저는 저의 본질적인 자아를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런 느낌을 그 전에는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제가 저의 본질적인 자아를 그렇게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저의 본질적인 자아가 전혀 침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요. 지금도 느껴져요. 평화롭고, 살아 있는 어떤 것이 느껴져요.

 

그것이 바로 여기에 있음 그 자체의 기쁨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머리에서 벗어날 때만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있음은 반드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아닙니다.에고는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있음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 반지는 사실 선생님의 머리 속에 하나의 생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라는 의식과 혼동되었던 것이죠. 저와 대화하기 전에 선생님은 의 일부가 반지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무엇이든 에고가 원하는 것, 집착하는 것은 본질적인 자아의 자리를 차지해 버려요. 물론 선생님이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기고 보살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순간 그게 에고라는 걸 알게 되죠. 사실 우리는 사물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그 사물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는 거예요. 잃어버렸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에고를 뛰어넘게 되요. 그래서 이때 우리의 본질적인 자아가 나타나는 것이죠.

 

그분이 말했습니다. 전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던 예수님의 말씀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네요. 누가 셔츠를 달라고 하면 코트까지 줘버리세요라고 말씀하셨죠.

 

맞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문을 열어놓고 집안에 있는 물건을 다 내주라는 말씀이 아니예요.가끔은 물건들을 그냥 놓아주는 것이 그 물건들에 매달려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힘을 발휘한다는 뜻일 뿐이예요. (번역자 주. Let things go를 번역하기가 아주 힘들다. 마찬가지로 let it be도 어렵다. 이건 사물들에도 어떤 신성이 있어서 그 자신의 자율성에 따라 그곳에 있을 때 혹은 다른 사람에게로 가고자 할 때, 그냥 그것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표현하기가 아주 힘들다. 여기서 놓아주다로 번역한 것이 let things go에 해당하는데, 독자들은 그 말 자체에 붙들려 있지 말고 전체 맥락을 이해하시길 바란다.)

 

생의 마지막 몇 주 동안 그 분의 몸은 점점 약해졌지만, 마치 빛이 그 몸을 통해서 발산되는 것처럼 그 분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소유했던 많은 물건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심지어 처음에 반지를 훔쳐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간병인에게도 주었습니다. 물건들을 나눠주면 줄수록 그분의 기쁨이 깊어졌습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저에게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주었을 때, 그 반지도 찾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약 상자 안에 있더랍니다. 원래 거기 있던 걸까요 아니면 간병인이 돌려준 것일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삶은 우리들에게 우리 의식의 진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불행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우리 의식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유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거나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이 잘못된 걸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런 자랑스러움의 감정, 부러움의 감정, 혹은 더 많이 가짐으로써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들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에고일 뿐입니다. 에고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지, 에고는 의식이 없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에고를 관찰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에고를 뛰어넘게 됩니다. 에고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에고에 따라 행동했음을 발견하게 되면, 그냥 웃으세요. 어쩔 땐 너무 우스워서 큰 소리로 웃게 되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 에고라는 놈한테 그토록 오랫동안 잡혀 지낼 수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고를 자기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고는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에고의 어떤 행위를 보면서 나의 에고는 뭔가 잘못됐어라고 생각하면, 이건 에고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번역자 주.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을 톨레가 주문하고 있다. 이를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 매일 매일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생길 때마다, 자신의 호흡을 바라보면서 여기 장용창이라는 한 사람이 숨쉬고 있구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 에고가 어떤 일을 하거나 당하거나, 어떻게 느끼더라도 여기 장용창이라는 몸뚱아리 속에 들어 있는 에고가 일을 하고 있구나,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면 자기자신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지구에 있는 어떤 사람일 뿐임을 알게 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건 지구에 있는 어떤 사람이 생물학적인 사망을 맞이한 것일 뿐이다.)

 




소유라는 환상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의 뜻이 무엇일까요? 어떤 것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뉴욕의 거리에 서서 고층 빌딩을 가리키면 저 빌딩은 내 거야. 내가 소유하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아마 여러분은 진짜 부자이거나 아니면 망상증 환자, 혹은 거짓말쟁이일 것입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여러분은 라는 생각과 건물이라는 생각을 하나로 결합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소유라는 개념은 바로 이렇게 작동을 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여러분의 이야기에 동의하면, 아마도 거기에는 그 동의를 증명하는 종이 몇 장이 생길 것입니다. , 여러분은 부자입니다. 만일 아무도 여러분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망상증에 걸렸거나, 거짓말쟁이입니다.

 

여러분이 만들어낸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바탕이 된 생각은, 사람들이 동의하든 안 하든, 여러분의 본질적 자아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동의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상 그 어떤 사물도 결국은 자신을 떠나버리며, 자신과는 관련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죽음에 가까웠을 때, 소유에 관한 모든 개념들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은, 여지껏 자신이 찾아왔던 자기자신은 이미 그 자리에 늘 있어왔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물과의 동일시, 생각과의 동일시 때문에 가려져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왕국이 이 사람들 것이니까요. 여기서 영적으로 가난하다(poor in spirit)는 무슨 뜻일까요?그것은 내적으로 갈구함이 없음, 즉 동일시가 없음을 뜻합니다. 사물 혹은 내것이라는 생각과 동일시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왕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말 단순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기쁨,  여기에 있는 기쁨, , 모든 동일시를 내버렸을 때, 그리하여 영적으로 가난해졌을 때, 누리게 되는 존재의 기쁨이 바로 하늘의 왕국입니다. (번역자 주. 깨달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혹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톨레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따지지 말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사물과의 동일시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자신의 깨달음이 부족함을 아는 사람으로 해석했었다. 이런 사람들, , 자신이 현재 깨달음이 부족함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에고의 지배를 받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이것만 알더라도 깨달음은 반쯤 얻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곧 깨달음을 완전히 얻게 되고, 그리하여 하늘의 왕국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무소유는 동서양 고대 종교에서 공통적인 계율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소유만 실천한다고 해서 즉시 에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에고는 나는 이제 모든 물질적 소유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린,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지.라는 자기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생존의 길을 찾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모든 물질적 소유를 떨쳐버렸지만 백만장자보다 더 강력한 에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가지 동일시를 떨쳐버리자마자 에고는 또다른 동일시의 대상을 찾아낼 것입니다. 에고는 동일시의 대상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그 대상이 물질이건, 혹은 잘났다는 이미지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소비반대주의나 사적소유금지 등의 관념도 소유에 대한 동일시를 대신하는 또다른 생각과의 동일시, 심리적 입장일 뿐입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은 나는 옳고, 저들은 틀렸어.라는 생각을 만들어냅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볼 테지만, 나는 옳고, 저들은 틀렸어라는 생각은 에고의 전형적인 심리 패턴 중 하나이며, 의식적이지 못한 상태의 한 유형입니다. 달리 말하면, 에고의 내용만 변했을 뿐, 에고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심리적 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가정 중 하나는 소유라는 이야기를 통해 사물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강인함과 영속성이 자신의 강인함과 영속성을 더 강화시켜 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러 가정이 특히 건물이나 토지에 많이 적용되는데, 특히 사람들이 토지는 파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유라는 것의 억지스러움은 토지 소유에서 특히 분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유럽인들이 미국 땅을 정복하러 다닐 적에, 몽골계열 원주민들은 도저히 토지 소유라는 관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몽골계열 원주민들에게 토지 매매 계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했을 때, 토지의 매매 또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토지를 모두 잃게 됩니다. 이들은 사람이 토지에 속하는 것이지, 토지가 사람에 속할 수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에고는 존재함을 소유함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면 내가 더 많이 소유하면 내가 더 많이 존재하는 걸까요? 에고는 비교를 통해 살아나갑니다.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전전긍긍하다가 이제는 자기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큰 집에 살면, 자신이 살고 있는 큰집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조그만 통나무 집으로 옮겨서는 이제 자신은 남들보다 더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이라고 보이는 것에 동일시합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합니다. 에고가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는 대부분 남들 눈에 자기가 얼마나 가치 있게 보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재산의 크기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평가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회의 그런 광기를 전체적으로 볼 줄 모른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 혹은 재산을 키우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면서 평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시도도 하지 마십시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사물 속에서 여러분을 발견하고자 함을 그만둘 때, 사물에 대한 집착은 그냥 사라져버립니다. 그냥,여러분이 사물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그냥 알고 계십시요. 가끔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떤 사물을 잃거나 혹은 잃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전까지, 그 사물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서 화가 나거나, 걱정이 된다면, 그건 여러분이 그 물건에 집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 여러분이 그 물건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에고의 동일시는 힘을 잃게 됩니다. 나는 그곳에 집착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그 인지이니라.이것이 바로 의식 변화의 시작입니다.

 

(번역자 주.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하므로 원문을 기재한다. I am the awareness that is aware that there is attachment. 라는 말을 attachment 에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자아, 진정한 는 집착의 주체가 아닌 관찰의 주체, 알아차림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집착은 에고가 하고, 는 이를 관찰할 뿐이다. 이 마지막 문장은 주문처럼 외워놓고 집착함을 인지했을 때마다 소리 내서 읽어보는 것도 좋다.)

 




욕망: 더 많음에 대한 욕구

 


에고는 소유와 동일시하는데, 에고라는 놈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래서 에고가 소유를 통해 느끼는 만족은 아주 얕고, 그 효과도 짧습니다. 그 내면에는 영원한 불만족, 불완전함, 혹은 불충분함이라는 느낌이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난 아직 충분히 갖지 못했어라고 말하는 에고는 사실 나 자신은 완벽하지 않아라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가진다는 것, 소유한다는 것은 에고라는 것이 그 자신을 견고하고 영원하게 만들고, 남들 앞에 나서 보이고 특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적 관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에고는 아무리 뭘 가진다 한들 이를 통해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에고라는 구조에 붙어 사는 또다른 강력한 힘이 있으니 그것은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것, 즉 욕망입니다. 더 많음에 대한 욕구 없이는 에고가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에고를 살아있게 합니다. 에고는 가지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소유함으로써 충족되었던 얕은 만족감은 늘 욕망으로 대체됩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심리 작용입니다.욕망은 진짜 필요해서 느끼는 필요가 아니라 중독적으로 느끼는 필요입니다. (번역자 주. 이번 단락은 번역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영어에서 need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당연히 요구되는 기본적인 필요를 뜻하고, want need 이상으로 과도하게 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을 번역할 만한 한국어 단어가 없다. 그래서 나는 need를 필요, 또는 욕구로, want는 욕구 또는 욕망으로 번역했는데, 욕구라는 말이 어떤 때는 need이고 어떤 때는 want를 뜻하다보니 혼란스럽다. 독자들은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말고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 바란다. 참고로 이 단락의 제목은 Wanting, the need for more이다. )

 

어떤 경우에 심리적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필요해, 불충분해라고 느끼는 것이 육체적인 수준으로 옮겨져 끝없이 배고픈 상태를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병적 기아 상태를 겪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일부러 구토를 한 다음 또 새로운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그 육체가 아니라 그 마음입니다. 만일 이런 환자들이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대신 자신의 몸에 대해 집중하고 몸과 대화하는 것을 익힌다면, 이들은 몸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에고들은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고, 그 목표를 무자비하게 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기스 칸, 스탈린, 히틀러 등 사례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욕망을 이끄는 힘은 그에 저항하는 똑같이 강한 힘을 만들어내고, 결국은 이들을 멸망시킵니다. 이들은 그 다른 사람은 물론 그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대부분의 에고는 갈등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들을 원하고, 그 원하는 것도 때에 따라 달라지며, 심지어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 모를 때도 많습니다. 에고가 원하지 않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불안함, 초조함, 걱정됨, 따분함, 불만족 등이 바로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결과입니다. 욕망은 구조적이라서, 그 심리적 구조가 남아 있는 이상 아무리 많이 가져다 줘도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원하기만 하는 에고의 사례는 에고가 계속 발달하고 있는 청소년들이나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자원을 현명하게 나누기만 한다면 전세계 모든 사람이 가진 음식, , , , 기본적인 안락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고의 욕망, 더 많이달라고 하는 이 에고의 정신나간 욕망 때문에 지구의 자원들은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서로 늘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경쟁하는, 에고가 만들어낸 저 거대기업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맹목적인 목표는 오직 이윤입니다. 이 기업들은 절대적으로 무자비하게 이윤만 추구합니다. 자연, 동물, 사람, 심지어 그 자신의 종업원들까지도 이윤 창출을 위해 이용했다가 쓸모 없어지면 내버리는, 수지계산표상의 한 점에 불과합니다.

 

, 내것, 더 많이, 난 원해, 난 필요해, 난 꼭 가져야 해, 충분하지 않아 등의 생각은 에고의 내용이 아닌 에고의 구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바뀔 수 있습니다. 저런 생각들이 여러분 내면에 있음을 알기 전까지, 저런 생각들은 계속 무의식 속에 남아 있을 것이며, 여러분은 저 생각들이 말하는 것을 계속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저런 무의식적인 생각들을 행위로 표출하게 되고, 내면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대신, 자꾸 외부에서 뭔가를 찾아보려고 헤매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이 작용하면, 그 어떤 사물도, 장소도, 사람이나 조건도 여러분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에고의 구조가 남아 있는 이상 그 어떤 내용도 여러분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 어떤 것을 얻어도 여러분은 행복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끊임 없이 여러분에게 부족함을 채워주겠다고 유혹하는 어떤 것을 찾아 헤매게 될 것입니다.





몸과의 동일시

 


사물과의 동일시 이외에 동일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 중 또 다른 하나는  몸과의 동일시입니다. 우선 에고는 몸을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자아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성별구분이 정체성이 되고 맙니다. 성 정체성은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가 강요합니다. 부모들은 남자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 여자니까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둥을 가르치기 때문에 성별구분은 단지 생물학적 구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분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걸려드는 함정과 같고, 심지어 전통사회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오히려 현대 서구에서는 그런 성별구분이 약해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어느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가장 불운한 운명은 결혼을 않거나 과부가 되는 것이며, 남성의 가장 불운한 운명은 불임인 경우라고 합니다. , 이 사회에서 인생의 단 한 가지 목적은 아이를 낳아 기름으로써 자신의 성정체성을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서구 사회에서는 몸이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약한지 강한지,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는지 추하게 보이는지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 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육체적으로 힘이 세거나 멋지게 보이거나, 건강하면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약하거나 추하거나 불완전하다고 생각될 때 자기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 심리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몸에 대한 관념이 실재와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젊은 여자들은 평균보다 더 저체중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뚱뚱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이어트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몸을 보는 대신, 그 에고가 만들어낸 나는 뚱뚱해라는 관념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뿌리에는 마음과의 동일시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과 점점 더 강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마음의 오작동이 증가했으며, 최근에는 식욕부진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만일 식욕부진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니면 자기 몸에 대한 에고의 판단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대신 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만 있다면,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몸을 내면에서 느낄 수만 있어도, 곧장 치료가 시작될 것입니다.

 

자신의 멋진 모습이나 강인한 육체, 혹은 신체적 능력과 동일시하고 잇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사라져감에 따라 금방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금새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람들의 정체성 자체가 무너질 위험에 처합니다. 신체가 멋지건 추하건 간에,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정체성을 찾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그 정체성을, 몸에 관한 심리적 이미지나 관념에 붙여 놓은 라는 생각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몸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물질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않기에 결국 썩어 없어지고 맙니다.

 

결국 늙고 헤져서 와 함께 죽게 될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결국 고통을 낳습니다. 하지만 몸과의 동일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몸을 무시하고, 돌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 몸이 강하고 아름답고 열정적이라면, 여러분은 그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한 이를 감사히 여기고 즐기면 됩니다.또한 여러분은 적절한 영양과 운동으로 몸의 상태를 개선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몸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거나 몸이 약해지더라도 그로 인해 여러분의 정체성이나 자존감이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몸이 약해지면, 형태가 없는 차원, , 의식의 빛이 형태를 잃어가는 몸을 통해 더 쉽게 빛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거나 멋짐 몸을 가진 사람들만이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많은 몸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서, 몸의 불완전성, 병듦, 장애를 마치 자아의 불완전성, 병듦, 장애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나는 환자야라고 생각하며 말하기도 합니다.아마 의사들도 여러분을 보면서 당신은 환자예요라고 말함으로써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몸에 대한 동일시를 강화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바로 이 병이라는 것에 자꾸 집착합니다. 에고가 동일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생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에고가 동일시의 대상을 한번 찾아내면 에고는 이를 쉽게 떠나보내지 않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에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병이라는 것을 통해서 강화하기 위해서 병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하고, 그런 사례도 많습니다.





내면의 몸을 느끼기

 


몸과의 동일시가 에고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를 뛰어 넘는 것도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자아는 내 몸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믿음으로써 몸과의 동일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몸과의 동일시를 뛰어넘으려면 외적인 육체, 그리고 그 외적인 육체에 대한 생각들-멋지거나 추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등-에 대한 관심을 내면의 육체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면 됩니다. 내면에서 느껴지는 살아있음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체가 겉으로 어떤 모습인지와는 무관하게, 그 안에는 힘차게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내면의 육체를 느끼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면, 그냥 눈을 감고 여러분 손 안에 생명력이 있는지를 찾아보십시요. 마음에 물어보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마음은 뭔 생명력? 난 못 찾겠는데.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마음은 야 좀 더 흥미로운 것 좀 하라고 시켜봐.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마음에게 묻지 말고 그냥 손으로 직접 가십시요. 손 안에 있는 그 미묘한 생명력을 알아차리라는 말씀입니다. 거기 있습니다. 그냥 주의력을 가지고 거기로 가기만 하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냥 손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에너지 혹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주의력을 여러분의 손에 집중하여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면, 살아있는 느낌이 더 강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감지 않고서도 할 수 있습니다.그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냥 자동적으로 내면의 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의력을 발로 옮겨 일 분 쯤 있다가, 다음에는 손과 발의 생명력을 동시에 느껴 보십시요. 몸의 다른 부분들도 차례대로 해보십시요. 다리, , , 가슴 등등. 나중에는 이 몸 전체에서 생명력이 느껴질 것입니다. (번역자 주. 몸의 생명력을 느끼기 위해 몸의 각 부분에 주의를 집중하는 방법을 요가 전통에서는 요가 니드라 yoga nidra라고 한다.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가량 바닥에 누워서 할 수 있다. 어느 부분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가르쳐주는 녹음테잎을 이용하면 더 쉽게 할 수 있다.)

 

제가 내면의 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 실재 몸이 아니라, 몸의 에너지입니다. 몸의에너지는 형태가 있는 몸과 형태가 없는 신적인 자아를 연결시키는 다리와 같습니다. 내면의 몸을 느끼는 것을 가능한 한 자주 해서 습관처럼 만드십시요. 그러다보면 눈을 감지 않고도 바로 내면의 몸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면의 몸을 느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십시요. 아주 역설로 들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면의 몸과 대화하고 있을 때, 여러분은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며, 여러분의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더 이상 형태를 가진 것과 동일시하는 것을 끝내고, 형태가 없는 것으로, , 존재로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진정한 핵심 정체성입니다. 내면의 몸을 느끼는 것은 여러분을 현재에 머물게 해주는 닻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감옥과 같은 에고로부터 벗어나는 문이기도 합니다. 내면의 몸을 느끼는 수련은 면역력을 증가시키고 몸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을 증대시킵니다.

 




자신의 본질을 잊어버림

 


에고란 언제나 형태를 가진 것과의 동일시입니다. 형태를 가진 것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다가 그 형태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형태를 가진 것은 물질이나 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적인 형태보다 좀더 근본적인 것은 의식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생각은 에너지로 구성되며, 물질보다 섬세하고 덜 응축되어 있지만, 그래도 형태를 가진 것입니다. 가끔 여러분은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는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여러분의 주의력을 완전히 빼앗아가 버릴 때, 머리 속의 소리와 그에 연관된 감정에 완벽히 동일시될 때, 여러분은 생각과 감정에 여러분 자신을 잃게 되고, 형태와 완전히 동일시되고, 에고의 손에 잡히게 됩니다. 에고란 라는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는 감정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의 결합체입니다. 에고는 형태가 없는 의식인 본질적인 자아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이 형태와 섞일 때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일시의 뜻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자아를 망각하는 것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저 존재의 근원과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을 함에 따라 우리는 갖가지 악몽을 겪게 됩니다. (번역자 주. 책 맨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잊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꾸 다른 데서 찾는 것을 인도 철학에서 마야maya라고 한다. 인도 철학에 따르면, 이런 망상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데카르트의 오류와 사르트르의 통찰력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을 세운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이 사람도 위에서 말한 근본적인 오류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는 이것을 근본 진리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그가 가졌던 질문 내가 절대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을까?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늘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존재와 등치시켰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각에서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는 에고의 근원만 발견했을 뿐이지만, 그는 이를 전혀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번역자 주.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말을 라틴어로 Cogito, ergo sum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고 한다. 그래서 철학 논쟁에서 저 명제를 코기토 명제라고 하기도 한다.)

 

데카르트를 포함한 그 이후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저 명제에서 간과한 것이 있음을 알아내는 그 이후의 어떤 철학자가 알아내는 데는 거의 3백년이나 걸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 뽈 사르트르입니다. 사르트르는 저 명제를 깊이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의식은 생각하고 있는 의식이 아니다.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음을 의식할 때, 그 의식은 생각의 일부가 아닙니다. 생각을 관찰하는 의식은 의식의 다른 차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생각과는 다른 의식이 바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의식입니다. 여러분 안에 생각만 존재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이 꿈 속의 모든 이미지를 사실이라고 믿는 것처럼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생각을 사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저렇게 살고 있습니다. 몽유병 환자처럼, 끊임없이 악몽같은 현실을 만들어내는, 그 오작동하는 마음 안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여러분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통찰력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시만 사트트르 또한 그가 발견한 것-새롭게 떠오르는 의식의 새 국면-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 생각과 동일시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평화

 


인생을 살면서 어느 순간 너무나 불행한 상실을 겪은 결과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의식의 새 국면을 경험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든 재산을 잃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자식이나 배우자, 혹은 사회적 지위, 평판, 혹은 신체적 능력을 잃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때문에 이런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한계 상황이라고 부릅시다. 사람들이 동일시했던 모든 것,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던 모든 것들이 상실되어 버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설명할 수 없이, 처음 느꼈던 심각한 공포와 분노가 사라지고 갑자기 성스러운 존재의 느낌, 깊은 평화와 완전한 자유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신의 평화라고 표현했습니다. (톨레의 주석. 빌립보서 4 7.) 사실 이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평화였으며,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스스로 물었습니다. 이런 (불행한)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이런 평화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이 일단 에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파악하고 나면 대답은 간단합니다.여러분이 동일시했던 대상,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던 형태를 가진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에고 또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에고란 형태를 가진 것과의 동일시이니까요. 동일시할 대상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면, 그럼 당신은 누구인가요? 여러분을 둘러싼 모든 형태를 가진 것들이 죽거나 사라지면, 여러분의 존재감이 이를 구속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영혼이 이를 가두던 물질로부터 해방됩니다. 형태가 없고, 모든 것에 존재하며, 모든 형태와 동일시보다 먼저 존재했던, 바로 여러분의 본질적인 자아를 깨닫게 됩니다. 의식이 동일시하는 대상이 아닌 의식 그 자체가 여러분의 진짜 정체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신의 평화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는 나는 이거야, 난 저거야가 아니라 나는 나야입니다. (번역자 주.I am 나는 나야라고 번역했다. 잘 한 번역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최선이다. 요가 노래 중에 So ham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바로 I am이라는 뜻이다. 그 어떤 것과의 동일시도 중지해버린 나 자신을 뜻하는 이 말을 읊고 있으면 진짜 나 자신이 느껴진다고 한다.)

 

깊은 상실을 겪은 모든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상실을 겪을 직후 나는 희생자, 피해자야라는 강한 정체성을 또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 때문에, 다른 사람들 때문에, 불공평한 운명 때문에, 혹은 신 때문에 피해를 봤어라고 생각합니다.그 상실이라는 사건과 함께 사라져버린 기존의 모든 정체성의 자리를 이 새로운 정체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감정들, , 분노, 후회, 자기동정 등이 차지하고 맙니다. 다른 말로 에고가 얼른 다른 형태를 찾아냅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지극히 불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신경을 안 씁니다. 왜냐면 불행하건 행복하건 에고는 동일시할 대상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새로운 에고는 그 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응축되어 있어서 깨뜨리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슬픈 상실을 겪을 때마다 여러분은 저항하든지 복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신랄해지거나 후회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좀더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지게 되고, 지혜로워지고, 사랑을 키워 나갑니다. 복종한다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인생에 대해 마음을 엽니다. 저항이란 안으로 위축되는 것을 뜻합니다. 에고의 껍질을 더 굳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이렇게 마음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는 여러분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 행동이 외부적인 저항을 낳을 것이고, 우주가 당신 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도 별로 여러분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문이 닫혀 있으면 햇볕이 들 수 없습니다. 내면에서 복종할 경우, 의식의 새로운 국면이 열립니다. 행동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다면, 여러분의 행동이 우주 전체의 뜻과 맞아 떨어질 것이고, 창조적 지능, 즉 우주적 의식의 지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면에서 문을 열 때, 여러분은 바로 그 조건 없는 의식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상황들과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협력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우연한 기적들이 발생합니다. 만일 아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면, 여러분은 평화 속에 휴식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내면의 고요함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신 속에서 쉬게 됩니다.

 




역자가 제시하는 연습문제

 


1. 인도의 깨달은 이들은 에고를 날뛰는 원숭이로 비유합니다. 에고라는 원숭이가 날뛸 때, 이를 막을 수 있을까?

 

2. 우리가 보통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미치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 톨레가 우리 모두가 미쳤다고 했을 때 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것일까?

 

3. 사물의 이름은 우리가 그 사물을 관찰할 때 어떤 역할을 하나?

 

4.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무엇과 동일시하나? 어릴 때부터 커가면서 그 동일시의 대상은 어떻게 달라지나?

 

5. 여러분의 에고는 지금 현재 무엇과 동일시하고 있나?

 

6. 자신의 에고가 무엇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

 

7.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영향을 준다면 이때 영향을 받는 나는 에고일까 아니면 진짜 일까?

 

8. 이렇게 강한 에고의 동일시라는 장막을 걷고 진짜 나가 빛나게 만들 방법은 무엇일까?

 

9. 에고의 내용과 구조란 무엇인가?

 

10. 멋진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누릴 기쁨이 아닐까? 톨레는 왜 이런 기분 좋은 일까지도 극복하자고 제안하는 것일까?

 

11. 눈을 감고 정말 진지하고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은 무엇인가요? ? 자동차? 불이 나서 집이 타버렸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좀더 현실적으로 자동차를 도둑 맞았다고 상상해봅시다. 기분이 어떤가? 톨레가 말하는 것처럼 초연할 수 있나? 아니면 자동차를 훔쳐간 사람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나? 아니면 내가 전생에 도둑질을 많이 해서 이렇게 도난을 당한다는 생각이 드나?

 

12.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려서 화를 내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그 기회를 활용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도록 도와 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13. 저에겐 아파트가 있습니다. 이 아파트를 제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법원등기부등본과 매매 서류가 증명합니다. 그런데 이게 환상이라고? 톨레는 어떤 의미에서 소유가 환상이라고 했을까?

 

14. 소유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도 톨레는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뜻일까?

 

15. 여러분은 어떤 것을 더 많이갖기를 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나요 아니면 이미 극복했나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더 많이 갖기를 원하나? 이미 극복했다면 그 증거는 무엇인가? 그 어떤 것도 더 갖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나? ? 있으니까 됐어. 사람? 깨달음은 어떤가? 깨달음을 완벽히 얻어서 죽을 때까지 맘 고생 없이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없나? 깨달음에 대한 욕망도 에고의 욕망일까?

 

16. 그 자신 욕망의 화신이면서 소비자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기업들이 지구를 잡아먹을 듯이 확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긴 해야 하는 걸까?

 

17. 비폭력대화를 지은 마셜 로젠버그는 자신과 타인의 욕구(need)를 소중히 여기고, 잘 파악해서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제안합니다. 마셜의 제안은 톨레의 제안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요? 이 두 방법은 어떻게 달리 적용되어야 할까?

 

18. 톨레가 말하는 대로 나의 몸이 나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면 요가에서는 왜 몸을 수련하는 것을 깨달음의 중요한 방법 중 하나로 여길까?

 

19. 톨레는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라는 것일까요 말라는 것일까?

 

20.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오류인 이유를 톨레의 해석에 따라 설명해 보세요.

 

21. 대지진이 발생하여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전쟁터의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생각으로만 답하려 하지 말고, 글로 적어보세요. 깨달음이란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 뛰어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이라는 장대를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22.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역경 易經의 핵심 사상은 상황에 따라 맞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공자는 중용에서 시중時中이라고 했습니다. 공자의 시중을 톨레의 복종과 비교하여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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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에카르트 톨레 A New Earth 2장 본문, 작성자 장용창

http://blog.naver.com/wkwdydckd/55091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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