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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namaste123 2009. 10. 17. 06:21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가 복원 된 후, 로마의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이 작품을 공개한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신학의 거룩한 성소"라고 말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성당으로 바티칸 궁전 내부에 건축되었다. 

 

당시 보티첼리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참여하여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를 그렸다. 이른바 화룡점정인 셈이다. 이 불멸의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16세기 작품이다. 이제 500년이나 지난 천장화를 복원해 낸 현대인들 역시 그 작업을 하면서 미켈란젤로라는 한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품었다. 세월 앞에 인간의 목숨은 부질없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작업 앞에서 우리는 경탄하기도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피에타>과 같은 조작 작품들과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을 보면 비록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 화보일지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화가가 되어 붓을 들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천장에다 그림을 그리고 불멸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올려다보면서, 이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라면서 로맹 롤랑은 그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이렇게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약간의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면 일에 파묻혀 잠도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의 동상을 만들 때, 그와 세 사람의 조수를 위하여 마련된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이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잤기 때문에 한 때 다리가 부어 장화를 칼로 찢어야만 했다. 무리하게 장화를 빼면 다리의 살점까지 함께 묻어나올 지경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있었다. 만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항상 병치레를 하면서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 해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고통의 삶 속에서도 그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초인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의 울타리인 고독에 머물러 예술 이외에는 사랑하지도 사랑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슬픔 그 자체로 살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토 시모니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미켈란젤로는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공부'를 하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했다.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를 때려가면서 아들을 훈육했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미켈란젤로의 외통수 고집을 꺾지를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수업을 받는다. 천재는 일찍 발견되었다. 스승도 그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다. 일 년 정도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그림에 싫증을 내고,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을 원해,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서 가르치던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예술가들의 후원으로도 유명한 메디치 가의 로렌초 공은 미켈란젤로를 눈여겨보았고, 그의 배려로 피렌체의 뛰어난 학자와 미술 수집품을 보고 읽어내면서 성장했다.

 

 

프랑스의 피렌체 침공과 훗날 화형을 당하는 사보나롤라 신부의 저주에 가까운 설교가 불덩어리처럼 떠돌아다니던 피렌체를 잠시 떠나 있던 미켈란젤로는 1501년 봄, 피렌체에 다시 돌아와 <다윗>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압제에 대한 피렌체 공화국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 눈에 익숙한 이 조각상은 <피에타>와 더불어 미켈란젤로가 젊은 시절에 만든 걸작이다.


미켈란젤로는 망치와 끌로 대리석을 조각하여 '물질 안에 속박되어 있는 개념'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에서 얻어온 대리석 덩어리를 응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 그는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내는 것이다.

 

모니카 지라르디는 이렇게 미켈란젤로의 조각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미켈란젤로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동시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했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조각 이전에 행해지는 형태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직관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대리석에 숨겨져 있는 형태를 미리 예견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냈다."


 

르네상스의 두 거장의 만남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보다 20년 연상이다.) 1504년 피렌체 정부는 이 두 천재로 하여금 팔라초 베키오의 대회의실의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했다. 5월에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의 전투>의 구상에 착수했고, 8월에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맡았지만 두 사람 다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두 거장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이 계획이 무산된 것은 신이 두 천재 중의 작품을 한 자리에 놓아두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미켈란젤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황의 지시를 받아 작업을 했다. 그 중에서도 율리우스2세와의 관계는 미묘했다. 두 사람은 마치 형제처럼 다정했다가 불화가 반복되는 그런 관계였다. 천재에게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질투하는 예술가들의 이간질로 교황과 사이가 틀어져 바티칸 궁을 떠났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율리우스 2세는 청동의 주조법을 모른다는 미켈란젤로에게 청동 동상을 주문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다시 한다.' 라는 심경으로 청동 주조법을 배워 동상을 제작하다 실패를 하기도 한다. 어느 날,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벽화의 기법을 전혀 모르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한다. 아니 명령한다.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이 천재를 질투하던 브라만테가 교황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를 추천한 것으로 본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고, 이 작업으로 위대한 그의 명예가 실추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같은 해에 역시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려서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 주문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일종의 시험이자 시련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를 추천하면서 자신은 빠져 나오려고 했다. 미켈란젤로만큼 외고집이었던 교황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 1508년 5월 10일 이 역사적인 작업은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가 천재의 90년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숭고한 세월'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시절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벌써 일 년이나 교황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너무나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이 늦어지는 것은 이 일이 어렵고 내 본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만 자꾸 헛되이 지나갑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그림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그에게 가정적인 문제도 어려웠다. 자꾸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동생들과의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결핍, 건강 문제 등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은 절망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예술가의 고통은 바로 감상자의 희열이 된다는 진리를 증명이라고 하듯,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는 1512년 11월 1일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작품이 진행 중일 때 교황은 언제 작업이 끝나느냐고 물었다. 미켈란젤로는 '완성되는 날에 끝난다.'고 대답해 교황이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화를 내자, 미켈란젤로는 즉시 집으로 뛰어가 로마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고 한다. 아차 싶은 율리시스 2세는 급히 사자를 보내 사과하고 돈도 챙겨주어 미켈란젤로는 못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또 이런 일이 반복되곤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스티나의 일이 끝나자 율리우스 2세도 선종했다. 

 
이 천장화와 더불어 시스티나 성당에는 벽화 <최후의 심판>이 있다. 1533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묘의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의뢰를 해온 것이다. 클레멘스 7세가 세상을 떠나자, 1535년 파울루스 3세가 다시 이 작업에 대한 명령을 내려 <천지창조>에 이은 <최후의 심판> 작업이 시작되었고, 역시 엄청난 노력으로 1541년에 완성되었다. 이제 60대의 미켈란젤로는 심신이 파김치가 되었다.

 



시인 미켈란젤로의 마음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마치 굶주린 자의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을 때, 길에서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면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일시에 가라앉지요.





 

미켈란젤로가 지은 시이다. 사랑에 빠진 사내의 절절한 심경이 잘 보이는 시이다. 이외에도 힘들 때, 즐거울 때, 그는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구애를 한 대상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생을 슬픔과 친구하면서 살아간 이 고독한 사람의 연약한 마음이 잘 보인다. 물론 그의 조각이나 그림에는 비장한 사상만이 들어있다. 


미켈란젤로는 시 작업과 서간문을 통하여 예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쓰고 또 썼다. 1486년부터 1563년까지 500여 편의 편지를 써서 조각이나 그림으로는 담아내지 못했던 마음까지도 담았다. 특히 1546년 이후에는 시집 출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미켈란젤로의 만년의 시들은 종교적인 경건함과 성스러운 믿음의 마음이 잘 드러났다고 한다.


 

 

 

 


그의 조각, 회화, 이탈리아 최초의 공공 도서관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건축 등 수많은 그의 작업 중에서 성모에 대한 작업은 일관된 것이었다. 젊은 시절 부조 작품에서부터 산 피에트로의 피에타, 브뤼헤의 성모, 그리고 만년의 피에타 작품에 이르기까지 미켈란젤로의 예술 인생에 끝과 시작을 같이 한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 작업을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모성은 '마테르에클레시아(교회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개념)'을 강조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주조를 이루던 테마였다. 드 톨네이는 '인간의 영혼은 삶의 이상을 숙고함으로서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축복에 도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모가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성모는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데, 이러한 묘사는 구약시대부터 젖은 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생명의 본질이었으며, 신약시대에 이르면 젖은 믿음과 신앙의 바탕을 상징한다. 젖을 먹이는 성모의 모습을 통해 신에 의한 인간의 구원의 가치는 현현되며, 신의 한없는 은총과 가련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미켈란젤로의 폭풍우와 같은 인생은 고요한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534년 9월 도망치듯이 피렌체를 떠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마에 머물렀고 고향이 아닌 로마에서 죽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운 피렌체의 환영을 다시 보았다. 롤맹 롤랑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쓴다. "그것은 2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5시경이었다. 날이 저물었다….'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과 평화의 왕국의 첫날이…' 마침내 그는 휴식을 얻었다. 오랜 소원을 이루어 드디어 시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상이 미켈란젤로의 성스러운 고뇌의 생애이다. - 이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


미켈란젤로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조각은 '론다니니 피에타'이다. 1547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중단과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조각을 보면 예수의 모습이 성모의 신체 안에 갇혀 있어 마치 한 인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전에도 미완성으로 남긴 조각들이 여럿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미완성은 미완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덜 깎아낸 돌에서 몸부림치는 <포로>와 작은 조각들은 인간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 는 성모와 예수을 통하여 신과 인간, 여성과 남성,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진다. 미켈란젤로의 90년 세월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의 세월이었지만, 그의 작품으로 우리는 환희와 희망과 사랑을 보고 감동하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의지를 마음속에 품게 된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책은 평전을 비롯해 풍부하게 나와 있다. 우선 시스티나 성당화와 관련하여서는 <미켈란젤로 미술의 비밀 (질송 바헤토 | 유영석 | 문학수첩)>을 추천한다. 미켈란젤로의 대작 속에 감추어진 비밀 속으로 깊이 있게 안내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천지창조>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어가며 해부학자 미켈란젤로를 소개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매우 잘 읽힐 것이다.


 

그리고 글항아리에서 낸 조반니 파니니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전 2권)>를 소개한다. 역자인 정진국 씨의 노력도 돋보이는 이 책은 유럽권과 영미권을 합쳐 20세기 서구 지성사가 배출한 전기문학의 가장 독창적인 고전 중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예술가의 전기 분야에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미술사와 미학적 감상에 충실한, 그에 더해 전기문학 자체의 인생을 꿰뚫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책은 정말 드문 작업이다.


그리고 생각의 나무에서 낸 안톤 질의 <미켈란젤로 (피렌체, 다비드상, 1492~1504)>는 인물의 전성기에 초점을 맞추고 시대 상황과 역사적 배경까지 널리 담아내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 책이다. 즉 미켈란젤로의 출생부터 초기 걸작 <다비드>를 완성하던 서른 살 청년 때까지 그의 삶과 미술적 성취의 궤적을 짚어가면서, 르네상스의 중심에서 한껏 전성기를 만끽하고 있던 그의 고향 피렌체의 역사, 그 피렌체에서 최고의 권력을 거머쥐고 영화를 누리던 메디치가의 파란만장한 이력을 함께 엮어내었다. 이외에 로맹 롤랑의 미켈란젤로의 생애는 문고판으로 나와 있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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