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24일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한 아름다운 남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에 관한 소문과 평판은 다양했다.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린 당대 최고의 미남,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않은 보헤미안, 술과 마약에 중독된 결핵 환자, 인간의 내면과 꿈으로의 상승 의지를 그린 독특한 화가 등. 그는 바로 당대의 풍운아 모딜리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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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는 수많은 여인을 만났지만, 최후에 약혼녀가 된 잔느 에뷔테른느는 어떤 여자와도 달랐다. 잔느는 모딜리아니에게 그 어떤 계산도 없는 순진무구한 사랑을 바친 유일한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파리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잔느의 우아한 자태와 잔잔한 미소를 보고 모딜리아니는 즉각 사랑에 빠졌다. 모딜리아니가 사랑을 고백하자 수줍음 많은 소녀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가진 미남이었을 뿐 아니라 정열적인 화가로서 뭇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점차 열렬한 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저주였음을 확인했을 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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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3월 모딜리아니와 잔느는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니스로 옮겼고, 11월 29일에는 잔느가 첫딸을 낳았다. 이 시기에 모딜리아니는 얼마나 행복했던지 아기들과 소년, 소녀들을 주로 그렸다. 가난했지만 두 사람은 함께 견딜 수 있었고, 잔느는 1919년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다. 1919년 7월 7일, 그들은 증인을 앞에 두고 결혼할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썼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도 난로를 피울 수 없자 잔느는 친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잔느가 그리워질 때면 잔느의 집으로 가곤 했다. 커다란 집 밖에서 아무리 잔느를 불러본들 안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었다. 잔느의 부모가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통제했던 것이다. 그럴 때면 모딜리아니는 문 앞에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1920년 1월 건강이 악화된 모딜리아니는 여러 날 바깥 출입을 못했다.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화가 오르티스 데 사라테와 함께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초죽음이 된 모딜리아니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1월 22일 파리 자선병원에 입원한 모딜리아니는 입원 이틀 만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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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죽음은 예술가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후배 화가 키슬링은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양친과 로마에 있는 사회당 국회의원인 형 엠마뉴엘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형은 키슬링에게 전보를 보내 “그를 왕족처럼 매장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모딜리아니의 죽음이 잔느에게도 전해졌다. 그녀는 시체 안치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날 잔느는 자신의 집 6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은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장엄하게 치러졌고, 1월 27일 모딜리아니의 시체는 영원히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3년 후 모딜리아니의 무덤은 문을 열고 잔느의 시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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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는 잔느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잔느 에뷔테른느. 1889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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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비극적인 사랑이 어쩌면 모딜리아니의 삶을 신화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 책을 쓴 도리스 크리스토프는 “모딜리아니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삶을 미화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부드럽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이 이름은 비극적이며 시적인 소설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어쩌면 늘 불꽃 같은 상상력을 지니고 살았던 모딜리아니라는 인물을 생각할 때 차갑고 묘사적인 세계보다는 몽상과 시의 세계를 습관처럼 떠올리는지 모른다.” 시인 앙드레 살몽은 모딜리아니의 삶을 “청년 시절부터 결핵에 걸려 있었으며, 알코올과 하시시에 심한 고통을 받고 너무나도 불규칙한 식사, 안락하지 못한 생활을 산 남자, 동물적인 열광의 순간이 찾아오기까지 잔혹하게 반성하는 무서울 정도로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요약하고 있다. 실로 그의 삶은 고요한 수면을 견디지 못하고 항상 끓어 넘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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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7월 12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의 신흥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리보르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는 은행가였지만 아메데오가 태어날 무렵에는 파산에 직면해 있었다.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다눈치오의 시를 번역할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어머니의 개방적인 성격과 지적 소양은 아메데오를 예술 세계에 입문케 하는 데 기여했다. 어머니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이 어린아이의 영혼 속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잠자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예술가가 아닐까?” 아들의 재능과 꿈을 한껏 존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는 구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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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미술공부를 처음 시작한 모딜리아니가 16세 생일을 맞이하면서 지독한 병마에 시달리자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1900년에서 1901년 사이의 겨울을 나폴리, 카프리, 로마 등 기후가 따뜻한 이탈리아 남부에서 보냈다. 이후 모딜리아니는 피렌체, 베네치아 등에서 이탈리아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했다. 모딜리아니는 1906년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르에서 살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청년이었던 모딜리아니는 파리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센느 강 옆의 안락한 호텔에 거주했다. 우아하고 위트 있고 멋진 차림의 그는 금세 인기를 얻었다. 그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 데생 수업을 듣는다. 이 무렵 모리스 위트리요와 알게 되어 죽을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가을에는 독일 출신의 화가 루트비히 마이트너를 알게 되었는데, 마이트너는 그를 ‘최후의 진정한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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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는 1908년 처음으로 앙데팡당 전에 <유대인 여인> 등 회화 6점을 출품해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는 병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예술가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 1909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한동안 조각에 몰두한다. 1912년 조각가 자크 립시츠와 제이콥 엡스타인을 알게 된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 수틴, 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는다. 이 무렵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관능적인 몸짓과 표정에도 불구하고 조각 같은 면모를 지니게 된다. 그의 누드는 관능성을 전면에 부각하지 않고 비장함과 차가움을 내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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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모딜리아니는 친구 즈보르스키의 도움으로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의 화랑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개인전을 연다. 베르트 베이유는 새로운 그림을 좋아하는 미술 애호가였다. 그녀는 즈보르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모딜리아니의 아름다운 누드 두 점을 쇼윈도에 걸었다. 그 그림들은 통행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지만, 그들 중에는 그 구역 경찰관도 있었다. 그 경찰관은 이들 두 장의 그림을 철거할 것을 명했다. 초장부터 김이 샌 전시회는 기간도 단축되어 모딜리아니는 편안한 생으로의 전환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그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평생 성공을 모른 채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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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목에 긴 얼굴, 선이 분명한 얼굴에 꿈꾸는 듯한 표정, 모딜리아니가 그린 인물들의 내면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듯하면서도 두터운 베일에 싸여 있기도 하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속된 감정과 신비로운 꿈이 동시에 들어 있다. 보들레르가 인간의 우울과 이상을 동시에 그리려고 했던 것처럼, 랭보가 감각을 활짝 열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를 들여다보려고 했던 것처럼, 모딜리아니는 감각적인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감각 너머의 세계를 그렸다.
조각가 자크 립시츠는 모딜리아니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예술은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한 결과물이다. 작업할 땐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고,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데생을 계속했는데, 이미 그린 것을 수정하는 법도 없고 한 순간도 생각하느라 멈추는 법도 없었다. 곁에서 보기에 완전히 본능적인 확신과 넘치는 감수성으로 작업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의 이탈리아적 기질과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애착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역동적인 생의 약동과 신비가 조화를 이룬다.
몽파르나스 예술가들의 전설을 쓴 프랑시스 카르고는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문에서 이렇게 썼다. “결점과 미덕, 불행과 이상적인 것에의 경도, 우아함과 장난기…… 이들 모든 것의 보상으로 모딜리아니는 채워질 수 없는 공허를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
‘채워질 수 없는 공허’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꿈꾸었던 것과 유사할지도 모르지만, 모딜리아니는 그것이 종교나 철학의 세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듯하다. 그의 그림은 매우 육체적이다. 모딜리아니가 꿈꾸는 아름다움의 정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우수와 같은 것이며, 그로부터 솟아오르는 꿈과 생명의 신비로운 위안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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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어린 모딜리아니는 리보르노 미술학교의 친구 오스카 길리아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기를 원해. 난 지금 나 자신에게서 끝없는 창조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어.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아올라.” 모딜리아니가 어린 시절부터 예술을 통해 꿈꾸었던 세계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모딜리아니가 꿈꾸었던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상의 세계만을 그릴 때, 그것은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천상의 소리가 될 수도 있다. 모딜리아니는 잔느 에뷔테른느 같은 이상적인 대상에게서 우수를 들여다본다. 꿈과 우수와 위안의 절묘한 조합, 그것이 모딜리아니가 약 2년 동안에 폭발적으로 그려낸 잔느를 모델로 한 그림의 진정한 힘이다. 모딜리아니의 강렬한 색채와 선율이 발산하는 우울과 이상의 꿈에 동시에 젖는 밤, 모딜리아니와 잔느가 죽은 1월 24일과 25일의 밤, 모딜리아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밤을 맞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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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살몽의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다빈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그의 비극적인 삶과 함께 화가들 중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이다. 다소 신화화된 이 인물에 대해 모딜리아니의 절친한 친구 앙드레 살몽은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와 취재를 통해 모딜리아니의 삶을 객관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했다.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면서도 극적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소설처럼 쉽게 모딜리아니의 삶에 접근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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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와 동시대를 살았고 그와 눈길을 주고받았던 친구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 “우리들의 화환과 우리들의 꽃다발에, 영광이 찬연히 빛나는 종려나무 가지 하나를 더해 바치노라”라고 적혀 있는 마지막 책장을 덮는 마음은 한결 젖어 있게 된다. 1부는 모딜리아니의 출생에서 본격적인 예술가가 되기 위해 고투했던 몽마르트르의 생활까지, 2부는 몽파르나스에서 만난 여러 예술가들과 그들에게 받은 영향을 정리하면서 당시 모딜리아니의 심경을 그려냈다. 마지막 3부는 1914년 영국 시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와의 만남과 최후의 연인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사랑,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까지를 다루었다.
도리스 크리스토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마로니에북스) 모딜리아니의 작품세계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까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넘치는 정열과 아이디어를 주체하기 위해 예술 세계로 뛰어든 모딜리아니의 정열적인 삶과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섬세한 해설은 깊으면서도 활달하다. 모딜리아니가 교류했던 예술가들과 모델, 또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이 그림과 화보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 책에 따르면 모딜리아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 오직 그림으로만 표현했던 모딜리아니의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정신을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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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