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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

1. 르네상스의 의미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이며, 14세기 초부터 시작된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부활을 말한다. 1860년에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이 말을 단순한 고대 학문과 예술의 부흥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전 분야에 걸친 문화 혁신 운동이라고 넓게 해석함으로써 르네상스는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까지 확대되어 근대적인 성격이 강조되었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미약하나마 중세에도 존속하였으나, 14세기경부터 고전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래서 종교적인 중세문화는 다른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근대 문화가 탄생되었다. 르네상스는 단순한 고전 문화의 부흥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근대 문화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

2.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

*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
* 자유분방한 예술적 독창성
* 개인적 예술 후원자 등장(Art Patron)
* 예술에 대한 관심의 대중화
* 예술가의 지위 상승, 작가의 개성·주장 강조, 예술가의 긍지 고양
* 주제는 비종교적인 내용과 종교적인 내용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 등

3.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

유화개발, 원근법, 인체해부학의 연구로 인한 인체 묘사의 발전 그리고 사실적 자연주의 양상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원근법의 적용은 근대적인 회화 기법상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여 조각에도 그 영향을 미쳤고, 3차원적 묘사가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원근법은 근대적 성격을 확립할 수 있다.

또한, 원근법이 회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어 색채와 구도의 다양성을 띄게 되어 각 지방마다 고유한 화파(유파) 즉 피렌체, 베니치아화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원근법은 기하학적 계산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자주 사용되는 선 원근법과 북방의 여러 나라, 특히 저지대 지방에서 자주 사용되는 대기 원근법으로 나뉘어 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경우, 그것은 일반적으로 두 시기의 미술로 나누어진다. 초기 르네상스(14~15세기)와 전성기 르네상스(15세기말~16세기 전반기)가 그것이며, 전성기 르네상스는 1490년대 초반에서 로마가 제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1527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객관적 사실주의를 지양하여 한층 더 높은 주관과 객관의 융합으로 형성된 품격 높은 고차원적인 고전적 예술로 향하는 길을 연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특히 1480년~1520년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고전적」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 위대한 미술의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거니와, 그리고 그 주역이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이다

 
미켈란젤로

1. 예술가로서의 미켈란젤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1480년에서 1520년 사이에 위대한 미술의 개화기를맞이하게 되고, 그 주역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단순히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가장 완전한 구현자로서 이른바 '만능의 인간'의 한 전형이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20)는 예술은 과학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 활동이요, 그 창조는 신의 창조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플라톤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타고난 조각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힘이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서 어떠한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은 천재였다. 회화는 조각의 입체성을 모방하는 것이며, 건축 또한 인체의 유기적 성질을 지녀야 한다라고 믿었던 그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표현의 최고 매체라고 생각하였다. 고전 조각에 관심이 많았으며, 당시의 대가들 중 지옷토, 마사치오, 도나텔로 등을 찬양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매한 정신성의 세계를 구현했다면 미켈란젤로는 격정과 힘찬 의지의 예술가이다. 회화를 한낱 환각의 세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스스로 평생 조각가이기를 원했던 그는 그만큼 강한 조형력의 소유자요, 그의 고전적 사계는 한마디로 숭고한 인간성의 형상화로 요약된다. 그 숭고함에는 힘찬 역동감과 극적인 위풍이 따르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의 조각에는 인간적인 본능의 힘과 균형에의 조형 의지가 공존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서의 명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다윗'상만 하더라도 그 젊음에 찬 긴장된 늠름함에는 인간적인 이상미와 야생적인 생명력이 동시에 약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미와 야생적 생명력의 긴장된 공존, 다시 말해서 이 양자의 균형 잡힌 조화에 의한 고전적 세계는 만년에 가면서 또 다른 양상에로 이행해 간다. 그 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두 피에타, 곧 초기의 피에타와 만년의 피에타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그것을 두고 이미 우리는 고전주의를 논할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힘찬 구상력과 그것이 내뿜는 격렬한 감동의 세계, 그것은 16세기 후반기의 매너리즘 너머의 새로운 영역, 즉 바로크의 세계를 앞지르고도 남음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또 하나의 업적인 벽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조각가로서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의 천부적인 역량을 과시한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회화 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 하나는 그 때까지의 고전적 관례를 깨고 화면에 대각선과 소용돌이형의 구도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화면을 일단 각기 저마다의 설화를 중심으로 여러 단위의 부분으로 분할하고, 그것을 다시 총체적인 단일 테마로 통일시키고 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화면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며, 바로 그와 같은 혁신이 그로 하여금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로서의 위치를 누리게 하고 있다.

2. 미켈란젤로 이전의 조각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시기적으로 15세기 초에서 16세기 말에 걸쳐 보여지는데 그 초기가 1420년경에서 1500년경이다.

르네상스의 새 기풍은 고딕 후기의 자연주의에 의해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다시 그 현실의 양상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고대의 유물 연구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므로 결코 단순한 고대의 모방은 아니며, 직접적인 대상은 어디까지나 현실 그것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조각 및 회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도나텔로는 진정 15세기 르네상스의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조각가로 건축의 브르넬레스키, 회화의 마사치오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진정한 개척자이며, 그 생기발랄한 자연 관측, 힘찬 생명감, 개성 묘사의 예리함에 있어 15세기 특유의 사실적인 경향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일찍이 로마에 가서 고대의 유물을 열심히 연구하고 거기에서부터 그의 조각의 길을, 즉 르네상스의 방향을 확실히 자각하였다. 이 세기의 조각가들은 크건 작건 간에 그의 영향을 받고 비로소 신시대의 사실주의의 조각이 어떻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발전적 방향을 잡았던 것이니 도나텐로야말로 미켈란젤로 이전의 르네상스 최대의 조각가라고 할 수 있다.

3. 미켈란젤로의 예술 세계와 조각의 독자성

조각의 세계에서의 16세기의 대표자이며 종합자는 미켈란젤로이며 그의 역량과 존재가 너무나도 뛰어나 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진 조각가들도 모두 그의 영향과 존재의 그늘에 가려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야말로 16세기 이탈리아 조각의 전부이며 상징이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정신이 일제히 중세 봉건의 세계로부터 눈을 떠서 인간 개인의 힘과 지성이 크게 발전한 시대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온갖 의미에서의 힘과 힘과의 경쟁이 전개되었으며 또 미지의 것에 대한 발견, 중세 시대에 경시되고 있던 것에 대한 재인식에 쏟는 정열과 노력도 급격히 높아 갔다. 그래서 성숙한 인간의 능력이 그 전개를 억제당하고 있던 낡은 제도나 조직에 대한 반발이며 작이어서 인간의 능력이 이만큼 격동하고 이만큼 힘차게 진전한 시대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왕성한 인간의 발전 속에서 나온 최대의 인간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였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웅대하면서도 심오한 이상주의이며, 힘과 정열과 거대함과 궁극의 상을 본 인간상이다. 더욱 그의 깊은 주관성과 격렬한 내적인 힘의 강조는 레오나르도에 의해 대표되는 전성기의 예술에 직접 연결됨과 동시에 16세기 이탈리아 조각의 전형이 되었고 지배력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굉장한 역동감에 찬 초기의 '다윗'상,중기에서 원숙기에 걸쳐서 법왕 율리우스 2세의 묘를 위해 만든 깊은 지혜에다 비분강개의 정을 담은 거대한 '모세'의 상, '노예'상, '메디치가 예배당의 조각' 등이 가장 유명하다.

이와 같은 미켈란젤로의 출현 때문에 다른 많은 조각가들의 존재는 역사상 아예 가려져 있다. 그들은 가령 미켈란젤로에 압도당하기는 했어도, 혹은 의식적으로 반발하였다고 해도 어떻든 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시대의 추이 속에서 더욱 격정적인 동세로 바뀌어 간 것처럼 16세기의 이탈리아 조각가 전체가 그런 길을 걸어서 고전적인 명쾌함에서부터 보다 현실적인 복잡함으로 바뀌어 갔다.

1499년에 완성한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걸작이며 그의 여러 피에타상 중 가장 초기의 것으로 해부학적인 정밀함과 우미한 고전적 품격을 고루 갖춘 2인상이다. 그리고 ' 다윗'상은 도나텔로의 영향이 보이는 나체의 남성 입상으로 체구와 근육의 율동을 통해 생생한 현실감을 나타내고 있다. 벨기에의 브뤼쥐 대성당의 '성모자'는 앞시대의 성모자가 가졌던 온화한 유희성이 비감을 띠어 여기서는 성모의 얼굴이 우수에 차 있는 모습이다.     육체는 의상에 의해 완전하게 표출된다. 또한 '모세'상은 1505년에 만든 대리석 거상인데 좌상 조각이며 당시 "무서움"이라 일컬어지던 힘을 풍기고 있다. '승리'상은 극단적인 신체의 비꼬임을 보여 준다. 두부는 신체보다 훨씬 작고 그 우미한 인체의 비례가 매너리즘적인 인상 표현의 특징이다. 매너리즘 고뇌는 미켈란젤로 후기의 '피에타' 세 작품과 초기의 청동제 작품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불신과 회의의 시대에 산 열렬한 그리스도 신자인 미켈란젤로는 그가 만든 조각의 상들 속에 자신의 환멸감과 좌절감을 불어넣었다. 초기의 군상은 고전적인 작품이며 전성기 르네상스적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시대가 지나서 '피렌체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그리고 만년의 작품인 '론다니니의 피에타'에는 고전 형식의 부정과 육체나 물질의 공허함과 취약함에 대한 체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이들 작품에 병행하여 만들어진 그의 시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조각이나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많은 걸작을 남긴 미켈란젤로의 혼은 마지막으로 '피에타'에 담겨져 있다.

미켈란젤로 에술의 독자성은 전성기 르네상스 최초의 공공 기념적 조각인 '다윗'에 잘 드러나 있다. 정면으로 세계를 투사하듯 바라보는 건강한 젊은이의 나체는 정의와 숭리의 이상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밖에도 '모세', '피에타', '메디치가의 묘지 조각' 등이 유명하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면의 감정을 가득 담고 있는 근육적인 헬레니즘 조각 등에 심취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양감적인 독특한 형상을 이루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특질은 그의 회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인 '천지창조'의 인물 형상들은 나체의 근육적 표현을 잘 보여 준다. 건축적인 틀 속에 수백 명의 율동적인 인물이 묘사되어 있는 이 천정화는 그의 뜻대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인다. 그 후 25년이 흘러 제단 위 제면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지게 된다. 당시의 서구 세계는 종교 개혁의 정신적,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최후의 심판'에 표현된 음울한 광경은 그가 겪은 시대적 위기감을 극적으로 드러낸 듯하며, 천지 창조의 생명력 있는 표현과 대조적으로 비극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가죽이 벗겨져 처형당한 인물의 모습이 미켈란젤로의 얼굴로 표현되어 있어서 예술가로서의 무가치함에 대하여 자조적인 고백성을 그리고 있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그는 브라만테가 착공한 '성 베드로 성당'을 완공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미술이 미친 영향

한 시기의 미술이 그 고전적 양식을 완성했을 때, 다시 말해서 이상화된 전형으로서의 고전 미술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후대의 미술에게 있어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파노프스키)"가 된다. 그것은 곧 미술의 전개 양상이 하강선을 긋는다는 말이며 그 예증으로서 우리는 두 시기의 위대한 고전 시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그리이스의 전기 고전 시대에 뒤이은 후기 고전 시대와 전성기 르네상스의 뒤를 이은 매너리즘이 그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후기 고전 시대와 매너리즘 미술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바로크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17세기, 그리고 18세기를 풍미한 로코코 미술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의 신고전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독특한 고전주의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기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사이에 가로놓인 시대적 거리는 반드시 고전주의 전통의 단절 내지는 공백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다. 이는 특히 프랑스의 경우가 그러하다. 프랑스에 있어서의 르네상스, 다시 말해 원래 의미의 고대 부흥은 17세기에 와서 꽃피게 되며, 이 세기의 프랑스 미술은 뒤늦게 합리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고대의 재발견, 즉 형태와 주제를 포함하여 고대를 규범으로 삼는 고전주의 미술을 가꾸어 간다. 그리고 합리주의와 고전적 세계는 불가분의 함수 관계에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프랑스 미술의 기조 자체가 고전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항성, "서양미술사"     
이경성,"미켈란젤로"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       
윤재우,"근대회화사"
폴포르, "르네상스"        
차하경,"르네상스 사회와 사상"
J. Burckhaardt, 정운룡譯"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