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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생애와 작품세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는 그 당시에도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대단한 시기였고 현 시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기를 일반적으로 두 시기의 미술로 나누는데 초기 르네상스시대(14∼15세기)와 전성기 르네상스(15세기말∼16세기 전반기)가 그것이며, 전성기 르네상스는 1490년대 초반에서 로마가 제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1527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객관적 사실주의를 지양하여 한층 더 높은 주관과 객관의 융합으로 형성된 품격 높은 고차원적인 고전적 예술로 향하는 길을 연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대자연의 흐름 속에서 하늘은 사람들에게 가끔 위대한 선물을 주시는데, 어떤 때에는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재능을 단 한 사람에게만 엄청나게 내리실 때가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마치 神같이 행하여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의 몸매의 아름답기란 아무리 칭찬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그의 행동은 우아하며 깊이가 있으며, 훌륭하기 비할 데 없다. 그의 능력은, 마음먹은 것은 모두 해결하였다. 그의 정신은 高邁하였으며 성격은 매우 너그러워서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으며, 그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을 3대 거장이라 하였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최초의 거장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인데 그는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만능의 천재였다. 그는 그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항공학·동물학을 포함한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빛을 던진 과학자이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회화에서의 천재성을 발휘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의 세계. 그리고 이에 앞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도록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 ( Leonardo da Vinci : 1452∼1519 )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레오나르도의 일생은 그렇게 주홍빛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의 노년에 그린 자화상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인생의 역경을 간직한 듯한 그의 잔주름과 무엇에 대한 또렸한 응시가 없는 그의 눈빛처럼 그의 일생은 그렇게 자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공증인이자 지주였던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엠폴리 근처의 빈치에 있는 부친의 가족 소유지에서 1452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젊은 시골 여인으로, 출산 후 곧 그 지역 출신의 공예가와 결혼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적자 대우를 받으며 그 당시의 초등교육에 속했던 읽기·쓰기·산수를 배우며 자랐다. 정통 학문의 주요 언어였던 라틴어는 훨씬 나중에야 본격적으로 공부했으며 30세가 되자 비록 초보단계에 머물렀지만 고급 기하학과 수학이론에 전념했다.
① 제 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1466년 14살의 소년 다 빈치는 유명한 화가 베로키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았으며, 엄격한 사실주의 기법을 터득하였다. 스승 베로키오의 작품「그리스도의 세례」에 다 빈치가 그린 천사가 스승보다 더욱 뛰어 나자, 제자의 천재성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The Adoration of the Magi」에서는 마돈나를 중심으로 구도를 잡고 그를 정점으로 하는 삼각형 구도와 걸맞추어 안정되게 표현한다.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는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지네브라 데 벤치」,「마돈나 베아노」에서 그의 치밀한 사실기법은 명암법에 스푸마토(Sfumato: 공기원근법)를 병용함으로서 완성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풍은 엄격한 사실에서 깊은 정신세계를 발견 할 수 있다.
② 제 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레오나르도의 고전 예술은 사실상 제 1차 밀라노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는 그동안 축적된 그의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이다. 1482년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의 지배자 스포르차의 궁정에 머물며 수많은 걸작을 완성했다. 밀라노에서의 제작에서는 15세기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졌다. 극적인 내용 표현을 위하여 구도는 빈틈없이 계산되고 주관적 정신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표현되어 지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2차원적으로 나타낼 때 자유로운 상상의 작용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그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을 요구했다. 즉 입체의 형태, 상대적인 위치, 조명, 색, 비례, 구조, 그리고 자세는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어야 했다.「최후의 만찬」은 객관적 사실과 정신내용을 훌륭하게 융합함으로서 다음 세기 고전양식을 이미 완성하였다. 또한 과학 연구와 저술에 힘쓴 시기이기도 했다.
③ 제 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공격해 오자 피렌체(Florence)로 돌아 왔다. 이 시기에 그는 「모나리자」를 제작하였고, 특히 과학연구에 몰두한 시기이다.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이며, 일반인들에게 초상화에서 단연 으뜸으로 떠오르는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정작 작품의 감상보다 집중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이사벨라 데스테 후작 부인의 상을 그리고, 그 화고를 가지고 1500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소 풍만하게 보이는 모나리자는 이미 30을 넘은 나이로 생각된다. 그 당시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가는 허리과 작은 얼굴, 가는 목의 여성들의 기준에 반하지만 여성의 신비스러운 미소, 빛나는 눈, 볼의 명암과 흐려지는 배경의 조화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때 이미 다빈치는 류마티즘과 오른손 마비로 주위의 섬세한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왼손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나가며 「모나리자」,「성요한」,「암굴의 성모」와 같은 아름다운 작품들로 자신의 집을 장식해냈다.
④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년)
제 4 시기는 1506년에서 1513년까지로, 제 2 밀라노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암굴의 성모」를 완성하였고,「 성 안나」 등의 제작에 착수하였다.「성 안나」 그의 예술의 귀결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과학연구, 특히 水流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⑤ 프랑스 시대(1513∼1519년)
제 5 시기는 1513년에서 19년까지로, 로마·앙부아즈 시기이다. 1513년에 로마에 체재하다가 1516년 프랑소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건너가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앙부아즈의 궁정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겼으며, 운하 설계나 궁정설계를 지휘하면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관련된 일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르피에로 다 빈치가 별장에서 기거할 무렵, 소작인이 농장에서 쓰러뜨린 무화과 나무에서 손수 조그마한 원형 방패를 만들었다. 농부는 피에로에게 피렌체에 나가면 아무에게나 방패에 그림을 그려주도록 부탁하였다. 이 농부는 새도 잘 잡고 물고기도 잘 낚으며, 매우 쓸모있는 머슴이었으므로 피에로는 쾌히 승낙하였다. 피에로는 방패를 피렌체에 가지고 가서 아들에게는 누가 부탁하더라는 말도 없이, 거기에 무엇이든 그리도록 하였다. 어느날 레오나르도가 방패를 손에 쥐고 보니 뒤틀어지고 아주 볼 품이 없었다. 그는 방패를 불에 가열하여 바로잡은 후 수리공에게 보내서, 표면에 석고 바탕을 칠하여 매끈하게 만들었다. 레오나르도는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던 끝에 메두사(Medusa)의 머리를 보고 깜짝 놀라 무서워하는 효과를 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혼자 방에 들어앉아, 도마뱀·귀뚜라미·뱀·나비·메뚜기·박쥐 그 밖에 기이한 동물들을 뒤섞이게 그리고 독을 품어내며 공기를 불꽃으로 변하게 하면서 거무스름한 바위 틈에서 기어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벌린 목에서 독을, 눈에서는 불을, 코에서는 연기를 뿜어내는 기괴하고도 무서운 동물들이었다. 이 그림을 제작하는 동안, 방안에서는 죽은 동물의 惡臭가 나와 가득 찼으며, 그 악취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을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견디어낼 수 있었다. 아버지와 촌부가 방패 일을 이미 잊어버렸을 무렵에 레오나르도는 겨우 그림을 완성하였다. 어느날 아침 피에르가 레오나르도를 찾아가, 방문을 두드렸더니 문을 열은 뒤, 방으로 되돌아가서 방패를 畵架에 올려놓고 들창을 열어 눈이 부실 정도로 볕을 조정하엿다. 세르피에로는 예기치 못했던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이 방패같이 보이지도 않고, 그 위에 그린 것이 단순한 그림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아들이 그를 부축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던 목적은 다 이루었습니다. 가져가십시오. 정말 이 작품에서 바라던 효과입니다." 세르피에로는 이 그림이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의 재능을 매우 칭찬했다. 그리고 그는 몰래 어느 상점에 들려서화살에 심장이 뚫린 그림을 그린 조그만 방패 하나를 사서, 대신 그 촌부에게 주었더니 촌부는 평생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피에로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방패를 피렌체의 어느 상인에게 100 두카트를 받고 은밀히 팔았더니 짧은 시일안에 밀라노 공의 손에 넘어갔다. 상인이 그것을 300 두카트에 팔아 넘겼다고 한다.
레오나르도의 업적에 대한 분석과 평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회화작품의 수는 실제로 많지 않은데 우리가 지금까지 만날 수 있는 작품으로는 17점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아무래도 그는 천재성을 지닌 화가였기 때문에 천재성을 모두 화폭에 대변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의 주요작품〈앙기아리 전투〉와〈레다〉는 둘 다 미완성인 채 모작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추구했던 것은 베로키오의〈그리스도의 세례〉(1474경∼1475)에 그린 부분인 천사와 풍경의 일부분에 이미 나타나 있다. 여러 방향으로의 움직임에 기초해 자연스럽게 구조화한 천사의 몸과 이완된 자세 및 일어나는 일에 눈길을 주나 동시에 안으로 쏠리는 시선에서 그러하며, 풍경 부분에서는 '체험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보여주었다. 1473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그린 습작풍경화는 그 투명한 대기의 처리에서 인지된 현상을 설득력 있는 회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브누아의 성모〉(1478)에서는 성모가 들고 있는 꽃에 사랑스럽게 손을 뻗치는 아기예수를 통해 전통적인 회화 형식에 새롭고 표현이 풍부하며 아주 매력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1475경∼78)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독특하게 연결해 그리는 초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성 히에로니무스〉(1480경)에서 성인의 야윈 몸은 그의 진지하고 객관적인 해부학 연구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진리로 표현되었다.
그의 첫 번째 대작인〈동방박사들의 경배〉(1481)는 완성되지는 못했으나 대가의 섬세한 작업방식을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그림에서 성모와 아기예수의 주된 처리와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차적인 처리는 거장다운 구성감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은 갖가지 심오한 놀라움을 나타낸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첫 번째〈암굴의 성모〉는 레오나르도 회화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산프란체스코 교회 예배당을 위한 대작의 중앙 패널로 1483∼85년경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림이 처음에 계획했던 장소에 놓이지 않게 되자 레오나르도는 제자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함께 같은 주제로 2번째 그림을 그렸다.〈암굴의 성모〉는 어린 예수가 이집트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같은 또래의 요한과 광야에서 만난다는 경외서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 그림의 신비스런 특성은 몽상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그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기법을 총동원했다.
<최후의 만찬> 은 우리가 다들 아는바와 같이 그가 남긴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로 손꼽히며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데 이 그림은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대가다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모나리자와 함께 조금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1500∼06년에 걸친 피렌체 시절에 레오나르도는 그의 명성을 더 높여준 대작에 착수했다. (성모자와 성 안나, 모나리자, 앙기아리 전투, 레다) 완성되기도 전에 피렌체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은〈성모자와 성 안나〉는 인물들간의 유연성과 구성에서 역동감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계산된 효과로 인해 고전주의자들과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에게 모두 모범이 되었다. <모나리자〉는 초상화의 이상형이 되었는데, 젊은 라파엘로가 작업중인 작품을 스케치하여〈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Portrait of Maddalena Doni〉을 위한 모델로 삼았다.〈레다〉역시 당시 많이 그려진 굴곡이 많은 인물상의 모델이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라파엘로와 같은 고전주의 화가들뿐 아니라 자코포 폰토르모와 같은 마니에리스모 화가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앙기아리 전투〉는 레오나르도 미술의 최고봉에 이르렀다.
로마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완성한 듯한〈세례 요한〉에서는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요한을 신비한 신탁의 전달자로 묘사하면서 평범한 회화 전통의 한계를 초월했다. 레오나르도의 예술표현의 마지막 발로는 세상의 종말〉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한 일련의 스케치들이다. 여기서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우주 속의 영적인 힘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으며 움직이는 물체 속에 나타난다. 소용돌이치는 물과 공기, 암석의 형태, 식물의 성장 등 그가 관찰했던 것이 이제 구름이 되고 푹풍우가 되어 거대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세상의 틀이 산산조각나더라도 그 파괴조차도 자연의 모든 피조물의 생사를 주관하는 자체적인 질서·조화·균형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는 '보는 법을 안다'는 그의 인지에 기초한 예술이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인다.
★다 빈치 예술의 특징-공기원근법, 명암법, 색채에 대한 연구, 단색화법★
그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투시 원근법의 연구에 힘썼고, 직접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여 근육의 조직을 알아보는 해부학을 처음으로 미술에서 쓰기도 하였다. 또 유채 기법을 개량하여, 이것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고 어두움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모나리자」를 보면 육체의 정확한 묘사 위에 정신의 깊이나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의 미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여 낸 독특한 명암법 때문이다. 즉, 색칠을 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고 흐리게 하여, 머리나 팔의 은은한 입체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술에 있어서 다빈치의 중요한 과제는 '조화'에 있었다. 자연과 인간, 예술 세계과 인간...그들의 대립이 아닌 한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의 다른 거장들의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회화의 공간을 꽉 메우고 있지만 다빈치의 인물들은 화면에서 구성 요소이다. 회화의 주역이 아니라 바위, 꽃, 하늘과 같은 회화의 통일된 주제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단연 풀도, 물도 자세하게 묘사되어진다. 또한 그는 당대의 화가들보다 해부학과 기하학의 조회가 훨씬 깊었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떠한 선도, 어떠한 운동성도 그의 과학적인 지식을 강력하게 반영하지 않는다. 회화 속에서 한 흐름으로 녹아 있다.
Sfumato(스푸마토-공기원근법): 다빈치는 기하학적 원근법이 표현하고 있는 견고성, 입체성이 오히려 화면 전체의 조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선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보다는 인물이나 기타 소제들의 윤곽선을 없애주거나 아주 연하게 해 주었다. 이것이 '스푸마토'이다. 이는 화면의 원거리감이나 공간감과 더불어 화면 전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주며 회화의 소제들이 화면에서 튀는 것이 아닌 전체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게 된다.
Chiaroscuri(명암법): 프란체스카나, 보티첼리 등은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밝은 색이 화면을 지배하도록 한다. 그러나 다빈치는 반대로 어두운 부분이 증대되어 신체나 특히 윤곽선이 강조되어 인물을 회화의 분위기에 특히 몰입되도록 하고 있다. 역시 화면의 조화에 기여하도록 한다.
Monochrome(단색화): 다빈치는 색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대 다른 거장의 그림들과 비교해볼 때 그의 그림의 색조들은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색'의 뜻이 아니다. 그는 회화적인 통일과 조화를 위하여 색조조차도 화면 속에 녹여 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색채를 혼합함으로써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여러 가지 색의 혼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모든 색을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중간색으로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자연과 인간을 따로 때어놓고 보는 오만한 생각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써 인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진정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작 최후의 만찬·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비록 미완성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으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은 오늘날 세계의 고귀한 작품으로 위상을 떨치고 있으며 르네상스의 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자리잡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 중 우리들이 많이 알고 있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 모나리자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엘리자베타의 약칭이다. 조 콘다부인은 G. 포지의 조사에서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 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에 수장되었다. 때때로 세정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다. 이 초상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 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점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 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 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 최후의 만찬
가장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대가다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레오나르 도는 배신자 유다를 묘사하는 통상적인 전통적 표현을 따르지 않고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 라는 신약의 구절과 관련된 고도로 긴장된 순간을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유다는 등을 구부린 채 이의를 제기하거나 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의 논쟁을 듣고 있다. 사도들은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만 전혀 부자연 스럽지 않으며 다양한 동작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다.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 라는 말에 12제자들은 놀란다. 충격을 받고 질문하는 제자들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조용히 동요하지 않고 경건히 계신다. 모든 제자들은 인간으로서 각기 제 나름대로 반응한다. 그들의 흥분은 바른 편에서 왼 편으로 증폭되고, 감정의 파장은 몸과 손으로 표현되어 앞으로, 또 동시에 중심의 뒷 쪽으로 움직인다. 그 파장은 그리스도 외에 또 한 사람 유다만 남겨놓고 모든 사람을 휩싼다. 그중 가장 빠르게 반응을 보인 인물은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요한의 어깨를 왼 손으로 대고 앞으로 불쑥 몸을 내민다. 이때 오른 손에 쥐고 있었던 칼의 손잡이 뒷부분이 유다의 옆구리를 찌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다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는 모습이 역력하다. 유다 앞부분에 놓인 음식 그릇들은 어수선하게 어질러져있으나 다른 제자들의 앞에는 그릇들이 정연하게 그려져 있으며, 베드로와 요한의 밝은 머리와 대조적으로 어둡게 표현되어 있다. 템페라로 제작된 관계로 훼손이 심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회화에서 비춰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몇 점을 알아보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에 회화에서만 천재로 머문 것이 아닌 여러 방면에 다양하게 각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즉 회화, 조각, 건축가, 수학자 다방면에 걸쳐 모든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 중심이기에 인간을 존중하였고 인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연구하고 시도해왔다. 또한 고전을 복고, 재생을 추구한 시대였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고전을 복고 재생하고자 하였으며 더 나아가 예술은 창조성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였다. 이런한 것을 기여한 자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간의 외형과 함께 인간정신과 영혼 속에 깃들여 있는 사람을 관찰하고 그것을 한폭의 그림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는 단지 관찰을 하여 그린 그림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적인 생각까지 가미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고 또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Vasari, Giorgio ,『(이탈리아)르네상스 美術家傳 』, 探求堂 , 1995
Berenson, Bernard 著, 최승규 옮김,『르네상스의 이태리 화가들』, 한명, 2000
Pinguilly, Yves 著,『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우, 2000
브래니태니커
① 제 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1466년 14살의 소년 다 빈치는 유명한 화가 베로키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았으며, 엄격한 사실주의 기법을 터득하였다. 스승 베로키오의 작품「그리스도의 세례」에 다 빈치가 그린 천사가 스승보다 더욱 뛰어 나자, 제자의 천재성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The Adoration of the Magi」에서는 마돈나를 중심으로 구도를 잡고 그를 정점으로 하는 삼각형 구도와 걸맞추어 안정되게 표현한다.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는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지네브라 데 벤치」,「마돈나 베아노」에서 그의 치밀한 사실기법은 명암법에 스푸마토(Sfumato: 공기원근법)를 병용함으로서 완성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풍은 엄격한 사실에서 깊은 정신세계를 발견 할 수 있다.
② 제 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레오나르도의 고전 예술은 사실상 제 1차 밀라노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는 그동안 축적된 그의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이다. 1482년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의 지배자 스포르차의 궁정에 머물며 수많은 걸작을 완성했다. 밀라노에서의 제작에서는 15세기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졌다. 극적인 내용 표현을 위하여 구도는 빈틈없이 계산되고 주관적 정신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표현되어 지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2차원적으로 나타낼 때 자유로운 상상의 작용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그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을 요구했다. 즉 입체의 형태, 상대적인 위치, 조명, 색, 비례, 구조, 그리고 자세는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어야 했다.「최후의 만찬」은 객관적 사실과 정신내용을 훌륭하게 융합함으로서 다음 세기 고전양식을 이미 완성하였다. 또한 과학 연구와 저술에 힘쓴 시기이기도 했다.
③ 제 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공격해 오자 피렌체(Florence)로 돌아 왔다. 이 시기에 그는 「모나리자」를 제작하였고, 특히 과학연구에 몰두한 시기이다.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이며, 일반인들에게 초상화에서 단연 으뜸으로 떠오르는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정작 작품의 감상보다 집중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이사벨라 데스테 후작 부인의 상을 그리고, 그 화고를 가지고 1500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소 풍만하게 보이는 모나리자는 이미 30을 넘은 나이로 생각된다. 그 당시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가는 허리과 작은 얼굴, 가는 목의 여성들의 기준에 반하지만 여성의 신비스러운 미소, 빛나는 눈, 볼의 명암과 흐려지는 배경의 조화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때 이미 다빈치는 류마티즘과 오른손 마비로 주위의 섬세한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왼손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나가며 「모나리자」,「성요한」,「암굴의 성모」와 같은 아름다운 작품들로 자신의 집을 장식해냈다.
④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년)
제 4 시기는 1506년에서 1513년까지로, 제 2 밀라노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암굴의 성모」를 완성하였고,「 성 안나」 등의 제작에 착수하였다.「성 안나」 그의 예술의 귀결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과학연구, 특히 水流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⑤ 프랑스 시대(1513∼1519년)
제 5 시기는 1513년에서 19년까지로, 로마·앙부아즈 시기이다. 1513년에 로마에 체재하다가 1516년 프랑소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건너가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앙부아즈의 궁정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겼으며, 운하 설계나 궁정설계를 지휘하면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관련된 일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르피에로 다 빈치가 별장에서 기거할 무렵, 소작인이 농장에서 쓰러뜨린 무화과 나무에서 손수 조그마한 원형 방패를 만들었다. 농부는 피에로에게 피렌체에 나가면 아무에게나 방패에 그림을 그려주도록 부탁하였다. 이 농부는 새도 잘 잡고 물고기도 잘 낚으며, 매우 쓸모있는 머슴이었으므로 피에로는 쾌히 승낙하였다. 피에로는 방패를 피렌체에 가지고 가서 아들에게는 누가 부탁하더라는 말도 없이, 거기에 무엇이든 그리도록 하였다. 어느날 레오나르도가 방패를 손에 쥐고 보니 뒤틀어지고 아주 볼 품이 없었다. 그는 방패를 불에 가열하여 바로잡은 후 수리공에게 보내서, 표면에 석고 바탕을 칠하여 매끈하게 만들었다. 레오나르도는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던 끝에 메두사(Medusa)의 머리를 보고 깜짝 놀라 무서워하는 효과를 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혼자 방에 들어앉아, 도마뱀·귀뚜라미·뱀·나비·메뚜기·박쥐 그 밖에 기이한 동물들을 뒤섞이게 그리고 독을 품어내며 공기를 불꽃으로 변하게 하면서 거무스름한 바위 틈에서 기어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벌린 목에서 독을, 눈에서는 불을, 코에서는 연기를 뿜어내는 기괴하고도 무서운 동물들이었다. 이 그림을 제작하는 동안, 방안에서는 죽은 동물의 惡臭가 나와 가득 찼으며, 그 악취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을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견디어낼 수 있었다. 아버지와 촌부가 방패 일을 이미 잊어버렸을 무렵에 레오나르도는 겨우 그림을 완성하였다. 어느날 아침 피에르가 레오나르도를 찾아가, 방문을 두드렸더니 문을 열은 뒤, 방으로 되돌아가서 방패를 畵架에 올려놓고 들창을 열어 눈이 부실 정도로 볕을 조정하엿다. 세르피에로는 예기치 못했던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이 방패같이 보이지도 않고, 그 위에 그린 것이 단순한 그림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아들이 그를 부축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던 목적은 다 이루었습니다. 가져가십시오. 정말 이 작품에서 바라던 효과입니다." 세르피에로는 이 그림이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의 재능을 매우 칭찬했다. 그리고 그는 몰래 어느 상점에 들려서화살에 심장이 뚫린 그림을 그린 조그만 방패 하나를 사서, 대신 그 촌부에게 주었더니 촌부는 평생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피에로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방패를 피렌체의 어느 상인에게 100 두카트를 받고 은밀히 팔았더니 짧은 시일안에 밀라노 공의 손에 넘어갔다. 상인이 그것을 300 두카트에 팔아 넘겼다고 한다.
레오나르도의 업적에 대한 분석과 평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회화작품의 수는 실제로 많지 않은데 우리가 지금까지 만날 수 있는 작품으로는 17점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아무래도 그는 천재성을 지닌 화가였기 때문에 천재성을 모두 화폭에 대변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의 주요작품〈앙기아리 전투〉와〈레다〉는 둘 다 미완성인 채 모작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추구했던 것은 베로키오의〈그리스도의 세례〉(1474경∼1475)에 그린 부분인 천사와 풍경의 일부분에 이미 나타나 있다. 여러 방향으로의 움직임에 기초해 자연스럽게 구조화한 천사의 몸과 이완된 자세 및 일어나는 일에 눈길을 주나 동시에 안으로 쏠리는 시선에서 그러하며, 풍경 부분에서는 '체험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보여주었다. 1473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그린 습작풍경화는 그 투명한 대기의 처리에서 인지된 현상을 설득력 있는 회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브누아의 성모〉(1478)에서는 성모가 들고 있는 꽃에 사랑스럽게 손을 뻗치는 아기예수를 통해 전통적인 회화 형식에 새롭고 표현이 풍부하며 아주 매력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1475경∼78)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독특하게 연결해 그리는 초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성 히에로니무스〉(1480경)에서 성인의 야윈 몸은 그의 진지하고 객관적인 해부학 연구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진리로 표현되었다.
그의 첫 번째 대작인〈동방박사들의 경배〉(1481)는 완성되지는 못했으나 대가의 섬세한 작업방식을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그림에서 성모와 아기예수의 주된 처리와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차적인 처리는 거장다운 구성감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은 갖가지 심오한 놀라움을 나타낸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첫 번째〈암굴의 성모〉는 레오나르도 회화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산프란체스코 교회 예배당을 위한 대작의 중앙 패널로 1483∼85년경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림이 처음에 계획했던 장소에 놓이지 않게 되자 레오나르도는 제자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함께 같은 주제로 2번째 그림을 그렸다.〈암굴의 성모〉는 어린 예수가 이집트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같은 또래의 요한과 광야에서 만난다는 경외서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 그림의 신비스런 특성은 몽상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그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기법을 총동원했다.
<최후의 만찬> 은 우리가 다들 아는바와 같이 그가 남긴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로 손꼽히며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데 이 그림은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대가다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모나리자와 함께 조금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1500∼06년에 걸친 피렌체 시절에 레오나르도는 그의 명성을 더 높여준 대작에 착수했다. (성모자와 성 안나, 모나리자, 앙기아리 전투, 레다) 완성되기도 전에 피렌체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은〈성모자와 성 안나〉는 인물들간의 유연성과 구성에서 역동감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계산된 효과로 인해 고전주의자들과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에게 모두 모범이 되었다. <모나리자〉는 초상화의 이상형이 되었는데, 젊은 라파엘로가 작업중인 작품을 스케치하여〈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Portrait of Maddalena Doni〉을 위한 모델로 삼았다.〈레다〉역시 당시 많이 그려진 굴곡이 많은 인물상의 모델이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라파엘로와 같은 고전주의 화가들뿐 아니라 자코포 폰토르모와 같은 마니에리스모 화가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앙기아리 전투〉는 레오나르도 미술의 최고봉에 이르렀다.
로마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완성한 듯한〈세례 요한〉에서는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요한을 신비한 신탁의 전달자로 묘사하면서 평범한 회화 전통의 한계를 초월했다. 레오나르도의 예술표현의 마지막 발로는 세상의 종말〉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한 일련의 스케치들이다. 여기서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우주 속의 영적인 힘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으며 움직이는 물체 속에 나타난다. 소용돌이치는 물과 공기, 암석의 형태, 식물의 성장 등 그가 관찰했던 것이 이제 구름이 되고 푹풍우가 되어 거대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세상의 틀이 산산조각나더라도 그 파괴조차도 자연의 모든 피조물의 생사를 주관하는 자체적인 질서·조화·균형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는 '보는 법을 안다'는 그의 인지에 기초한 예술이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인다.
★다 빈치 예술의 특징-공기원근법, 명암법, 색채에 대한 연구, 단색화법★
그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투시 원근법의 연구에 힘썼고, 직접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여 근육의 조직을 알아보는 해부학을 처음으로 미술에서 쓰기도 하였다. 또 유채 기법을 개량하여, 이것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고 어두움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모나리자」를 보면 육체의 정확한 묘사 위에 정신의 깊이나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의 미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여 낸 독특한 명암법 때문이다. 즉, 색칠을 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고 흐리게 하여, 머리나 팔의 은은한 입체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술에 있어서 다빈치의 중요한 과제는 '조화'에 있었다. 자연과 인간, 예술 세계과 인간...그들의 대립이 아닌 한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의 다른 거장들의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회화의 공간을 꽉 메우고 있지만 다빈치의 인물들은 화면에서 구성 요소이다. 회화의 주역이 아니라 바위, 꽃, 하늘과 같은 회화의 통일된 주제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단연 풀도, 물도 자세하게 묘사되어진다. 또한 그는 당대의 화가들보다 해부학과 기하학의 조회가 훨씬 깊었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떠한 선도, 어떠한 운동성도 그의 과학적인 지식을 강력하게 반영하지 않는다. 회화 속에서 한 흐름으로 녹아 있다.
Sfumato(스푸마토-공기원근법): 다빈치는 기하학적 원근법이 표현하고 있는 견고성, 입체성이 오히려 화면 전체의 조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선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보다는 인물이나 기타 소제들의 윤곽선을 없애주거나 아주 연하게 해 주었다. 이것이 '스푸마토'이다. 이는 화면의 원거리감이나 공간감과 더불어 화면 전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주며 회화의 소제들이 화면에서 튀는 것이 아닌 전체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게 된다.
Chiaroscuri(명암법): 프란체스카나, 보티첼리 등은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밝은 색이 화면을 지배하도록 한다. 그러나 다빈치는 반대로 어두운 부분이 증대되어 신체나 특히 윤곽선이 강조되어 인물을 회화의 분위기에 특히 몰입되도록 하고 있다. 역시 화면의 조화에 기여하도록 한다.
Monochrome(단색화): 다빈치는 색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대 다른 거장의 그림들과 비교해볼 때 그의 그림의 색조들은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색'의 뜻이 아니다. 그는 회화적인 통일과 조화를 위하여 색조조차도 화면 속에 녹여 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색채를 혼합함으로써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여러 가지 색의 혼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모든 색을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중간색으로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자연과 인간을 따로 때어놓고 보는 오만한 생각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써 인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진정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비록 미완성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으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은 오늘날 세계의 고귀한 작품으로 위상을 떨치고 있으며 르네상스의 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자리잡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 중 우리들이 많이 알고 있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 모나리자
▶ 최후의 만찬
지금까지 회화에서 비춰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몇 점을 알아보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에 회화에서만 천재로 머문 것이 아닌 여러 방면에 다양하게 각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즉 회화, 조각, 건축가, 수학자 다방면에 걸쳐 모든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 중심이기에 인간을 존중하였고 인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연구하고 시도해왔다. 또한 고전을 복고, 재생을 추구한 시대였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고전을 복고 재생하고자 하였으며 더 나아가 예술은 창조성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였다. 이런한 것을 기여한 자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간의 외형과 함께 인간정신과 영혼 속에 깃들여 있는 사람을 관찰하고 그것을 한폭의 그림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는 단지 관찰을 하여 그린 그림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적인 생각까지 가미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고 또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Vasari, Giorgio ,『(이탈리아)르네상스 美術家傳 』, 探求堂 , 1995
Berenson, Bernard 著, 최승규 옮김,『르네상스의 이태리 화가들』, 한명, 2000
Pinguilly, Yves 著,『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우, 2000
브래니태니커
-
[출처] http://www.teagg.com/gg/7439
(and more of his works... from Google Images)
The Mona Lisa by Leonardo da Vinci
http://www.abm-enterprises.net/artgall2/monalisa.jpg
http://www.rossettiarchive.org/img/op7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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