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Self-Improvement

에카르트 톨레 "A New Earth" (깨달음의 시대)

namaste123 2015. 8. 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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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ew Earth" (깨달음의 시대)

Eckhart Tolle/ 장용창()


 
제1장 인간 의식이 꽃처럼 피어나다

 


지구에 꽃이 피다


일억 천사백만년 전 어느 날 아침, 지구상 처음으로 피어난 꽃이 햇볕을 받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수백만년 동안 지구는 식물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꽃핌의 사건은 지구에 있는 생명들의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최초의 꽃은 아마도 오래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피어난 다른 꽃들도 오래도록 고독한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꽃들이 만발하기에 아직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머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중요한 시점에 이르자, 지구는 만발한 꽃들이 내뿜는 색과 향기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만약 인지하는 의식이 있었더라면 그 만발한 꽃들을 느꼈을 것입니. (번역자 주. 여기서 꽃은 깨달은 사람들을 비유하기도 한다. 예수님과 부처님 등 깨달은 사람들이 과거에는 드물어 고독했다. 하지만 지구가 진화함에 따라 꽃들이 만발한 것처럼,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톨레는 희망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보다 훨씬 뒤에,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이 섬세하고 향기로운 존재는 인간 의식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꽃들에 끌리고 매혹을 느끼게 됩니다. 꽃은 실용적인 가치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즉, 생존과는 전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사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부여는 인간의 의식이 진화함에 따라 가능했습니다. 꽃은 수없이 많은 예술가와 시인들, 그리고 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꽃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꽃들로부터 배우라고 가르칩니다. 부처님이 아무 말 없이 연꽃을 들어 보이자, 잠시 후 가섭존자가 그 뜻을 헤아려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무언의 가르침이 28대의 스승들을 거쳐 선불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번역자 주. 마태복음 산상설교 중. 생계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들판에 핀 꽃들을 생각해봅시다. 뭘 먹고 살지, 뭘 입고 살지 걱정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저 꽃들을 저리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합니다. 우리 사람이야 하느님께 꽃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이겠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뭘 먹고 살지 걱정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다 알아서 여러분을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꽃이 어떻게 깨달음에 도움을 주게 될까요?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본질적인 기쁨과 사랑을 느끼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꽃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높고 신성하며 형태가 없는 존재의 형태적 표현입니다. 즉 꽃은 지구보다 더 가볍고 더 섬세하기에 저 의식의 영역으로 가는 메신저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꽃은 물리적 형태가 있는 세계와 물리적 형태가 없는 초월의 세계를 잇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꽃은 인간을 즐겁게 하는 향기뿐만 아니라 신의 영역에서 온 향기도 가지고 있습니다. 깨달음(enlightenment)이라는 단어를 보다 넓게 해석할 때, 우리는 꽃을 지구의 깨달음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번역자 주. 우리의 세계는 여러 가지 다른 영역, realm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물질 세계, 에너지 세계, 그리고 신의 세계 등이 있다. 물질 세계에서 에너지 세계, 신의 세계로 갈수록 물질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형태를 잃어간다. 깨달음은 물질 세계에서 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꽃은 지구보다 가볍고 섬세하기 때문에 물질이 없는 신의 세계에 보다 가깝다. 그러니 지구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꽃을 피웠다는 것은 신의 세계로 좀 더 나아갔음을 뜻한다. 그래서 톨레는 꽃을 지구의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어느 영역에 있는 어떤 존재이건, 즉, 광물질이건, 식물이나 동물, 혹은 인간이건, 어떤 “깨달음”을 겪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진화라는 보편적인 과정과는 달리 어떤 질적인 변화이기에 아주 드물게 일어납니다. 깨달음은 또한 발전에 있어서 어떤 불연속적인 것입니다. 즉, 존재의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물질성이 옅어지는 것입니다.
 
형태를 지닌 것 중 가장 밀도가 높은 광물질보다 더 무겁고 뚫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광물질조차 물질성이 옅어지는 “진화”를 합니다. 즉, 어떤 광물질들은 분자구조가 변하여 크리스탈이 되기도 하고, 그리하여 투명해지기도 합니다. 어떤 탄소들은 빛과 압력을 받아 다이아몬드로 변하기도 하고, 다른 광물질들은 또 다른 종류의 보석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늘 기어 다니기만 하는 파충류들, 즉, 짐승들 중 가장 땅에 가까이 붙어 있다고 볼 수 있는 파충류들은 수백만 년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변하여 날개와 깃털을 얻고는 새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오래도록 땅에 붙여 놓았던 중력의 힘을 뛰어넘었습니다. 이들은 기거나 걷는 것을 더 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기거나 걷는 것을 한 차원 뛰어 넘어 질적인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꽃, 크리스탈, 보석, 그리고 새는 인간의 의식을 설명하는 데 중요했습니다.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한얼, 즉 우주적 의식이 스스로를 표현하여 나타난 존재들입니다. 이들이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우주적 의식의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들에게 특별히 매력을 느끼고 끌렸던 이유는, 이들이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한얼과 가까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자 주. 우리의 세계가 물질 세계, 에너지 세계, 신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은 인도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등 유럽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그리하여 고대 유럽에서는 신이 살고 있는 하늘세계와 인간이 살고 있는 물질세계인 땅 사이를 에테르라는 물질이 채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에테르는 물질이면서 공기처럼 가벼운 존재이고, 밀도가 낮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 더 가깝게 존재했다. 톨레는 꽃과 새 등을 에테르적인 존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물질세계는 신의 자기 표현-manifestation of Life-라는 관념 또한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우리 모두는 신이 스스로를 표현하였기에 존재하게 되었다. 톨레는 신을 Life 혹은 Consciousness라고 부르고 있는데,나는 이를 상황에 따라 신, 우주 의식, 혹은 한얼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런 관념은 한민족에게도 있어서, 형태가 없고 가장 가볍기 때문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존재인 신을 하늘, 즉 한얼, Great Consciousness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존재의 높은 단계를 성취하게 될 때, 즉, 고요히 집중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을 얻게 될 때, 이들은 모든 존재들 안에 존재하고 있는 신적인 존재, 즉 의식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신적인 존재야말로 자신의 본질임을 알게 되고 이를 자신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사람들은 오직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봅니다. 사람들은 내면에 있는 신적인 존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며, 자신을 물질적 신체와 심리적 에고와 동일시합니다. (번역자 주. 요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8단계 중 6단계가 집중, Dharana, 다라나이고, 7단계가 명상, Dhyana, 디아나이다. 그러나 집중과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수련을 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한 사물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며, 이와 같이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다라나라고 하며, 이는 깨달음의 한 단계이다.)
 
꽃이나 크리스탈, 보석, 혹은 새를 바라볼 때, 깨달음을 전혀 얻지 못한 보통 사람들도 잠깐 동안이나마 물질적인 형태를 초월하는 뭔가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들이 꽃이나 새에 끌린 이유가 바로 그 초월적 존재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면서도 이들과 친밀감을 느낍니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 물질이 그 안에 있는 신적 의식을 덮고 있습니다. 하지만 꽃이나 새들은 그 초월적 성격 때문에 물질이 신적 의식을 좀 얇게 덮고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모든 생명들이 이런 예외에 속합니다. 아기들, 강아지들, 송아지들 등등. 이들은 아주 섬세하고, 다치기도 쉽지만 물질에 확고히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순수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어떤 것,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 그 얇은 막을 뚫고 빛납니다. 그래서 이런 새 생명들은 감각이 무딘 사람들마저 기쁘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의를 기울여 새나 보석, 혹은 꽃을 바라볼 때, 이 사물들은 여러분에게 신의 세계를 보여주는 창문이 됩니다. 비록 미세하긴 하지만, 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열린 통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깨달음을 얻은” 사물들은 고대로부터 인간 의식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연꽃 안에 있는 보석이 불교의 중요한 상징물이며, 하얀 새인 비둘기가 기독교에서는 성령을 뜻합니다. 이들은 인류에게 발생하게 될 더 근본적인 의식의 진화를 준비해왔습니다. 이 근본적인 의식의 진화가 바로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목적
 
이제 인류는 깨달음, 즉 의식의 질적인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의식의 질적인 변화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중대한 것이어서, 지구에 꽃이 피어난 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류의 깨달음을 알리는 신호였을 뿐입니다. 인류는 그 완고한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크리스탈처럼 투명해서 순수의식이 아무런 왜곡 없이 빛날 수 있을 만큼 생각의 구조가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요? 인류는 이제 그 물질성의 중력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에고를 감옥에 가두어버리는 물질, 즉, 겉모습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번역자 주. 에고 Ego가 무엇인지는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는 그냥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이기적 자아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도 된다. 깨달음을 얻으면 순수의식이 작용하는 반면, 깨달음을 얻기 전에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에고이다. 에고는 욕망의 화신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런 변화, 즉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 인류역사상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르쳐왔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일찍 피었던 인류의 꽃 중 두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구자였으며, 아주 드물고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는 깨달음이 널리 퍼질 수 없는 시대였으며, 그분들의 가르침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심지어 왜곡되었습니다. 분명 그분들의 가르침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말고는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님과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보다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여러분이 그런 깨달음을 발생시키거나 가속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기 전 에고가 발현될 경우 그 특징은 무엇이며, 깨달음을 얻은 후 순수의식이 빛날 때, 이를 알 수 있는 표시는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들이 바로 이 책에서 논의될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책 자체가 깨달음의 한 결과물이며, 또한 깨달음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이나 개념들은 중요할 수도 있지만, 부차적일 뿐입니다. 그런 것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분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여러분의 머리 속에 정보나 신앙 하나를 추가하려는 것도 아니요, 어떤 것을 확신시키려는 것도 아니라, 여러분 의식의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 즉, 여러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흥미로운” 책이 아닙니다. “흥미롭다”는 것 여러분이 그 내용에 동의하건 말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생각이나 개념들을 가지고 놀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여러분 자신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이 여러분 의식의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이 책의 내용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이 책은 준비가 된 사람만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준비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추가로 깨달음을 얻을 때 인류 전체에 그 힘이 미쳐, 다른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깨달음이 뭔지 모르신다면, 계속 읽어 나가십시요. 


오직 깨달음을 직접 얻음으로 써만, 깨달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한 번 얻으면 잃어버리지 않는데, 슬쩍 맛만 봐도 그 진행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는 중에 깨달음의 맛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이미 깨달음의 진행이 시작된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변화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겪다가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나 다른 영적인 책들을 읽으면서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과정이 이미 시작된 사람들은 이 책이 그 과정을 가속화 하거나 심화시킬 것입니다.
 
깨달음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절차 중 하나는 깨닫지 못한 상태의 자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에고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할 때마다 그것이 에고의 생각이며, 말이며, 행동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사고 방식이 자신의 경험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이렇게 고정된 사고 방식은 진실을 인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필수적인 절차 중 두번째는 자신의 사고방식이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번역자 주. 자아는 에고와 의식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에고, 즉, 이기적 자아가 결정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에고의 작용이 약해지고, 순수의식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깨달음을 얻는 첫 단계이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 말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그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순수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에고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충분히 이해하고 난 이후에야 순수의식이 작용을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에고의 중요한 면모들을 보여주고, 에고가 개인에게서 혹은 집단적으로 어떻게 작용되고 발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합니다. 첫째, 에고의 작용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여러분을 에고와 동일시할 것입니다. 마치 도깨비에 씌운 사람이 자기자신을 도깨비라고 착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기 전에 사람들은 에고야말로 자기자신이라고 착각합니다. 둘째로, 에고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깨달음을 얻는 중요한 한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내면에 있는 “의식이 아닌 어떤 것”을 인식할 때,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 다른 어떤 것이야말로 바로 깨어나기 시작한 의식이며, 바로 그 과정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에고와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둠과 싸운다고 해서 어둠이 물러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의식의 빛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빛입니다.
 



마음의 오작동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종교나 정신적인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 외적인 표현이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를 통찰한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심한 마음의 오작동을 겪고 있다는 것이 그 첫번째 진리입니다. (번역자 주. (1) 이번 단원의 제목이면서,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dysfunction이다. 나는 이것을 마음의 오작동이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렇게 잘못 작동하는 마음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폭력을 휘두르게 되고 스스로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들을 하게 된다. (2) 이 책 곳곳에 사용되고 있으면서, 최근 다른 책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spiritual 이라는 단어가 있다. Spiritual practice, spiritual teacher 등으로 활용된다. 우리 말로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인”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영적인”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한국어 단어들은 spiritual 의 뜻을 전하기에 좀 부족하다. spiritual은 “종교 전통과는 무관하면서 개인의 영적인 깨달음과 관련된”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 책의 저자인 에카르트 톨레가 spiritual teacher 라고 할 수 있으며, 개인들이 실천하는 요가와 명상 등을 spiritual practice 라고 한다. 나는 이 책에서 이 단어를 때로는 “정신적인”이라고 하고, 때로는 “영적인”이라고 하고, 또 상황에 따라서 다른 단어로 번역하기 도 하였다.)  
 
힌두교는 이런 마음의 오작동을 인류가 총체적으로 겪고 있는 마음의 병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런 견해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를 마야라고 부르는데, 환상이라는 뜻입니다.인도의 위대한 성자들 중 한 명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를 가리켜 “마음은 마야, 즉 환상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번역자 주. 라마나 마라히쉬는 1879년부터 1950까지 이 지구에 존재했던 인도의 위대한 성자이다. 힌두교에서는 이 세계 자체가 인간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가르친다.즉, 마음의 오작동으로 인하여 이 고통 많은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힌두교도 마음의 오작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좀더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현실을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잘못 해석하여, 그렇게 왜곡된 형태로 해석된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불교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합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그 정상상태에서 두카를 만들어내는데, 두카란 고통, 불만족, 혹은 불행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간주합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건, 무엇을 하건 여러분은 고통에 처할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고통이 발생하는데, 다만 경우에 따라 조금 늦게 발생할 뿐이라고 부처님은 가르칩니다. (번역자 주.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마음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마음의 오작동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 따르면 일반적인 상태의 모든 인류가 겪는 것은 “원죄”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죄라는 것은 엄청나게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은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여기서 죄라는 것은 “표적을 놓침”을 뜻합니다. 즉, 죄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중요점을 놓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요령 없이, 눈먼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며, 그럼으로써 그 자신 고통을 겪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 언어가 발생했던 문화적 배경과 오해 등을 벗겨 내고 보면, 원죄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건에 내재하는 마음의 오작동을 가리킵니다. (번역자 주. 마음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현실을 직시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에, 인간은 눈먼 상태로 고통을 겪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렇게 오작동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일종의 원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죄를 짓지 않으려면 오작동하는 마음을 극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순수의식, 혹은 성령이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인류가 이룩해놓은 성과들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합니다. 우리는 음악, 문학, 미술, 조각 등에서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최근 과학과 기술은 우리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예전 시대라면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일도 가능하게 해놓았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엄청나게 지능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능 그 자체가 광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 마음의 오작동이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엄청나게 증폭시켰습니다. 인간 마음의 오작동과 총체적인 광기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마음의 오작동이 실제로 더 강화되고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에 일어났습니다. 공포와 탐욕,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발생한 파괴적이고 잔인한 전쟁은 인류의 역사상 흔히 발생해 왔습니다. 물론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하는 광범위한 폭력이나 노예 제도 또한 역사상 흔히 발생해 왔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보다 다른 인간에 의한 고통이 훨씬 더 심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이 되었을 때, 인간은 그 지능을 이용하여 동력기관만 발명한 것이 아니라, 폭탄이나 기관총, 잠수함, 화염방사기, 독가스 같은 것들도 발명하게 됩니다. 지능이 광기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전투가 오래 지속되어 겨우 몇 마일의 땅을 얻기 위해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났을 때, 그 결과를 보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천만명이 사망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불구자가 되거나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광기가 이보다 더 파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났던 적이 그 전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20세기를 통틀어 다른 인간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람의 수는 1억명이 넘을 것입니다. 전면적인 전쟁만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 지배 하에 있던 소련에서 “노동자계급의 적, 스파이, 배신자” 등으로 간주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과 나치 지배 하의 독일에서 유태인학살의 공포 속에 죽어간 사람들을 합하면 2천만명이 넘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스페인 내전과 같은 무수히 많은 내전에서도 죽어갔습니다. 1970년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 때는 전체 인구 중 4분의 1이 학살로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광기는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냥 신문만 봐도 매일 보도됩니다. 인류의 총체적인 광기, 혹은 마음의 오작동으로 인한 또 다른 피해는 바로 우리의 지구와 그 생태계가 겪고 있습니다. 산소를 내뿜는 숲이 그 속에 깃들었던 동식물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공장식 축산농장에서는 매일 수억 마리의 가축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강과 바다와 공기는 인간이 뿜어낸 화학물질로 오염되고 있습니다. 지구의 생명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모른 채 오직 욕망에 의해서 행해지는 이런 행위들을 막지 못한다면, 그 결과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인간 존재의 핵심적 특징인 이 총체적 광기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발현되어 왔습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역사는 광기의 역사입니다. 만일 인류의 역사를 한 개인의 질병으로 비유하자면 이는 “만성적 편집증적 망상증”으로 진단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무의식이 외부로 표출되어 만들어진 ‘망상 속의 적’을 향해 극단적인 폭력과 잔혹행위, 혹은 살인마저 저지르는 병적인 성향이 있다”라고 진단될 것입니다. 아주 가끔 정상으로 돌아올 뿐, 보통 때는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광기 상태입니다.
 
공포, 탐욕,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은 국가간 전쟁을 일으키는 동기일 뿐만 아니라 개인들 간의 인간관계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공포와 탐욕,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오해를 쌓아갑니다. 이런 오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공포와 탐욕과 권력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마음의 오작동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오작동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포, 탐욕, 권력에 대한 욕망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인 반면, 마음의 오작동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총체적인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일부는 “욕망을 버려라”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욕망을 버릴 수 있나요? 아무리 가르친들 그런 시도들은 실패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욕망의 더 깊은 원인까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포, 탐욕, 권력에 대한 욕망은 궁극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번역자 주.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욕망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욕망의 뿌리를 뽑아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한 가지,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도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흔히 권유할 만한 일이고 수준 높은 정신세계를 닦은 결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의식의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궁극적으로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노력입니다. 왜냐하면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 또한 마음의 오작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좀 더 섬세하고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분석하기 쉽지 않지만, 이 또한 에고와 동일시하려는, 즉, 자기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이미지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로서,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충족할 수 없는 욕망에 부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착한 일을 할 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착함을 발견하고 그 착함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착함은 의식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함으로써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번역자 주. 그래서 우리 나라의 많은 제도화된 종교나 학교에서 착한 일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행복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오히려 그런 착한 일을 하지 못하는 자기자신을 비난하며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도 많고, 착한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남을 비난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많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우리를 옥죄는 감옥이다. 그래서 이현주 목사님은 버려진 과자 껍질을 줍지 않고 지나친 자기 자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잘했다. 이 지구 위에서 한 인간이 제가 만든 감옥에 저를 가두는 것보다, 버려진 과자 껍질이 바람에 굴러다니는 게 덜 해롭겠기 때문이다.”)
 
애초에 매우 고귀한 사상으로 시작된 공산주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식상태, 내적인 실재를 먼저 바꾸지 않고 외적인 실재만 바꾸려고 할 때, 다른 말로 “새 세상”을 만들려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공산주의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에고, 즉 마음의 오작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고려하지도 않고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깨달음의 시대가 오다
 
우리의 “정상적인” 마음 상태가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통찰을 대부분의 고대 종교와 정신적 가르침들이 공통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보통의 마음 상태가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쁜 소식이라고 한다면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인간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불교에서도 가끔) 이런 의식의 변화를 “깨달음(enlightenment)”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를 “구원(salvation)”이라 불렀고, 불교에서는 보통 “고통이 끝남(end of suffering)”이라고 부릅니다. “해방(liberation)”이나 “미몽에서 깨어남(awakening)”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은 예술, 과학,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오작동을 발견하고, 그 광기를 발견해낸 것입니다. 먼 과거에 이미 이런 인식이 일부 선각자들에게 있었습니다.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달타라는 사람이 아마도 이를 명확하게 인식한 최초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나중에 부처라는 이름이 그에게 주어졌는데, 부처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인류의 또 다른 선각자가 중국에 나타나는데, 바로 노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쓰여진 것 중 가장 심원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도덕경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번역자 주. 인도의 사상가들 중에는 불교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크리슈나와 라마 등이 실존했던 인물이며, 깨달은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은 우리가 톨레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과 무관하므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자신의 광기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치유와 초월의 시작이며, “미치지 않은 존재”가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런 선각자들과 함께 의식의 새로운 국면이 이 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꽃이 피어났던 것입니다. 저 분들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고통과 환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저 분들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 보십시요. 여러분이 무슨 일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보십시요.” 저 분들은 인류의 총체적인 광기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가능함을 지적했습니다. 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저 분들이 인류의 깨달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당시 세상은 아직 저 분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저 분들의 가르침을 당시 사람들은 오해했고, 그 이후 세대도 마찬가지로 오해했습니다. 그 분들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가르침은 어떤 경우 그 제자들이 직접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왜곡되고 잘못 해석되었습니다. 수백년 동안, 저 분들이 전혀 언급하지도 않은 것들이며, 근본적인 오해의 소산일 뿐인 생각들이 원래의 가르침에 더해졌습니다. 어떤 선각자들은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선각자들은, 그와 반대로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마음의 오작동을 넘고 총체적인 광기를 넘을 수 있도록 그들이 제시한 방법이 왜곡되어 결국 그 광기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종교는, 크게 봤을 때, 통합하기보다 분열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하나라는 근본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폭력과 증오를 끝내는 대신, 이들 종교들은 사람들 사이에, 다른 종교들 사이에, 심지어 같은 종교 내에서도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폭력과 증오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이제 사람들이 자기자신과 동일시하며 자기자신을 오해하는 데 사용되는 믿음의 체계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자기들이 “착한”, 혹은 “정의로운”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은 “악한” 혹은 “불의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적을 통해서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 적을 심지어 죽이기까지 함으로써 이른바 “정의”를 구현했다고 믿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신”을 자기 자신의 모습을 따라 “창조”해 냈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하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인 신이 이제 축소되어 수람들이 “나의 신”이나 “우리의 신”으로 경배하는 심리적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하지만,,,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이 모든 미친 짓들에도 불구하고, 선각자들이 가리켰던 그 진리는 아직도 빛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왜곡과 오해가 겹겹이 싸고 있지만, 그 장막을 뚫고, 진리는, 희미하지만,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막이 겹겹이 싸고 있기에, 여러분 자신이 내면의 진리를 경험해보지 않은 이상, 그 장막을 뚫고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겪고 그 자신 내면에서 깨달음을 얻어, 모든 종교가 가리키고 있는 그 진리를 알게 된 인물들이 극히 소수였지만 역사상 있었습니다. 그 진리를 개념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문화의 고유한 개념적 틀을 이용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학파”나 “운동”이 모든 주요 종교 내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런 학파나 운동은 선각자들이 발견한 진리를 재발견했거나, 어떤 경우는 이를 더 강력히 발견했음을 증명합니다.그리하여 초기와 중세 기독교에서는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영지주의, 靈知主義)과 신비주의가 나타났습니다. 이슬람교에는 수피즘(Sufism)이 나타났고, 유대교에는 하시디즘(Hasidism)과 까발라(Kabbala)가 나타났고, 힌두교에는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가 나타났고, 불교에는 선불교와 족첸(Dzogchen, 티벳불교의 일파)이 나타났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기존 인습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최초의 진리를 겹겹이 싸고 있는 죽은 개념화와 심리적인 신앙 구조를 멀리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제도화된 종교를 지키고자 했던 집단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류 종교와는 달리 이들은 깨달음과 내면의 변화를 중시했습니다. 주류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이 새로운 선각자들의 가르침을 접해본 사람은 매우 적었지만, 바로 이 매우 적은 사람들 덕분에, 주류종교는 다시 한번 원래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던, 의식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숫자는 주류 종교 신자들의 마음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총체적인 “비의식성”에 중대한 영향을 줄 만큼 많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학파들 중에도 기존의 제도화된 종교들처럼 형식화되고 개념화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깨달음과 종교
 
제도화된 종교들이 이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의식변화를 위해 하는 역할이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깨달음과 종교의 차이를 알아채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간주하는 생각들의 집합을 “믿음의 체계(belief system)”라고 부릅시다. 이제 사람들은 이런 믿음의 체계가 우리를 깨달음에 가깝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믿음의 체계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할수록 이 사람은 자기 내면으로부터 떠오르려는 의식과 멀어지게 됩니다.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바로 이런 장벽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를 생각과 동등하다고 간주합니다. 이들이 자신의 생각(마음)과 동일시할 때, 이들은 자기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노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들은 생각의 한계를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들과 100%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이들은 여러분이 “틀렸다”고 판단할 것이며, 이들은 “올바르지 못한” 여러분을 살해함으로써 정의를 지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번역자 주. 8쪽에 있는 spiritual이라는 단어에 대한 주석 참조. 이 단원의 제목이 spirituality and religion인데 나는 이를 깨달음과 종교라고 번역했다. Spirituality를 영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영성이라는 단어는 톨레가 spirituality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단어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서도 다시 한번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새로운 깨달음의 물결이, 의식의 변화가, 이런 제도화된 종교의 외곽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에고에 사로잡힌 종교 내에도 소수의 깨달은 사람들이 늘 있었고, 제도화된 종교의 권위적인 성직자들이 위협을 느껴 이들을 억압하려고 해왔습니다. 하지만, 종교 밖에서 깨달음의 물결이 거대하게 열리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입니다. 과거에는 이런 물결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교회가 모든 의식운동에 대해 마치 프랜차이즈처럼 촉수를 뻗치고 있었던 서양에서는 이런 깨달음의 물결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교회의 허가 없이 결코 깨달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 책을 출판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으며, 만일 교회의 허가 없이 그런 일을 했다가는 교회가 즉시 여러분을 조용히 만들어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교회나 다른 종교집단 내에서조차,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는 정말 가슴 벅찬 일입니다. 저는, 예를 들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와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여 스스로를 열려고 했던 시도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제도화된 종교의 밖에서 나타나고 있는 영적인 가르침들과 동양의 지혜가 유입되면서 제도적인 종교의 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제 형식과 교조적 교리와 견고한 믿음의 체계를 버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깊은 영적인 전통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이 자신의 신앙체계와는 무관하며, 모든 것이 의식의 각성 상태와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깨달음이 어떻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겉모습 너머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은 믿음의 체계에 더욱 강하게 집착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지금까지는 한 번도 발생한 적이 없는 의식각성의 발흥뿐만 아니라 에고에 대한 강한 집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 기관들은 새로운 의식각성에 문을 열겠지만, 또 다른 종교들은 그들의 교리적 입장을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의 집단적인 에고는 이런 강화된 종교나 기타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물들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더욱더 강하게 방어하고 반격을 할 것입니다. 일부 교회나 분파, 혹은 다른 종교 운동들은 기본적으로 집단적 에고의 산물인 경우도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다른 대안적인 해석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분파들은 자신의 입장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에고는 결국 힘이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나, 기업, 정부, 혹은 다른 기관 등의 형태로 견고히 세워진 에고의 구조물들 또한, 아무리 강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여도,안으로부터 해체되어 갈 것입니다. 가장 완고하게 보이는 가장 견고한 구조물이 가장 먼저 무너질 것입니다. 소련의 공산당이 몰락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렇게 깊은 방어막을 쳐놓고, 그렇게 견고하고 통일된 것처럼 보였는데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안으로부터 해체되었습니다. 아무도 이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일이 갑자기, 놀랍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놀라운 일들이 앞으로 많이 벌어질 것입니다.
 



의식 변화가 긴급히 필요하다
 
근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이나 자연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로 인해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때, 인류는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으려면, 획기적인 진화를 통해서 그 상황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지구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생명체는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육지에 전혀 생물체가 없을 때에도 바다는 생명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바다 속에 있던 생물 중 어떤 용기 있는 존재가 저 메마른 대지로 올라오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바다에서 몇 미터 나오자마자 무시무시한 중력의 힘으로 피곤을 느끼고는 다시 바다 속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바다 속에서는 중력의 작용이 훨씬 약해서 살아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시도를 한 덕분에, 지느러미 대신 발을 사용하고, 아가미 대신 허파를 사용하며 땅 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육지로 나오는 것처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기 위해 진화상의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근본적인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아마도 감행하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아마도 지형 변화로 인해 어떤 작은 바다가 대양으로부터 분리되고, 수만년에 걸쳐 차츰 바닷물이 말라버려 그 곳에 살던 물고기들이 그 고향을 버리고 육지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지금 인류가 처한 상황입니다. 2500년 전 선각자들이 발견하였고,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그 위험성이 폭발하고 있는, 인간 마음의 오작동이 이제 처음으로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최근까지도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곳 저곳에서 선각자들이 성취한, 인간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전반적인 깨달음은, 그리 긴급한 일이 아니었기에,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이제 진화하거나 혹은 멸종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했음을, 머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존재했던 에고적인 마음이 점차 사라지고 의식의 새로운 국면이 떠오르고 있음을 내면에서 경험한 사람들이, 지금은 소수이지만 빠른 속도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떠오르고 있는 것은 믿음의 체계도 아니오, 종교도 아니며, 신화나 이데올로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신화,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이 변화는 여러분의 마음보다 더 깊이 들어갑니다. 생각 위로 떠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 생각보다 훨씬 더 커다란 우리 존재 안의 어떤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즉,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 현재 증가하고 있는 새로운 의식의 핵심입니다. 생각을 초월하게 되면, 여러분은 과거에 여러분이 늘 동일시했던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그만 두게 됩니다.
 
에고란 겉모습, 주로 생각이라는 겉모습과의 동일시입니다. 만일 악마라는 것이 있다면, 악마는 겉모습과의 완전한 동일시입니다. 물리적인 겉모습, 생각이나 감정이라는 겉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우리는 바로 악마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겉모습과 동일시할 때, 혹은 자기 생각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잊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인 신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신이 창조한 세상의 모든 타인들과도 연결되어 있음에도 말이죠. 이렇게 내가 남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요,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이요, 힌두교에서 말하는 환상입니다. 


나는 나일 뿐, 남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착각이 나의 생각이나 행동을 지배할 경우, 내가 창조하는 세상은 어떨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지금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지를 살펴 보십시요. 역사책을 읽어 보십시요. 아니면 그냥 오늘밤 뉴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번역자 주. 달라이 라마는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결론적으로 행복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서 바로 이렇게 자신과 타인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훈련을 제시한다. 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굶주려 죽고 있는 어떤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자신이 그 아이가 되었다고 상상을 하면서, 그 아이가 겪을 고통을 느껴본다. 자신과 남이 연결되어 있음을 충분히 느낄 때 우리는 연민과 사랑과 자비를 가지게 된다. 혹은 거꾸로 자신과 남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축복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이 모든 세상 사람들, 그리고 존재의 근원인 신이 나를 도와 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과 남이 연결되어 있음을 잊게 될 때 우리는 흔히 신문이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세상이 경쟁으로 가득 차 있으니 경쟁에서 남을 이겨 살아 남아야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게 된다.)

 
만일 인간 마음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똑 같은 고통스런 세상, 똑 같은 악마, 똑 같은 마음의 오작동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 책의 제목, A New Earth, “새 땅”은 성경에서 얻었습니다. 성경에 나왔던 새 땅이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오늘날에 가장 잘 적용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둘 다에 나오는데, 기존의 세상이 무너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늘”이란 어떤 물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 의식 속에 있는 내적인 영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하늘도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반대로 이런 의식이 외적으로 드러난 겉모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겉모습은 반드시 내면 의식이나 마음이 표출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총체적인 인간의식과 지구상의 생명들은 모두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이란 새롭게 떠오를 변혁된 인간 의식을 가리키며, “새 땅”이란 그러한 새 의식이 물질적인 영역에 반영된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삶과 인간의 의식은 지구에 있는 생명체들과 하나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삶과 의식이 변할 때 지질적, 기후적인 변화들이 지구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변화는 이미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가 목격하고 있습니다.
 



번역자가 제시하는 연습 문제
 
1. 이 시대에 깨달음이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2. 꽃, 크리스탈, 새가 깨달음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3. 자아를 구성하는 두 존재인 에고와 의식은 각각 어떤 존재들인가?
 
4. 깨달음의 첫번째 과정은 무엇인가?
 
5. 이 책의 목적은 무엇인가?

6 종교를 창시한 깨달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르쳤던 두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7. 톨레가 말하는 마음의 오작동이란 무엇인가?
 
8. 마음의 오작동은 어떤 결과를 낳나?
 
9. 톨레는 왜 깨달음을 논하면서 인간의 광기를 설명했나?
 
10. 종교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나, 방해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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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에카르트 톨레 A New Earth 1장 본문, 작성자 장용창

http://blog.naver.com/wkwdydckd/55091057


에카르트 톨레가 지은 A New Earth라는 책을 류시화 선생님이 "NOW,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씁니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2378178&orderClick=LAG

 
저는 이 책을 "깨달음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2장까지 번역 마쳤을 때 출간사실을 알고 

번역을 마쳤습니다. 그래도 번역하면서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즐거운 추억입니다. 그리고 

제 번역에는 원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주석과 연습문제가 많이 있어서 아마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008년 9월 장용창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