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칼럼] ‘학습’은 있어도, ‘교육’은 없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고등학교 때부터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자주 펼쳐보곤 했던 필자는 한때 그 전집의 제1권을 많이 좋아했다. 청년 마르크스의 글들을 모은 그 책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의 사색”이라는 주제의 고등학교 졸업 에세이였다. 17살 청소년이 썼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의 그 글에서는 마르크스가 여러 직업들에 대한 화려한 환상들을 경고하면서 “나를 (정신적으로) 더 고귀하게 만들고 속세의 군중들과 차별화시키는 동시에 타자들을, 인류의 공공선을 위해서도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이어야 한다”는 선택의 법칙을 이야기했다. 청소년 마르크스가 그때에 스스로 직업 선택을 해보지도 않았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그가 이미 고교 시절부터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뼈를 깎는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했는데, 그 고민의 수준에 비해서 필자 자신은 초라하게 보였을 뿐이다.
10대의 후반에 이미 지적인 생활을 한 것은 과연 마르크스와 같은 유럽 천재들뿐이었던가? 마르크스가 고교에 다녔던 그 시절의 조선에서도 10대 후반의 청년 지식인이 자기 고민을 우아한 언어로 표현해 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천재들이야 아예 10대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글밭을 열심히 갈았다. 열 살 이전에 쓴 글을 모아 문집 하나 만들 정도로 ‘글’을 일찍부터 벗삼은 다산 정약용은, 마르크스가 고교 졸업 에세이를 썼던 그 나이에 화순읍의 동림사에서 책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의 재주만 믿다가는 나이만 들면 대부분 바보스러워진다, 이를 경계해 소홀히 하거나 느리게 하지 말자고, 가는 세월은 참으로 허망하다”라고 시를 썼다. 자신을 매일 스스로 극복해가면서 자율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의지력이 없다면 ‘나이’라는 무서운 적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많은 이들이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를 다산은 오늘날의 ‘고2’에 해당하는 나이에 아름다운 글로 표현했다. 다산이야 천재였지만 조선시대 일반 지성인들이 10대 후반에 썼던 글들을 봐도 많은 경우에는 그 성숙함에 놀라게 된다. 그들은 이미 그 나이에 ‘독립적 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10대들에게 개성의 발달이 허용돼 있었지만 ‘개성 만세’를 부르는 21세기 벽두의 대한민국에서는 그 반대로 열일곱살 청년이 ‘독립적 개인’이 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가 ‘개인’이기 전에 세계 최장인 평균 주당 50시간의 고된 학습노동을 무조건 해내야 하는 ‘학습기계’다. 그가 왜 친구들과의 성적 경쟁에 열과 성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직업 선택이야 본인 스스로 해도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도 그에게 없는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한 고민도 사회가 부단히 차단시키려 한다. 우생열패 원칙이란 이 사회에서 성욕이나 식욕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신성불가침의 이데올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획일적인 내용을 남보다 철저하게 익히느라고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야 하고, 이 잔혹한 ‘암기 경시대회’에서 한 번만 지면 평생 낙오자가 되어 만인에게 짓밟힐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대한민국의 이팔청춘은, 과연 마르크스나 다산처럼 인생에 대한 고민 속에서 자율적 자아를 도야할 수 있는 심신의 여유가 있는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로 만드는 ‘교육’이란 우리에게 없다. 기업들에 이미 개성이 다 깨진 순응적 ‘인력’들을 공급해주는 ‘학습’만 있을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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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569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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