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 By Baird T. Spalding
초인생활 (超人生活): 히밀라야의 초인들, 베어드 T. 스폴딩 (1894 ~1897 스폴딩외 11명, 3년 6개월 영적탐사기)
'생명(LIFE)'에 대하여
- 대사들의 삶은 생명 그대로이고 길 그대로이다. 그들은 생명의 실상 그대로 살아간다. 그들은 생명이란 유일 원리(=진리=법칙)가 작용하는 것이요. 근원으로부터 결코 분리될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이 원리에 따라 살고 있으며 이 원리에 따르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서 생명이란 이론이 아니고 생생한 것이며 처음도 끝도 없는 사실(무한성)이다. 우리도 이와같은 순일한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그들은 생명이란 인간 개개인을 통하여 표현된 신이며 인간은 생명이 고도로 정화되고 최고로 선택된 통로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생명은 인간 개개인을 통해 정선되고 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주현절, 성육신, 주의 형상과 모양)
- 깨달은 사람들은 생명이 보편적이고 영원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진리를 전 인류에 밝혀야 한다. 무릇 형태 있는 생명은 무한한 공간에 충만히 있는 생명의 본질(무한성)이 나타난 결과물(신의 형상과 모양)일 뿐이다. 형태를 만들어 내는 창조력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활동할 것이다. 형태 있는 생명은 본원의 생명이 여러 가지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생명이 자신속에 있으며 자신속에서 언제나 충만하게 흐르고 있다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참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무소부재/본래성불/신인합일)
- 대사들은 유일 생명이 만물 속에서 만물을 통해서 빛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사실상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 한 생명의 정수로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생명(신성의 생명을 말하고 있다.)이 시작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생명이 형태를 띠게 되는 때를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생명에 시작이 있다고 생각한다.(피조물) 그러나 생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생명은 형태를 이루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또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어떤 생명을 선택하여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게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생명을 타락되게 사용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잘못이지 생명의 잘못은 아니다.(자유의지) 그렇더라도 생명은 중단되는 일도 없고 제한되는 일도 없이 자유롭게 흘러간다.(지옥도 악인도 주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존속한다.) 생명의 본질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존재하는 원리이다. 이 생명을 우리 속에 흐르도록 한다면 우리의 삶은 생명의 본질이 완전히 발현되는 삶이 될 것이다.
-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육신은 살아 있는 단위체가 되어 생명을 최대한도로 표현할수 있게 된다.(성육신/주현절)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생명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명을 이것 저것 제한한다. 그러나 참 길은 오직 하나 생명을 최대한도로 표현하는 것 뿐이다.
- 생명은 보편적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명과의 분리감이 없어진다면 완전한 생명의 삶을 살수 있다. 생명과 마음은 뗄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으므로 생명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확장하여 생명의 본래상을 보아야만 한다. 잡념, 망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난다. 이것은 외부로 나타난 현상에 마음이 반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 인도인들이 인간의 수명을 70세로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이 이 연령까지 최대한도로 업적을 이룰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70세는 완숙한 시기요 생명의 참뜻을 최대한도로 실현할수 있는 시기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이 완숙 기간의 5배를 살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 진리를 전혀 모르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러한 시간의 길이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시간이 인간을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70세까지 살았다면 인생의 모든 단계를 경험했을 것이나 그렇다고 생명이 70세로 한정된 것은 아니다. 5배라는 것도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원하기만 하면 5천배라도 살수 있다. 그렇더라도 인간은 70세가 되면 영적인 면으로 사물을 더욱 더 깊게 볼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40세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 “너희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다.”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있다. 이는 인간이란 죽음을 앞둔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려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존재임을 보고 놀란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생명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생명을 물질적인 척도로 본다거나 나이 숫자로 계산해서는 안된다.(세상적인 관념을 버려라) 이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생명은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어느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한다.(돈오돈수)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살고 있거나 미래에 살려고만 하고 있어 지금 여기에 있는 생명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죽어버린 것이요 미래는 현재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 뿐이다. 일체의 생명체가 생명속에서 존재하며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생명수를 마실수 있다. 영원히 살려고 하는 노력조차 필요 없다. 만약 현재를 온전히 살고 있다면 영원속에서 사는 것이다. 과거를 잊어 버려라(죄, 실패, 수치, 모욕등) 미래에다 자신을 투영하지 말라 지금만이 살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우리는 영원한 지금 속에서 살고 있다.
- 일설에 의하면 대사들은 37세라는 인생의 청춘 시기에 대각(enlightenment)을 얻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이러한 사실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산스크리트 문헌에 의하면 37은 영원을 의미하며 7이 한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에 7이나 37은 여러번 되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꼭 나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 생명 즉 참된 영적인 상태 속으로 인간의 의식이 확장되는 시기를 말한다.
- 깨달음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영혼이 성숙되는 것도 나이와 상관이 없다. 이 영혼의 성숙을 통하여 인간적인 관념이 떨어져 나간다. 마치 부풀어 오르는 꽃봉오리가 감싸고 있던 꽃 잎사귀를 제치고 꽃이 피어나듯 잘못된 관념을 제치고 피어난다.(주님의 선과 인간의 악은 연속선이 아니다. 디지털이다.) 늙은이가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뜻은 어린아이로 되돌아 간다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갈수 있을만큼 전친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은 물질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자기 앞에 펼쳐진 생명 그대로 산다.
- 상념이 외부의 영향을 받으면 즉 인간이 물질세계의 영향을 받으면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잠재 능력까지도 제약당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외부의 사실을 영적사실로서 수용하면 아니 된다. 외부로 나타난 사실은 생명과 분리된 상태에서의 사실로서 본래적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의 온전한 모습을 나타내는 삶이나 참으로 기쁘게 사는 삶이 불가능해진다. 천재란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벗어난 사람 즉 세상 사람들의 관념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제감) 보통 사람들이라도 나이들면 영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시계태엽이 풀려 버리듯 욕망의 삶이 풀려 버리고 참다운 의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참다운 의식이 계속 유지된다면 생명력이 고갈되지 않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이 무한히 펼쳐질 것이다.
- 과학자들은 인간의 육체 세포가 7년 이상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세포는 7년마다 새로운 세포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명에 7년이라는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7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생명은 한 주기로 활동하며 이 주기는 끝없이 되풀이 된다. 진실로 생명은 시작과 끝이 없으며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며 영원히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무한본질) 무릇 존재하고 있는 것 중에 생명이 없는 것은 없다. 만물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 바위도, 별도...
- 인간은 흔히 육체적인 연령과 수명을 말하지만 인간은 소위 수명이라고 부르는 시간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 육체 세포와 조직은 끊임없이 대체되고 새로워지기 때문에 인간은 얼마든지 생생하게 살수 있다. 그런데도 육체의 연령에 따라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 자신의 마음의 틀 즉 마음가짐에 따라 세포와 조직이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진리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부단히 새롭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육체를 새롭게 하는 세포가 형성되어 보다 완전하고 보다 생명력 있는 육체가 이루어진다.
- 우리가 생명을 참된 그대로 표현한다면 생명은 우리의 스승이 되고 책이 될 수도 있다. 육체의 모든 세포가 7년마다 전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의 육체 생명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우리의 육체 세포가 새로워지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면 생명은 주기와 주기를 넘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나무에서 새로 나온 싹은 그 나무가 어린 나무이든 오래된 나무이든 항상 새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새싹은 자신속에 완전한 나무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와같이 나무도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노화란 없다. 아무것도 늙지 않는다. 다만 늙는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관념이 문제이다. “인간에게 만물을 지배하는 권한이 주어졌다.”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생명은 나이로 측정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만 측정될수 있다. 생명은 영원한 현재이며 무한한 것이요 보편자, 신이라 하는 전체 의식의 살아 있는 움직임이다. 인간은 자기 편의대로 시간을 만들어 놓고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나 생명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 인간은 신의 법칙이 나타난 생명책이다. 따라서 생명의 지배 원리가 인체 각부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동안은 참나를 발견하고 참나를 실현해가는 과정이어야만 한다.(참나로서 나를 생각해야지 겉으로 드러난 자기 모습을 참나로서 생각하여 좌절에 빠지면 아니 된다.) 자신의 본성을 실현해 가는 과정속에서 인간의 비밀을 알게 된다. 자신을 직접 탐구하여 자신의 가장 깊숙한 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질을 깨달을수 있다.
- 죽음도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죽은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죽을 사람만이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지 참 사람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편의대로 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육체 인간, 물질 인간이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신의 참나 사이에 상상으로 장벽을 쌓아놓고 그 장벽을 넘을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수많은 과학자, 철학자들이 생명은 알수 없는 것, 해결할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 장벽을 만들고 그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해결할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 성경에 의하면 죽음의 원인은 죄라고 했다. 죄란 생명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상념과 감정을 말한다. 이것들이 생명이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치료책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즉 육체의 생명력을 빼앗고 육체를 의식으로부터 분리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잘못된 상념과 감정을 소멸시켜야 한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전진하라”
- 이 세상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과는 달리 대사들은 돈벌이에 종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러한 과정을 이미 통과하였다. 그들의 삶은 봉사에 있을뿐으로 오로지 남을 도와주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가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누구에게도 대가를 받는 것을 본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사람들에게 옷이나 먹을 것 등을 주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대사들은 봉사자이다. 대사들은 분명히 세상보다 위에 있어 세상에 주고 있으나 세상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있다.
- 대사들은 봉사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대사들을 찾아가는 것 같지도 않다. 대사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난다. 그들은 상념의 방사를 통하여 도와주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물론 한 두 사람이 도움을 받기도 하고 집단적으로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전 세계에 완전한 상념을 방사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상태를 치유하는 일이 된다고 한다. 대사들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진리를 이해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생필품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받고서야 비로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한다.(유대인의 성품, 야곱과 유사)
- 대사들이 설교한다거나 종교를 조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속에 있는 대사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사람들은 대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즉시 상태가 좋아진다. 그런데도 대사들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도운 것이지 자신들이 도와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뭐니뭐니 해도, 각성이 우선이다.) 아무리 도와준다 해도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대사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올바르게 고쳤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즉 도움을 받은 사람이 속에 근본적으로 갖고 있던 것이 나타났을뿐이다. 따라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 꼭 외부에 호소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 “종(servant)은 그만한 보수를 받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봉사하는 행위를 돈벌이에 사용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봉사하는 행위는 더 높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즉 종이 아니고 대사 수준으로 올라와야 한다. 물론 대사는 가장 큰 종이라 할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전부 봉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봉사만이 그들의 삶이며 하고 있는 일의 전부이다.
- 생명은 그저 끊임없이 진행하는 것이지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익은 생명의 진행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일뿐이다. 생명은 생명이 진행하면서 생명을 어느 정도 표현했는가? 생명의 질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생명을 표현한다는 것도 자기의 제한된 생각이 투영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 단순히 필요하다고 해서 편리하다고 해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타협해 버리면 그 힘에 어긋나는 것이다.
- 대사들은 아주 소량의 식사를 한다. 우리는 그들이 하루에 쌀 세톨밖에 먹지 않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도 육신이 필요한 생명력(prana)을 장시간 유지한다. 그들은 음식물을 철저히 씹는다. 하루종이 쌀 세톨을 씹기도 하는데 쌀 세톨로 육체가 유지하기에 충분한 생명력을 얻는다. 대사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식사 시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먹고 싶으면 먹을 뿐이지 보통 사람들과 같이 식사 시간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심지어 수백일 동안 전혀 먹지도 않고 지내는 일도 있다.(세상적인 관념, 잣대,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생명은 제한이 없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 우리가 아는 바로는 대사들은 잠을 지극히 적게 잔다. 하루에 2시간 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잠자는 시간에도 의식을 깨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살거나 우주 에너지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살아간다면 잠자지 않고도 살수 있다. 서양에서는 보통 잠이란 의식이 혼수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의식이 혼수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깨어나면 곧 의식을 회복할수 있지만 문제는 인간이 잠잘 때 참된 의미의 수면상태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머물다가 깨어난다는 것이다.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는 예수의 말씀은 혼수상태로부터 깨어나라는 뜻이다.
- 서양에서는 인체가 필요로 하는 음식보다 적어도 10배는 더 섭취하며 섭취한 음식물을 소화시키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낭비한다. 이 불필요하게 섭취한 음식물의 10분의 9를 소화하기 위해 쓰고 있는 에너지를 인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로 얼마든지 유효하게 쓸수도 있다. 그런데도 서양인들은 건강에 필요한 식사량의 10배는 섭취한다. 만약 이 에너지가 과다한 음식물을 소화하는데 쓰이지 않고 필요한 다른데로 쓰이거나 인간이 에테르로부터 직접 생명력 즉 에너지를 섭취할수 있다면 이 에너지는 인체의 각 기관에 직접 들어가 세포를 재생시켜 인체를 새롭게 갱생하게 할수 있다.
-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 만큼만 음식을 섭취하면 충분하다. 이보다 더 먹는 것은 육체에 과도한 부담만줄 뿐이다. 인간은 창조 원리(말씀/진리)에서 나온 질료를 섭취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참된 영양소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밤에 잠을 자는 것이 낮에 소진된 에너지를 보충시켜주듯이 음식물은 육신을 유지시켜 주는 재료가 된다.
- 대사들의 능력이나 생명이 어떠한지 알기 위하여 꼭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생명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생명의 표현수단에 불과한 외부의 형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의를 언제나 생명으로 향한다면 생명과 함께 하는 것이요 대사들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내부로, 하나님에게로, 무한성에게로, 절대성에게로)
-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대생명(LIFE)이라는 자각을 한다면 대사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사들의 삶이라고 해서 우리와 다른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대사들에게 특이한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참 생명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기적을 기대한다는 것은 참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인애만을 생각하라) 생명이란 내부에 있는 힘이 외부로 나타나는 힘의 과정이다. 생명은 모든 공간과 모든 생명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우주의 활동 원리이다.
- 많은 사람들은 대사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규칙을 정해주고 우리가 수행해야 할 어떤 법칙같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단체에서는 이와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쳐 수행자로 하여금 대사가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사례도 없지 않다. 대사를 만나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대사를 만난 사람이라도 유일 참 생명 이외에 다른 길을 생각한다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문제는 항상 마음가짐에 있다. 원래 영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타락하는 일도 죽는 일도 없다. 다만 인간 스스로가 생명과 조화하지 못하여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산다는 것이 힘들어질 때는 이미 생명과 어긋난 것이다. 어떤 부조화가 생겼다는 것은 벌써 생명과 어긋난 것이다. 이러한 부조화가 발생했다면 빨리 참생명으로 돌아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 나 자신의 근원과 접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사들이나 깨달은 스승들이 보여준 그대로 자신 속에서 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 한 대사나 스승을 만나봐야 소용이 없다.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아이들은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고 있으므로 행복하게 보인다. 아이들은 생명에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고 생명 그대로 살고 있다. 우리가 생명에 제한을 가하는 순간 풍성한 삶은 그치게 된다. 생명에는 본래 제한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생명에 제한을 가할수도 없다. 오직 생명에 대하여 갖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 생명에 대하여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가질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어린아이와 현자만이 행복하다.” 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는 아직 물질적인 가치를 모르고 현자는 물질적인 가치의 허망함을 알고 있다. 따라서 둘다 물질적인 외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생명 그대로 살수 있는 것이다.
- 인생의 가치를 영혼(Soul), 참나(Real Self), 내안의 스승(Inner Master)에서 찾을 것이지 이 세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참의식이 눈뜬 사람에 의해서 부여되고 있는 가치밖에 없다.
- 벽에 뚫어진 작은 구멍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세상을 다 보았다고 할수 있겠는가? 언덕을 보았다고 하자. 언덕위에는 풀, 나무, 바위, 동물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두가지만 보고 언덕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할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광막한 우주를 조그만 구멍을 통하여 보고 우주를 다 보았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 이와같은 식으로 생명 전체를 알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우주는 유일 무한 생명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깨닫게 되면 우리를 제한하는 것은 없어지고 우리의 비전은 확장되어 모든 생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 대사들은 의식 있는 생명체(동물성)를 먹지 않는다. 원래 인간은 모든 생명의 요소를 자신 속에 받아들여 동화시킬수 있어 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갈수 있고 하나될수 있다. 대사들은 이미 생명체에 동화된 사람들이고 생명과 하나 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대사들은 의식 있는 생명체를 먹을 필요가 없고 또 먹지도 않는다. “동물이 인간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데도 인도인들은 왜 동물을 숭배하는가?”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오직 하나의 생명만이 있음을 배웠더라도 모두가 진리를 깨달은 것도 아니고 모두가 대사는 아니다. 미국인들이 전부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는 것과 같이 인도인들도 또한 그러하다. 인도인들은 동물을 숭배(=“동물이 상징하는 신성을 숭배하는 것, 그 동물속의 신성을 예배하는 것, 그렇게 하여 동물로 표현된 신성을 자기것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도록 배웠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방식에 묶여 있다. 물론 인도인들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들이 일부 있기는 하다.
- 자신의 가장 높은 이상과 마음속 깊숙한 소원을 이루는 생명을 추구하라. 제한된 관념으로 보면 생명 또한 제한된다.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보편 생명에 이미 구비되어 있다.
- 그러면 대사들은 왜 그러한 사람들을 깨우쳐주지 못하는가? 그것은 바라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어쩔수 없다. 대사들이라 하더라도 대사들의 생각을 남에게 억지로 주입시킬수는 없는 일이다. 대사들은 다만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길을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까지 하여도 깨닫지 못한다면 때를 기다리며 각자 자신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대사들뿐만 아니라 높은 깨달음을 얻은 다른 성취자들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미망을 극복해줄수는 없다. 이와같은 노력은 본인 각자가 할 일이다.
- 생명이 표현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향상되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 남이 나를 대신해 주어서가 아니다. 스스로 노력 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도움으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힘을 스스로 막아 버리는 일이 된다.
- 대사들이 엄격한 고행이나 금욕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대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사들이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대사들 중에는 최상위 계급 출신도 있고 허리에 간단한 천만 두른 계급(사회적, 경제적으로 낮은 신분임을 나타낸다.) 출신도 있지만 따로 떨어져서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 물론 세상에 도움을 주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은둔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나 그나마 이것도 극소수이다. 이렇게 은둔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그룹의 일원이다. 그렇다고 그들 역시 고행이나 금욕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일정한 기간 동안 고행을 하는 요가 수행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고행이나 금욕생활을 원칙으로 하지는 않는다. 요가수행자(yogi)란 “위대한 실험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 종종 있는 일이지만 소위 대사나 위대한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엄격한 고행과 금욕생활을 하는 것을 볼수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거지에 불과하지 대사나 스승은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더럽고 불결하다. 말하자면 저들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와 같은 존재들이다. 어떤 사람이 길가에 앉아 주문을 외우고 있거나 삼매에 든 것처럼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대사나 스승이라고 볼수는 없다.
-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 대사들이 남에게 구걸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오히려 대사들은 인류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리기 위하여 헌신한다. 대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나 남에게 주어야 할 것을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대사들은 이곳 저곳 다니면서 자선행위를 요청하지도 않으며 자선 단체를 조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항상 남을 돕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쉽게 구별된다. 또한 단돈 1페라니라도 취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거지에 불과하면서도 자칭 대사, 스승이라고 일컫는 자들은 참된 대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들이다.
- 생명이란 언제나 주는 것이다. 무한한 공간을 자유자재로 흐르는 우주 생명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기도 하다. 생명을 근원(무한본질/신성자체)에서 받아들여 주위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다른 사람들도 생명을 발현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일은 대사들만의 일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것만이 참으로 사는 길이고 당연히 살아야 할 길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받기만 해서는 빚만지게 될뿐이고 생명을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볼수 없다. 얻으려고만 하면 도리어 잃어버리는 것이 물질세계의 법칙이다.
- 생명이란 행동, 자기표현이며 주는 것이다. 호흡하는데 내뿜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살기 위해서는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근원에서 나온 것은 근원으로 들아간다. 인간은 먼저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나서 행동으로 들어간다. 생명의 진행과정도 이와 똑같다. 주지 않고 받기만 하거나 받지 않고 주기만 하면 지나치게 과잉되거나 부족해서 생명의 흐름이 막혀 버린다. 자기의 근원에서 나온 것을 받고 받은 것을 쓸줄아는 것이 생명에 맞는 삶이 된다.
출처: http://bbs2.hani.co.kr/board/ns_believe/Contents.asp?STable=NSP_009024000&RNo=9527&Search=&Text=&Idx=14092&Sortin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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